배반의 그림자들(친구의 아내 그리고...) - 1부
본문
하학.. 헉.. 헉... -
- ....... -
자신의 몸 위에서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남편을 보며 지영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오랜만에 자신을 안았지만 섹스를 시작하자마자 힘겨움을 드러내는 남편을 보며 섹스를 그만두게 하고 싶었지만 간만에 욕심을 내는 남편의 마음을 꺾고 싶지는 않았기에 남편의 등을 살며시 끌어안고는 아랫도리를 움직여 남편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 ....... -
그렇게 자신의 보지에 자지를 밀어 넣는 남편의 등을 안은 체 지영은 문득 지나 간 자신의 시간이 떠올랐다.
자신의 나이 이제 서른일곱..
스무 살 대학에 입학하고 남편을 만나 불장난 같은 사랑을 하다 덜컥 임신을 했고 무서움에 집을 뛰쳐나와 친구의 집에서 몇 개월을 지내다 부모님에게 잡혀 집으로 돌아갔을 땐 이미 뱃속의 아기는 육 개월에 접어들었고 낙태 수술을 하면 위험 부담이 있다고 하는 의사의 말에 결국 양가 부모님들의 어쩔 수 없는 허락 하에 남편인 태준과 결혼을 했다. 그리고 곧이어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학업마저 포기한 체 남편과 딸의 뒷바라지를 하며 십 육년을 살아왔다.
십 육년의 세월은 너무도 빨리 지나간 것 같았다.
이십대의 추억 한 자락을 떠올리기 힘들만큼 남편과 딸아이만을 위해 살았던 시간이었고 가끔은 자신의 이런 삶이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더욱이 중학교에 다니던 딸을 공부시키기 위해 미국에 있는 고모에게 보내고 나서는 더욱 삶이 무료하고 짜증스러웠다. 그렇게 문득 떠오른 자신의 삶을 돌아보던 지영이 남편이 허리 속도를 높이자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스멀거리며 피어오르는 흥분감에 눈을 내려 감았다.
- 으.. 으........ -
- ....... -
하지만 잠시 후 아랫배를 밀착한 남편이 사정을 시작하자 지영은 밀려드는 아쉬움을 참으며 남편의 등을 쓸어줬고 잠시 후 사정을 마친 남편이 옆으로 쓰러지자 감고 있던 눈을 뜨고는 숨을 헐떡이는 남편을 일렁이는 시선으로 바라보다 천정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 샤워 같이 안 할래? -
숨을 고르던 남편의 말에 지영이 시선을 다시 남편에게 옮겼다.
- 당신 먼저 해. 나는 나중에 할게 -
- 그래, 알았어 -
남편이 침대에서 일어나 샤워를 하기 위해 방을 나서자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지영이 보지에서 새어나오는 정액을 막기 위해 조금 전 남편이 벗겨 놓은 자신의 팬티를 잡아 보지에 대고는 시선을 침대로 향했다.
삼 개월만의 섹스였다.
하지만 오늘도 남편은 허전함만을 자신에게 남기고 짧은 섹스를 끝냈다. 스무 살 처음 남편에게 순결을 주고 그 후로 아이의 출산과 육아 때문에 남편과의 섹스는 급격하게 줄었고 아이가 어느 정도 크고 나서는 이상하게 남편의 섹스에 지영 자신은 만족을 하지 못했다. 스무 살 때 매일 같이 남편과 섹스를 할 때만해도 섹스라는 호기심과 젊은 혈기로 인해 그저 남편과 섹스를 한다는 것에 만족을 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섹스란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가며 남편과의 섹스가 조금씩 불만족스러웠고 늘 아쉬움을 남기는 남편의 섹스에 갈증에 휩싸이기도 했다. 조금 전 같이 샤워를 하자는 것도 부부간의 애정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몸을 씻겨 줄 것을 부탁하고 샤워가 끝나면 자신을 두고 남편은 버릇처럼 욕실을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지영은 그런 남편을 대신해 아이에게 모든 걸 풀었다.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했고 아이를 위해 자신의 모든 걸 투자했다. 시간과 정성, 한마디로 자신은 좋은 엄마 역할에 몰두하고 그것을 통해 삶의 유일한 기쁨을 얻어갔다. 그런데 아이가 같은 반 아이처럼 유학을 가고 싶다고 말을 했고 미국에 있는 고모에게 아이를 보내고 돌아온 순간 지영은 그제야 느꼈다. 자신의 삶이 너무 허무하다는 것과 딸로 인해 그나마 자신이 그 허무했던 삶을 애써 버텨 왔다는 것을 말이다. 지영은 그렇게 하루의 시간이 더욱 더해지며 급격하게 우울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 참, 세준이 말이야. 그 자식 이사를 한다고 하던데 -
- 세준씨가? -
저녁을 먹던 지영이 남편의 말에 되물었다.
