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태로운 사랑 - 14부
본문
누군가에게는 매일 매일의 반복되는 일상이 상당히 지겹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대부분의
보통의 사람들은 반복적인 일상을 모두 지루하게 느끼고 일탈을 느끼고 싶어한다. 누구라도..
하지만 그건 지금의 나..그리고 우리에겐 적용이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녀와 서울을 떠나 외지로
도피해온지 어느덧 3개월이 조금 넘는 시간이 흘렀다. 계절이 지나 어느새 겨울이 가고 봄이 올 때가
다 되어가는 동안 우리의 생활은 거의 하루 하루가 반복되어 흘러갔다.
아침이면 닫혀진 커튼 사이로 빛나는 아침햇살을 느끼며 일어나 창문을 열고 비릿한 바다내음을
맡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방 안에서 식사를 해결하기도 하고, 밖에 나가기도 사 먹기도 하고 그렇게
식사를 해결하고는 항상 그녀와의 바닷가 산책으로 대부분의 하루가 흘러간다. 처음엔 위로 올라가보기도
하고, 밑으로 내려가보기도 했지만 이젠 이 근처의 바닷가는 걸어서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속속들이
다 알고 있었다. 물론 가끔 그녀가 지루해 할때면 다른 곳으로 하루나 이틀쯤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생활을 묵고 있는 여인숙 근처의 바닷가에서 지냈다. 하루종일 산책을 하면서도 그녀는 뭐가
그리 궁금하고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내 옆에서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떠들곤 했다. 그럴때면
어린아이같은 그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직도 묻고 싶은게 그렇게 많어??"
"웅~~ 난 자기 일이라면 뭐든지 다 알고 싶오~ 뭐든지.."
"그래..다 물어봐~ 알고 싶은거 모두.."
어찌하면 그리도 행복할 수 있을지..어찌하면 그리도 반복되는 생활이 하루 하루 새롭기만 한 건지 모를
그런 날들의 반복이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만 그런 날들의 반복..
그리고 어김없이 그녀와 산책을 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그 때, 철민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 어쩐 일이냐?"
"형..나 형 있는 곳에 거의 다 와가.."
"뭐?? 무슨 일 있냐??"
"아니..그냥 얘기나 좀 하자구.."
"그래.."
철민이는 내가 묵고 있는 곳의 위치설명을 들은 뒤 잠시 후 전화가 왔다. 나는 철민이를 잠시 보기
위해 그녀에게 들어가 있으라 했다.
"철민이가 왔다네..잠시 만나고 올께"
"아..그 동생??"
"응~ 여기까지 왔다는데 안 볼 수도 없잖아.."
"무슨 일인지는 모르고??"
"어~ 뭐..별다른 말은 없네.."
"그래~ 알았어 그럼 난 들어가 있을께"
"어..있다봐.."
그녀가 들어간 후 철민이가 내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저 사람이야?"
"어..봤냐?"
"응..얼굴이 좋아 보이네..여기서 많이 행복한가봐?"
"그러냐? 뭐..나쁘지 않아..아니 좋다고 하는게 맞겠지.."
"그렇구나..서울은 난리가 났는데..참..태연하다.."
"그래..그렇겠지..난리가 나는게 당연한 일이지.."
"어쩔 생각이야?"
"뭘.."
"앞으로 말이야.."
"모르겠다..그냥 이렇게 지내는 지금이 좋다.."
"에휴...돈은 어떻게 구하고? 지금 당장이야 쓸만큼 있겠지만..아버지가 형 카드도 정지한 거
알고 있어??"
"아니..뭐..모르는 사실이지만..당연히 그랬겠지.."
"그래...아버지가 실망이 큰 모양이야..유부녀 데리고 도망가 버렸다니.."
"희진이 남편이 찾아왔었냐??"
"어..두 번정도 왔었어..형이랑 그 여자 있는 곳 모르냐고.."
"그래서..가르쳐줬냐?"
"아니..두 번 다 내가 없을 때 왔어..그리고 내가 가르쳐줄 이유도 없잖아.."
