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야설

Goal! - 20부

본문

20부. 그가 넘은 하얀 선.










주의!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팀명, 그리고 모든 일들은 소설로서 가공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ㅋ








‘헤이! 여기!’




전방의 근명이 겨우 틈새를 발견하고는 손을 들자, 남일이 곧바로 패스를 해주었지만, 어느새 다가온 


알무타심이 헤딩으로 길목을 차단했고, 바로 옆에 있던 압델라만은 곧 의미 없이 전방으로 힘껏 공을 차버렸기에


대한민국 팀은 결국 골대를 비우고 한참을 나와있던 골키퍼 성룡에서부터 또다시 공격작업을 시작해야만 했다.




그런 상황이 고작 서너 번 반복됐을 뿐이었을 뿐이었음에도 근명은 슬슬 짜증이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관중석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이상한 피리소리 때문에도 그랬겠지만, 주영과 더불어 수비를 


끌어내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는 있었어도, 도무지 8명이 가득 찬 페널티에어리어에는 전혀 빈틈을 찾아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날고 긴다는 지성이 공간을 창출해 준다 해도 골을 넣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아 보이자, 


경기가 시작되기 전, 라커룸 밖 복도에서의 전화통화를 떠올리며, 근명은 점점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젠장, 난 지금 골이 필요하단 말이야!!!’






-




‘뭐야, 시합하기도 전에 포기하는 거야?’




“누가 그렇대요!!!”




자기도 모르게 목청을 높였다가 주위를 둘러보며 다시금 조심스럽게 핸드폰에 집중하던 근명은 이미 충분히 


몸을 풀고 났는지, 유니폼이 군데군데 땀으로 얼룩져 있었지만, 그런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 보였다. 


그저, 긴장을 풀어줄 누군가와 편안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현실이 기쁘고 또 기뻤을 뿐이었으니까.




“시합 두 눈 똑똑히 뜨고 보란 말 하려고 전화한 거에요.”




‘내 직업이 뭔지 잊었냐? 시합 뛰는 너보다 내가 더 자세히 보고 있을 거다.’




“딴 건 볼 것도 없어요. 그냥 나만 보면, 기사쓰기엔 충분할 테니까.”




‘어쭈? 너무 자신만만한 거 아냐?’




“잊지 않고 있죠?”




‘뭐가?’




“내가 더 많이 넣을 거에요. 영후 선배보단. 두고 보라 구요.”




‘……’




“여보세요? 듣고 있는 거에요?”




‘…… 듣고 있어.’




수화기 건너편의 하연은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나고 있는 노트북 액정화면을 잠시 접으며 애매한 감정을 애써 


추스르고 있었고, 근명 또한 막 첫사랑을 시작하려는 소년처럼 조금은 상기된 얼굴로 벽에 기댄 채 축구화 앞 


코 부분으로 연신 바닥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열심히 해. 지켜볼게.’




지켜볼게… 라고 하연이 말하는 순간, 환호하며 자리에서 몇 미터는 뛰어오르려고 했던 근명은, 그러나 뒤를 


돌아본 순간 영후의 얼굴이 들어오자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뒤로 감추며 종료버튼을 누를 수 밖에 없었다.




“왜… 그래?”




“가… 갑자기 뒤에서 나타나니까… 놀랬잖아요!!”




“아… 미안.”




“됐어요!”




하연과의 달콤한 통화가 다른 사람도 아닌 영후 덕분에 끊겨버렸기에 근명은 괜히 심통을 부리며 사라졌지만, 


영후는 그런 근명의 행동을 왠지 가볍게 넘길 수가 없었다.








-




‘설마…?’




경기가 시작된 이후로 영후는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뜬금없는 경기 전 전화통화와 영후 자신을 보고


놀란 점. 게다가 해외 진출의 가능성이 꽤 높은 점. 그리고…




‘저렇게 밸런스가 엉망일 이유가 없는 데…’




원래 의욕이 넘치는 선수란 건 알고 있었지만, 저렇게 욕심만 앞서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더더욱 걱정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수비수들을 끌어내기는커녕, 그들과 뒤엉킨 채 누군가 밥상만을 차려주길 기다리며 


‘골’ 말고는 동료도 경기의 템포도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마치 일부러 열심히 하는 척하며 


누군가에게 보여주려는 것처럼.