- 응, 오늘 통화를 했는데 집 주인이 이번 계약이 끝나면 집을 비워 달라고 했나 봐 -
- 언제까지? -
- 두 달도 안 남았다지, 집 주인이 전에 한 번 말을 하긴 했는데 그냥 넘겼는데 이번에 다시 전화를 해서 말했나 봐 -
- 걱정이겠네. 거기서 산지 꽤 됐잖아 -
- 육 년 정도 됐지. 결혼하고 바로 들어가서 살았잖아 -
- 그런데 갑자기 주인 왜 집을 비워달라는 거야? -
- 집을 팔기로 했다나 봐, 어디 시골에 전원주택을 짓는다고 했데 -
- 걱정이겠다. 죽은 희정씨 때문에 이사 안 가려고 했었는데 -
- 그러게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당신이 우리 동네 근처 집 좀 알아 봐 -
- 내가? -
- 응, 그 녀석 회사 다니느라 시간이 별로 없잖아, 그러니까 당신 좀 알아 봐 -
- 그건 어렵지 않은데 세준씨가 이리로 온데? -
- 내가 오라고 했어. 혼자 지내는데 가까이 있으면 좋잖아. 병준이도 여기서 멀지 않고 좋잖아? -
- 그렇기는 하네, 알았어. 알아볼게 -
남편과 세준 그리고 병준이란 친구는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대학에서 남편을 만나고 자연스레 친해졌고 자신이 임신을 하고 집을 나왔을 때도 많은 도움을 준 친구들이었고 특히 세준은 마음 씀씀이가 남자치고는 고왔다. 그랬기에 지영은 그런 세준을 좋아했고 또 다른 친구였던 병준도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세 친구 중 맨 마지막에 결혼을 했던 세준이 삼 년 전 아내를 사고로 잃고 혼자가 되면서 세준의 삶은 많이 변했다. 아내를 잃은 슬픔을 겨우 추스르던 순간 아내의 사고 보상금으로 받은 돈을 펀드 매니저였던 사촌 형이 불려 주겠다며 가져갔고 얼마 후 그 돈은 물론이고 재산까지 탕진한 형이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고객의 계좌에 손을 댔고 그것이 발각나면서 사촌 형이 자살을 하는 바람에 또 한 번 큰 충격을 받았었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그 모든 걸 추스른 세준은 다행히 아무 일 없다는 듯 삶을 살아가고 있었지만 가끔 모임에서 세준을 볼 때마다 지영은 세준의 얼굴에 깊게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를 느낄 수 있었고 그건 병준의 아내인 연주도 그런 것 같다는 말을 했었다.
- 이야, 오늘 이거 잔치하는 거네 -
새로 이사를 하고 집들이를 한다는 말에 퇴근을 하고 친구 세준의 집으로 온 태준이 한 살 가득 차려진 중화요리를 보고 만연한 미소를 머금으며 자리에 앉았다.
- 병준이는 늦는가 보죠? -
자리에 앉으며 태준이 연주에게 물었다.