"잘했다.."
"도대체 뭘 어쩔 생각이야?? 그 남자..이혼할 생각이 없어 보이던데.."
"알어...희진이 동생한테 얘기 들었어..그러니까 이렇게 도망친거지.."
"도망친다고 해결이 돼?? 이혼하고 당당하게 살던가.."
"방금 니가 니 입으로 얘기했잖냐..그 남자 이혼할 생각이 없어보인다며..바람피운쪽에서 어떻게
이혼하자고 얘기하냐..그 쪽에서 이혼 못해준다고 하면 끝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도망만 다닐꺼야??"
"바보같아 보일 수도 있겠지만..지금 생각은 그렇다.."
"미치겠군..지금 모습 형같지 않아..이렇게 판단이 흐린 모습이라니..."
"사랑에 빠지면 그렇게 되는건가 보다..너는 아직 이런 사랑을 안 해봐서 모를지도.."
"그래~ 형 말대로 내가 아직 어려서 그런 사랑 안해봐서 잘 모르겠지만 너무 답답해 보여.."
"난 좋기만 하다..정말 이렇게 좋았던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계속 그렇게 좋기만 할 꺼 같아?? 현실적인 문제는 생각안해봤어??"
"생각 해봤다..하지만 지금은 그냥 즐기고 싶다.."
"휴...됐다 말을 말자..."
"그래..그런 골치 아픈 얘기는 그만 하자.."
"못살겠군..골치 아픈 얘기라니..지금 형 얘기 하고 있었거든~!!"
"알어..임마..많이 컸네..형 걱정도 하고.."
"컸지 그럼..내가 아직도 어린 애 인줄 아나??"
"알았다 임마..."
철민이는 내가 몹시도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물론 내가 생각해도 가끔 나의 모습은 조금 불안하긴
했다. 언제 이 행복이 깨질지 모르는 불안감..현실적인 문제를 아예 제외하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하지만 정말 지금은 이 순간을 즐기고 싶었다. 모든 현실적인 문제에서 벗어나서..
철민이는 나와 오랜만의 긴 대화를 나누고 서울로 돌아갔다. 그리고 잠시 후 저 멀리서 희진이와
비슷한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희진이가 아니었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모습 수진이였다..
"어라..난 수진이한테는 가르쳐준 적이 없는데..언니를 통해서 들은건가.."
점점 가까이 손을 흔들면서 수진이는 나에게 다가왔다.
"오랜만이네요.."
"그러게..여긴 어떻게 알고 온거야?? 언니가..?"
"아뇨..오빠 동생이요.."
"철민이??!!"
"그 사람 이름이 철민이였나? 하여튼 오빠 동생이 맞다면 맞을꺼에요.."
"녀석..쓸데없는 짓을.."
"너무 뭐라고 하지 마요..내가 왠지 그 사람은 알 거 같아 끈질기게 물은거니.."
"그래...근데 무슨 일로??"
"흠..오빠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엄마가 언니 설득하러 내려왔어요.."
"희진이 어머니가??"
"네.."
"휴...미치겠군.."
"기다려봐요..아직 모든게 끝난건 아니잖아요..도저히 엄마가 앓아 누워있는 모습을 볼 수가
없어서 그랬어요.."
"그래..언젠가 올 일이겠지..형님도 알고 있나??"
"아뇨...아직 형부는 몰라요"
"그래.."
수진이와 그렇게 한참을 대화를 하던 중 수진이에게 전화가 왔다. 곧 전화가 끊기고 수진이가
일어섰다.
"갈께요..이야기가 끝났나 봐요.."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고?"
"네~ 뭐 자세한 얘기는 저도 모르겠네요..금방 끊어서.."
"그래.."
수진이가 가는 모습을 보며 천천히 뒤따라 여인숙으로 향했다. 멀리 여인숙의 입구에서 나오는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의 모습이 천천히 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어머니라고 하기엔 상당히 다르게 생긴 모습..
하지만 어딘가 낯설지 않은 모습이었다. 아니 아주 익숙한 모습...