- 네, 오늘 공사 현장에서 사고가 있어서 거기 내려갔어요. 늦게나 온데요 -
- 자식 먹을 복이 어쩌면 그렇게 없냐, 이 음식 다 내가 먹어야겠다. 야, 세준아 잔 하나 가져와 -
- 기다려 -
- 제가 할게요 -
일어나려는 세준을 잡으며 연주가 일어나 잔을 들고 다시 돌아왔고 네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오랜만에 친구와 친구 와이프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세준은 마음이 푸근해짐을 느꼈다.
- 야, 세준아 -
- 응 -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술기운에 서서히 빠져들던 태분이 세준을 불렀다.
- 너, 만나는 여자 없냐? -
- 자식은... -
남편의 갑작스런 물음에 지영이 남편의 팔을 잡았지만 살짝 취기가 오른 태준이 아랑곳없이 말을 이어갔다.
- 제수씨 간지도 벌써 삼년이 넘어간다. 이제는 다른 여자 만나도 괜찮은 거 아냐 -
- 알았어, 그만해 -
- 그만하기는, 봐라, 여자가 없으니까 집들이도 이렇게 중화요리나 시켜먹고.. -
- 요즘은 다 이렇게 해요 -
태준의 말을 막으며 연주가 말을 했지만 그런 연주를 보며 미소를 짓던 태준이 다시 세준에게 입을 열었다.
- 너 청상과부로 늙을 거냐? 아니구나, 넌 남자니까 청상과부가 아니라 청상홀아비라고 해야 하나 -
- ...... -
- 그만해, 자기는 왜 오늘 같은 날 그런 이야기를 해서 세준씨 불편하게 하는데.. -
- 불편하기는 이게 친구니까 이렇게 이야기 해주는 거야. 다른 사람 같으면 이런 이야기 쉽게 할 수 있겠어? 안 그러냐, 세준아? -
- 그래, 신경 써줘서 고맙다.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고 술이나 먹자 -
- 그래요. 우리 건배해요 -
연주가 건배를 제의하자 지영이 그러자고 말을 했고 네 사람은 건배를 하며 술잔을 기울였고 연주가 집안이 좀 썰렁하다며 조그만 가구라도 들여놓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말과 함께 혼자가기 싫으면 자신이 같이 가겠다고 세준에게 말을 하자 지영이 그런 연주를 보며 참으로 붙임성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과 함께 괜찮다며 미소를 짓는 세준을 잠시 바라보았다.
[ 나는 낭만 고양이..... ]
술과 음식을 먹다 노래방에 가자는 연주의 말에 노래방으로 온 일행들은 연주의 노래에 맞춰 박수를 쳤고 잠시 후 박수를 치던 세준이 담배 한 대를 피고 오겠다며 나가자 지영이 그런 세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자, 다음은 태준씨가 하세요 -
- 오케이, 알겠습니다 -
연주가 마이크를 넘겨주자 노래를 부르기 위해 일어서는 남편을 보던 지영이 자신의 손을 잡아끄는 남편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잠시 뒤 자신만의 흥에 빠져 신나게 노래를 부르는 남편을 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 언니, 세준씨는 어디 갔어요? -
- 담배 피고 들어온다고 나갔는데 -
- 그래요 -
벌써 남편의 노래가 끝나감에도 세준이 들어오지 않자 창밖을 바라보던 지영이 노래가 끝나고 새로운 노래를 부르기 위해 마이크를 나눠 잡은 두 사람을 보며 세준을 찾아보겠노라며 말을 하고 방을 나갔고 연주와 태준이 반주가 흘러나오자 연주와 태준이 노래를 시작했다.
- 뭐해요? -
노래방을 나와 입구에서 담배를 피던 세준이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흠칫하며 고개를 돌리다 지영이 눈에 들어오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 어, 왜 나왔어요? -
- 안 들어와서 찾으러 왔죠 -
- 커피 좀 마시고 담배를 피다보니 좀 시간이 흘렀네요 -
- ....... -
세준의 말에 커피 잔을 흘끗 보던 지영은 두 개비나 되는 담배가 꺼져 있는 것을 보았지만 모른 척 하며 세준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아까 술을 마시는 내내 여자를 만나라고 다그치던 남편의 말에 마음이 언짢았던 것 같았다.
- 우리 그이 때문에 마음 상했죠? -
- 아닙니다. 다 절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요 -
-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네요 -
세준의 말에 웃으며 말을 하던 순간 세준이 담배를 입에 물고 길게 숨을 들여 마시고는 연기를 내뿜으며 담배를 커피 잔에 끄자 말을 이어갔다.
- 세준씨 만나는 여자 정말 없어요? -
- 훗, 여자는 무슨... 여자한테 신경 쓰고 싶지 않아요 -
- 연애를 하라는 게 아니라, 그냥 친구라도 있어서 마음이 불편할 때 이것저것 이야기 할 수 있으면 좋잖아요 -
- 그런 친구라면 있잖아요 -
- 있어요? -
- 네, 지영씨요 -
- 저요? -
세준의 말에 지영이 놀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 네, 흔히들 그러잖아요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그런데 지영씨하고 저하고는 16년이나 알고 지냈으니 친구사이 맞잖아요. 그리고 제가 힘들 때 신경도 제일 많이 써줬고, 지금도 이렇게 절 찾아내고 이 정도면 좋은 친구 아닌가요? -
- 그런가요? -
- 네, 지영씨는 정말 좋은 친구입니다. 좋은 여자이기도 하고.. -
- 훗, 제가 여자로 보이기는 하세요? -
- 그럼요, 지영씨가 남잔가요. 여자잖아요 -
- ...... -
세준의 농담에 지영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그런 지영을 바라보며 맑은 미소를 지어보인 세준이 들어가자는 몸짓을 보이자 지영이 세준을 따라 노래방으로 다시 들어서고 있었다.
- 저기 내일 바빠? -
- 아니, 왜? -
남편의 옷을 받아 들던 지영이 대답을 했다.
- 그럼, 내일 세준이 집에 좀 가봐 -
- 왜? -
- 모레 세준이 와이프 기일이잖아. 당신이 가서 좀 도와 줘, 전에는 멀어서 그랬다지만 이제는 바로 코앞에서 사는데 도우면서 살면 좋잖아 -
- 당신 내일 출장 가서 금요일에 온다고 했잖아? -
- 그러니까 당신이 좀 가봐, 내가 못가니까 당신이라도 좀 들여다보고 도와 줘 -
- 세준씨가 도와달래? -
- 야, 세준이가 도와 달라고 하겠냐, 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니? -
그냥 무심코 던진 한 마디에 남편이 핀잔을 하자 지영이 은근히 부아가 올랐다.
- 아니, 네가 뭐라고 했다고 생각을 하고 사냐고 물어, 그런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데.. -
- 뭐? 내가 어때서 나만큼만 하라고 해 -
- 당신만큼, 그렇게 잘하는 사람이 세희 미국에 보내놓고 전화 몇 번이나 했어? -
- 왜 갑자기 여기서 세희가 나오는데.. 그리고 거기랑 여기는 시차가 정 반대잖아, 그래서 전화를 자주 못하는 거잖아 -
- 핑계가 좋다. 술 먹고 돌아다닐 시간은 있어도 전화할 시간은 없지 -
- 아니, 이게 정말... -
- 뭐, 이게.. 당신 지금 말 다했어 -
- 어휴, 됐다. 됐어. 어떻게 나이를 먹을수록 여자가 드세 지기만 하냐. 좀 고분고분한 맛이 있어야지. 아우, 내 팔자야.. -
- ...... -
눈을 부라리며 말을 한 남편이 휙 하니 방을 나가자 잠시 방문을 바라보던 지영이 침대로 다가가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언제부터인가 자신에게 던져진 남편의 말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 박히고 있었다. 더욱이 시간이 지날수록 남편은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발언을 자주했고 딸을 유학 보내고 허전한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자신에게 그런 남편의 차가운 말은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렇게 이제는 자신의 삶속에서 남편의 자리가 점점 비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지영은 눈시울을 붉히며 허전한 자신의 가슴을 애써 달래갔다.