"어디서 본 사람이지..왜 이렇게 낯설지가 않은걸까?.."
난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기위해 더 과감하게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천천히 그 사람의 모습이
내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그 얼굴이 내 눈에 분명히 들어왔다.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는가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심장은 터질듯이 거칠게 뛰었고, 머릿속은 빙빙 돌았다. 난 아무런 생각없이
더욱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가 서 있는 앞으로..완전히 바로 앞에 가서 서 버렸다.
내 입에선 죽어도 잊지 못할 그 이름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어머니...."
"누구..??..!! 너..너는..!!"
수진이..그녀..그녀의 어머니..나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그 자리에 멍하게 한참을 선 채로 그대로
있었다. 당황하는 그녀와 그녀의 동생, 얼어버린 나와 놀란 듯한 그녀의 어머니..
그리고 믿을 수 없는 현실..그녀의 어머니가 내 어머니라니..내가 저 얼굴을 어떻게 잊겠나..단 한 순간도
잊어본적 없는..평생을 보고 싶었던 얼굴이건만...
눈 앞이 점점 뿌옇게 흐려지고 뜨거운 무언가가 내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머리 속에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모든 사고가
정지가 된 듯 했다.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아니 그녀의 어머니이자 나의 어머니인 그 사람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왔고, 난 어머니를 끌어안았다. 얼마나 보고 싶었던 사람이던가..그 얼마나..
어머니를 안자 가슴이 터질듯 했다. 기쁘고..슬프고..너무도 복잡미묘한 감정들이 밀려왔다. 우린 그렇게
그녀와 그녀의 동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우린 울음을 그치고 모두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 그리고 수진이는 질문들이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아직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무슨 상황인지를 설명해주기를 기다리는 듯 했다. 그리고 한참의 침묵을 깨고
어머니가 말문을 열었다.
"오랜만이구나..세민아.."
"네..그러네요.."
"처음에..희진이와 도망간 사람이 세민이라는 이름이길래 약간 놀랐었다. 너랑 이름이 같아서 말이지.."
"휴..."
"근데 설마 너일줄이야.."
"저도 놀랐어요..아니 어이가 없었어요..희진이 어머니가 제 어머니일줄은.."
"그래..모두가 궁금한 눈치이구나.."
"네..설명해주세요..어떻게 된건지.."
"그래 이렇게 된 거 모두 설명하마.. 일단 철민이 너한테는 많이 미안하구나..너를 그렇게 버리고
떠나왔던게..하지만 너를 데려갈 수 없는 상황이었단다.."
"아뇨..괜찮아요..근데 수진이와 희진이는...?"
"흠..수진이와 희진이는 나의 친딸이 아니란다..나의 첫사랑하던 그 사람의 아이들이지..난 결혼하기 전에
세민이 아버지가 아닌 다른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단다..하지만 어려운 집안형편과 집안의 반대로 결혼을 할 수가
없었지..그래서 결국 선을 봐서, 짧은 연애 후에 철민이 아버지와 결혼을 하게 되었단다..그 사람은 나를 무척이나
아꼈지만, 나의 마음은 희진이 아버지를 생각하고 있었지..그 점은 지금도 세민이 아버지한테 많이 미안하단다..
내가 결혼해서도 마음을 받아주지 않자..세민이 아버지는 자꾸 밖으로 겉돌게 되었고, 나중에는 나에게 폭력을
일삼게 되었지..하지만 나의 마음은 끝내 열리지 않았단다..그리고 결혼한지 5년째 되던 해에..희진이 아버지와
우연히 연락이 닿게 되었지..안 그래도 몸적으로 맘적으로 힘들때인데..그 사람도 아내가 수진이를 낳다가 죽고
힘든 거 같았어..그래서 결국 우린 넘게 되서는 안 될 선을 결국 넘어버리고야 말았어..그리고 세민이 아버지는
자꾸 밖으로만 돌았기 때문에..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지..그리고 세민이 너가 기억하는 그 날..난 결국 참지
못하고..집을 나가 버리게 된거야.."