- 이거 미안해서 어떡하죠,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
운전을 하던 세준이 미안함을 표시하자 그런 세준을 바라보며 지영이 미소를 머금었다.
- 이제는 이웃사촌이잖아요. 그리고 우린 친구라면서요, 친구 사이에 이 정도는 기본 아니에요? -
-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기는 한데, 그래도 미안하네요 -
- 그만해요, 그나저나 매년 휴가를 이렇게 써서 어떡해요? -
- 괜찮습니다 -
해마다 아내의 기일에 맞춰 휴가를 내고 손수 제사상을 차리는 세준을 보며 지영은 참으로 대단한 남자라는 생각을 했고 얼마나 아내를 사랑하기에 해마다 이렇게 휴가를 내고 손수 제사상을 차리는지 궁금했다. 사실 세준과 죽은 세준의 아내 선희는 크게 다툼 없이 살았지만 그렇다고 흔히 말하는 닭살커플은 아니었기에 지영은 세준의 지금 이런 행동이 조금 궁금했다.
- 세준씨 -
- 네 -
- 친구로 뭐 하나 물어도 돼요? -
- 그래요 -
- 아직도 선희 못 잊을 만큼 사랑하세요? -
문득 떠오른 궁금증에 지영이 조심스레 물었고 그 물음에 잠시 생각에 잠기던 세준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 못 잊을 만큼 사랑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못 잊을 만큼 안타까워서 그래요 -
- 안타까워서? -
- 네, 실은 아내가 친정집에 가다가 사고를 당한 날 저도 함께 가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그 날 회사 사람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거길 가는 바람에 아내 혼자 친정집을 가게 됐고 그러다가 사고가 난 겁니다. 만약 그때 내가 함께 갔더라면 어쩌면 아내는 지금 제 곁에 있을지도 모르죠 -
- 그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잖아요. 세준씨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
- 그래서 안타깝다고 한 겁니다. 자꾸 어쩌면 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
- ....... -
말을 마친 세준의 얼굴이 살짝 굳어지는 걸 보며 지영은 괜한 걸 물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 참, 연주가 미안하데요. 친정 식구들하고 여행만 가지 않았어도 자기도 도와주고 싶었데요 -
- 후후, 이거 이사 잘 왔는데요. 이렇게 여기저기서 도와준다고 하니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올걸 그랬네요 -
- 그러게 그럼 저도 친구하고 좀 더 재미있게 지낼 수 있었을 텐데 -
- ...... -
지영의 말에 세준이 미소를 짓다가 차가 마트에 도착하자 주차장을 향해 차를 몰기 시작했고 잠시 후 카트 하나를 밀며 무언가 이야기를 주고받던 밝은 표정으로 이것저것 둘러보며 필요한 물품을 카트에 담으며 장을 보기 시작했다.
- ..... -
방에서 혼자 제사를 지내는 세준을 지켜보며 지영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세준의 아내가 죽은 첫해 남편과 함께 제사를 세준 아내의 제사에 참석하기는 했지만 그대는 병준과 연주도 있었기에 별 기분은 없었지만 세준의 집에서 세준과 둘만이 조용하게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것이 좀 묘한 기분을 들게 했다.
남편과 결혼을 하고 삼년이 지났을 무렵 홀어머니를 여의고 혼자 남은 세준은 그나마 남아있던 큰집과도 사촌 형의 일로 멀어져버렸고 아내와 달리 교회를 다니던 장모와 큰 처형이 아내의 제사를 지내지 말라는 말을 하자 아내와 사이에 자식이 없던 세준은 자신이 최소한 재혼을 할 때까지 만이라도 제사를 지내겠다며 이렇게 혼자 아내의 제사를 지내고 있던 것이다. 그렇게 아내의 사진 앞에 절을 하고 있는 세준을 보며 지영은 문득 자신이 저렇게 욱었다면 지금 자신의 남편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 그냥 갔어도 되는데.. -
제사를 마치고 상을 치우던 세준이 지영에게 말을 했다.
- 괜찮아요. 그이도 없고 집에 가면 혼자뿐인데요 -
- 그래도, 이거 치우고 제가 바래다줄게요 -
- 아뇨, 우리 그러지 말고 술이나 한잔 할래요 -
- 술이요? -
- 네, 세준씨도 마음이 그렇게 좋을 리는 없고 나도 집에 가면 혼자라 기분이 좀 그런데 우리 술 한잔해요. 괜찮죠? -
- 그래요, 그럼... -
지영의 말에 세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했다.
- 연주하고 병준씨가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
- 그러게요, 태준이도 있었으면 좋았을 테고 말입니다 -
- ...... -
벌써 몇 잔의 술잔이 오고가던 지영이 살짝 발그스레해진 얼굴로 말을 했고 다음 순간 남편의 말이 나오자 지영의 얼굴이 굳어졌고 그런 지영을 보던 세준이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 세준씨 -
- 네 -
- 세준씨 보기에 내가 행복해 보여요? -
- 그게 무슨? -
지영의 느닷없는 질문에 세준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 세준씨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잖아요. 스무 한살 때 엄마가 되어버린 내 모습도 그리고 많은 세월 동안 서서히 변해가는 내 모습도 오랜 시간 봐왔잖아요. 그러니까 누구보다도 날 잘 알잖아요. 그런 세준씨가 보기에 내가 행복해 보이냐고요? -
- 글쎄요, 지영씨가 말하는 행복의 기준이 뭔데요? -
- ....... -
자신의 물음에 선문답을 하는 세준을 바라보던 지영이 술잔을 비우고 잔을 채우려하자 세준이 병을 넘겨받아 술잔을 채웠다.
- 제 기준의 행복은 간단해요. 식구들 건강하고 특히 우리 세희 무사하게 컸으면 좋겠고.. 그리고.. -
- ...... -
말을 멈추고 술잔을 비워버리는 지영에게 천천히 마시라고 하고 싶었지만 지영의 표정을 보는 순간 말없이 비어버린 술잔을 다시 채울 수밖에 없었다.
- 그리고 난 여자로써 행복해지고 싶어요. 몸도, 마음도 모두... -
- 태준이하고 안 좋은 일 있었어요? -
- 안 좋은 일.. 훗, 그 사람에게 난 이제 아무 소용없는 사람이에요. 특히 여자로써는.. -
- 천천히 마셔요 -
다시 술잔을 비우려는 지영을 만류하던 세준이 기어이 술잔을 비우려는 지영을 따라 자신도 술잔을 비웠다.
- 세준씨가 우린 친구라고 하니까, 이런 말을 하지만 나 아직 여자에요. 한 사람의 아내로 엄마로 역할도 있지만 아직 여자이고 싶어요. 그런데 어디에도 그런 내 모습은 없어요. 한 지영이란 존재는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어요 -
- ........ -
- 세준씨 그거 알아요. 티브에서 우울증, 우울증 하면서 그것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도 있다는 말을 들을 때 그건 자신의 마음이 약해서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그 마음 알 것도 같아요. 너무 쓸쓸해요 -
- 지영씨 -
- 네 -
- 지영씨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지만 그런 건 마음이 약해서라는 말도 맞을 겁니다. 우울증이 마음이 약해서 오는 건 사실이니까요 -
- 그런가요? -
- 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이 마음이 허약한 나약한 인간이란 말은 아닙니다. 그 사람을 둘러싼 환경이 조금씩 그 사람을 그렇게 내몰아 가니 말입니다. 그 환경은 그 사람이 어쩌기에는 분명 힘에 겨울 테고 말입니다 -
-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
- 내가 그랬으니까요 -
- ....... -
어느덧 술기운이 오른 듯 살짝 풀린 눈으로 지영이 세준을 바라보았다.