"그럼..그렇게 해서..지금 희진이아버지와 지금까지 계속 살고 있단 말인가요??"
"그래..미안하다..그 때는 정말 사랑에 눈이 멀었는지..너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흐흑.."
어머니의 긴 얘기를 듣고 내 머릿 속은 멍하게 텅 비어 버렸다. 내가 그토록 원망했던 아버지의 이야기는 내가
생각하던 모습과 전혀 다른 뜻밖의 모습이었고, 그토록 그리던 어머니는 사랑때문에 날 버렸다니...
배신감과 분노..믿을 수 없는 현실에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흐흑..용서할 수 없겠지만 용서해다오..그 땐 정말 어쩔 수 없었어.."
"용...용..용서라구요??!! 하하...용서라..왜..왜..왜!! 왜!!!!!!! 그러셨어요..왜 대체 왜..."
"내가 더는 할 말이 없구나 미안하다...하지만 염치없이 한 마디 하자면..희진이를 놓아다오..그 애까지
너처럼 불행해질 수는 없잖니..그리고 피는 안 섞였지만..남매나 마찬가지 아니니..."
"하하...하하...남매...용서...미안하다...놓아달라...몇 십 년간 그리워한 어머니입니다...그런 어머니가
저에게 처음 하는 부탁이 그런겁니까??...우습네요..정말....아악!!!!!!!"
난 미친듯이 머리를 감싸쥐고 고함을 쳤다. 그토록 보고싶던 어머니가 나타나서 하는 말이 고작 그런 거라닉..
태어나 처음으로 행복해지는건가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 어머니가 나타나서 모든 걸 깨버리다니..
희진이는 나에게 다가와 나를 꼭 끌어안았다.
"흐흑..진정해요..진정해..세민씨..진정해.."
"휴...어머니 모시고 내려가.."
"세민씨..."
"나 괜찮으니까..내려가.."
나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수진이와 희진이는 어머니를 모시고 밖으로 나갔다.
"하......."
계속해서 내 입에서는 헛웃음만이 나왔다. 짜증나는 사실들...지옥같은 현실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아냐...사실이 아니야..사실이 아니라구!!!!!!!!하하...하하핫...하하하하!!!!"
미친 사람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웃어댔다. 하지만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어가고 있었다. 왜 이렇게
한 순간에 내가 불행한 사람이 되어버렸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태어나서 많은 죄를 짓고 살았지만..그 죄들이
이렇게 큰 죄들이란 말인가..이토록 내가 불행해야할 정도로...더는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더 이상은 아무런 의욕도..희망도 없었다..내 눈으로 현실을 확인한 이상...내가 할 수 있는건 아무 일도 없었다.
난 천천히 문을 잠그고 가방을 뒤적거렸다. 혹시나 잠이 안 올까봐 챙겨온 수면제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 온 이후로 단 한 번도 잠을 못 이룬적이 없었기에..전에 먹고 남은 반이나 남은 수면제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모든게 깨끗해질꺼야..모든 고통이 사라지겠지..모든게.."
난 단숨에 수면제들을 입에 모두 틀어넣었다. 그리고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구토가 올라오고, 약들이 목으로
넘어가며 너무나 쓰라렸지만, 그대로 모두..모두 삼켜버렸다. 그리고 침대에 그대로 누워버렸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점점 의식이 흐려졌다. 편안한 수면이 밀려왔다.
"이대로 모든게 끝인건가...모든게...이렇게..."
점점 흐려지는 의식 속에 문이 부서져라 두드리는 소리와 애타는 그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래..살면서 잘한게 단 하나있네...당신을 사랑한거...희진씨..당신을.."
의식이 완벽히 없어지며..꿈을 꾸는 듯 했다. 꿈 속은 온통 희진씨와 함께했던 날들로 가득했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그녀와의 첫 날밤..여행...바닷가..도망와서 짧게 살아온 3개월의 기억들..
그리고 그녀의 환한 웃음이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왔다..
"안녕..안녕..나의 사랑..안녕..영원히 마지막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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