- 아내가 죽고, 형이 그 아내의 목숨 값을 다 날릴 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나 같은 인간이 살아서 뭐할까, 그냥 마음 편하게 죽어버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어요. 그러면서 하루하루 사는 게 짜증스럽고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홀가분하고 싶었어요 -
- 혹시 재작년에 시골에 가고 싶다고 말할 때가 그때인가 보죠 -
지영의 말에 세준이 미소를 머금었다.
- 역시 친구는 다르네요. 그런 걸 다 기억하고... -
미소를 지으며 말을 하던 세준이 술잔을 비우자 자신도 술잔을 비운 지영이 세준과 자신의 술잔을 채우고 있었다.
- 지영씨도 좋은 것만 생각하도록 해요. 자꾸만 외롭고 슬프다고 생각하면 정말 내 자신이 초라하게 보일 겁니다. 그럴수록 더 열심히 움직이고 무언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봐요. 큰 도움이 될 테니 말입니다 -
- 세준씨는 대단하네요 -
- 제가요? -
- 네, 그런 걸 다 이겨내고 지금은 열심히 살잖아요. 그리고 이렇게 죽은 선희씨를 못 잊어서 해마다 제사도 지내주고 그게 다 선희씨를 사랑해서 그런 거잖아요? -
- 후우... -
갑자기 세준이 한숨을 길게 내쉬고 술잔을 비우자 지영이 흐트러진 시선으로 세준을 응시했다.
- 세상은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저도 그럴 테고 말입니다 -
- 무슨 말이에요? -
- 그렇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제가 아내를 깊이 사랑해서 이러는 게 아닐지도 모르고 또 생각만큼 열심히 살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
- 그래요? -
- 네 -
세준이 대답을 듣던 지영이 술잔을 들고 건배를 권하자 술잔을 들고 술을 넘기던 세준이 급격하게 취기가 오르는 것을 느끼며 자신이 취해가고 있음을 느꼈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계속 술을 권하는 지영을 따라 몇 잔의 술을 더 넘겼다.
- 세준씨.. -
- 네 -
세준을 부르는 지영의 목소리가 많이 흐트러지고 있었고 대답을 하는 세준의 표정도 술에 취한 모습이었다.
- 우리 친구라고 했으니까, 오늘 말 놓으면 어떨까요? -
- 왜요, 그러고 싶어요? -
- 네, 나이도 동갑이고 이렇게 둘이 술도 같이 먹었는데 오늘만큼은 말 놓기로 하죠 -
- 음, 그래요 -
세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하자 지영이 미소를 머금은 체 세준을 바라보았다.
- 어이, 세준 친구.. -
- 응 -
- 친구 가끔 기분 나쁠 때가 있어 -
- 내가? 언제? -
- 나랑 더 친하다면서 가끔 연주하고 더 친한 척 할 때, 그때 살짝 기분 나빠 -
- 어째서? -
- 말했잖아, 나랑 더 오랜 시간 봐왔으면서 이제 겨우 오년 밖에 안 본 연주하고 더 친한 척 하는데 친구 같으면 기분 안 나쁘겠어? -
- 이상하다. 난 더 친한 척 없는데 -
- 그랬거든, 그럴 때마다 그런 생각도 했어. 연주가 나 보다 더 젊어서 그래서 매력이 많아 그런 건가하고 말이야 -
- 하하, 그런 게 어디 있어 -
지영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세준이 크게 웃었고 다시 술잔을 들어 비우자 지영도 술잔을 함께 비웠다.
- 왜 웃어? -
- 무슨 매력 타령씩이나.. -
- 뭐야, 그 말은 내가 여자로서 매력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야? -
- 아니, 그 말이 아니라 친구 와이프들인데 무슨 매력을 따지냐는 말이야 -
- 그래, 그럼 이번에 생각해 봐, 친구가 보기에 나 어때? 내가 여자로서 그렇게 매력이 없어 보여? -
- 글쎄, 그런 생각을 해 본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
- 그러니까 오늘 한 번 생각해 봐, 내가 그렇게 여자로서 매력이 없어졌어? -
- 음, 아닌데 친구도 나름 매력 있어. 아직 피부도 좋아 보이고 그리고.... -
- 그리고 뭐? -
- 말하기가 좀 그런데.. -
- 괜찮아, 오늘은 우리 둘이 친구니까 오늘만큼은 그냥 말해 봐. 어서, 궁금해 -
- 몸매도 나름 괜찮아 보이고 -
- 정말? -
- 응 -
세준의 대답에 지영이 술에 취한 시선으로 자신의 몸을 내려 보며 한참이나 바라보았고 그런 지영을 보던 세준이 술잔을 들어 술을 마시고는 술잔을 다시 채웠다.
- 다행이다. 그런 대로 내가 괜찮다니 -
- 그렇다니까 누가 친구보고 낼 모레 사십이라고 하겠어 -
- 그럼, 이십 대 후반으로 보여? -
- 아니, 오십대... 하하... -
- ...... -
크게 웃는 세준을 보며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지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세준에게 다가가 세준의 팔을 꼬집자 아프다는 표정을 짓던 세준이 몸을 피하기 시작했다.
- 다시 말해봐, 뭐 오십대.. 친구라는 인간이 사람을 놀려 -
- 아니야, 취소할게, 취소.. -
피하려는 세준을 쫓아 몸을 움직이던 지영이 세준이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나자 자신도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순간 갑자기 밀려오는 술기운에 몸을 크게 휘청거렸다.
- 어... -
[ 털썩.. ]
넘어지려는 지영을 잡기 위해 팔을 뻗어 세준이 안으려 했지만 이미 세준도 취해있던 탓에 두 사람이 그대로 엉기며 자리에 쓰러졌다.
- 아... 아파.... -
- ...... -
공교롭게도 지영의 허리를 안은 세준이 쓰러진 지영의 몸 위에 포갠 자세로 넘어졌고 아프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는 지영을 내려 보던 세준이 조금 전의 다급함 때문이었는지 술기운이 갑자기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 ...... -
그렇게 술기운에 정신이 조금 흐려지는 것을 느끼던 세준이 다시 지영을 바라보는 순간 머리카락 하나가 지영의 입술에 묻어 있는 것을 보자 손을 뻗어 지영의 입술에 묻어 있는 머리칼을 떼려했고 그 순간 자신의 입술에 세준의 손가락이 닿는 것을 느끼던 지영이 그런 세준을 바라보았고 그 순간 세준의 눈이 지영과 마주치자 움직임을 멈췄다.
술기운 때문에 살짝 풀린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이 잠시 서로의 눈을 응시했고 세준이 지영의 시선을 피하며 조금 전 떼어내려던 머리칼을 떼어내자 그 순간 지영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고 세준은 그런 지영의 입술에 시선을 향하던 순간 그 입술에 키스를 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아무래도 술기운이 세준을 그렇게 흔들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런 세준에게 여전히 깔린 자세로 누워있는 지영 또한 술에 취한 모습으로 계속 세준을 올려보고만 있었고 그런 지영의 모습은 세준으로 하여금 자꾸만 이상한 생각을 가지게 했다.
- ......... -
지영의 도톰한 입술을 바라보던 세준이 떨리는 시선으로 다시 지영의 눈을 마주하는 순간 지영은 어째서인지 세준에게 용기를 내라는 듯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허나 그것이 용기를 내라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술에 취해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여전히 술에 취한 시선으로 세준을 바라보는 지영의 모습은 세준에게 무언가 욕심을 내게 만들기에 충분했던 만큼 지영의 술에 취한 시선은 많은 것을 담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세준은 자꾸만 지영의 입술에 시선을 뺏겼고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얼굴을 내리던 세준은 지영의 눈이 감기는 것을 보았고 그 순간 자신도 눈을 감은 채 얼굴을 계속 내려갔다.
- ....... -
마침내 두 사람의 입술이 닿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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