“어떠냐, 오랜만에 실전 경기를 바라보는 기분이?”




꽤나 심각한 표정으로 앉지도 못한 채 경기를 근심스레 바라보던 제자가 조금 걱정스러웠던지 노감독은 


지루한 공격작업만큼이나 덤덤한 목소리로 영후에게 말을 건넸다.




“글쎄요. 조금 답답하네요.”




“’답답하다’라…”




영후의 걱정은 미처 눈치채지 못한 채 경기를 뛰지 못해 답답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노감독은 입꼬리를 올리며


조금은 미소 지을 뻔도 했지만 아직은 마음 편히 웃을 수가 없었다.




‘네놈의 희생, 내 평생 간직하마… 남은 여생이 얼마가 됐든지 말이다.’




노감독의 속마음이 그대로 전해진 건지 어떤 건진 몰라도,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노감독과 눈이 마주친 영후는 


마치 ‘내가 있으니 아무 걱정 말라’는 듯 빙긋 웃어 보였고, 그 웃음에 노감독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




예상과 별다르지 않게 일방적인 공격과 수비가 이루어지며 어느덧 전반 45분이 거의 다 되어 갈즈음, 


좁은 공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영과 감각적인 이대일 패스를 주고 받으며 압달라 디브와 알사이피를 


순간적으로 벗겨낸 근명은 골키퍼와 맞닥뜨리자 마자 강력한 오른발 슈팅을 날렸지만, 슛의 각도가 너무나 


정직했던 탓에 그만 엘라마이레 골키퍼의 가슴팍에 안겨주고 말았다.




“씨발!!!”




완벽한 골이었다고 생각한 근명은 끊임없이 자책하며 자신의 얼굴을 잡는 카메라를 상관하지 않은 채 마구마구


욕을 쏟아내고 있었는데, 정말 욕을 해야 할 상황은 그 뒤에 곧바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전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공격수 하템 아켈과 압델 파타는 엘라마이레 골키퍼가 공을 잡자마자 곧바로 전방을 향해 내달렸고, 골키퍼는 


꽤 정확한 롱 킥을 선보이며 역습을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잡아!”




코칭 스텝의 외침과 동시에 그나마 요르단 공격수들과 비슷하게 후방에 위치하고 있었던 영표와 범석은 황급히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하템 아켈이 공을 몰며 득달같이 달려가는 와중에 영표는 감각적인 태클로 공을 


흘려버렸지만, 운이 없게도 그 공은 압델 파타에게 흘러가버렸기에 잔디밭에 쓰러진 영표는 망연자실한 


표정이었고 부디 범석이 저지해주길 바랄 뿐이었다.




‘막아라 제발!’




영표 뿐만 아니라 전방에 나가있던 선수들과 벤치의 코칭 스텝, 그리고 후보선수들의 마음은 모두 한결 같았다.


하지만 페널티박스에 진입해서야 겨우 압델 파타를 따라잡은 범석은, 그러나 어깨싸움에서 너무나 간단히 


밀려 넘어져버리며 골키퍼 정성룡과 일대 일 상황을 만들어 주고 말았다. 결국 홀로 골문을 지켜내야 할 운명에 처해진 성룡은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며 공격수의 발을 노려보았다.




‘어디냐! 왼쪽? 오른쪽?’




각을 좁히며 앞으로 튀어 나오던 성룡은 압델 파타의 디딤발 형성 과정을 기다리며 방향을 예측하고 있었고 


이내 슛을 하려는 듯 압델 파타의 왼발이 고정되며 오른발로 슈팅을 때리기 직전,




‘왼쪽이다!’




압델 파타의 오른발에서 공이 떠남과 동시에 왼쪽으로 성룡이 몸을 날려봤지만, 성룡의 그런 의도는 이미 


간파했다는 듯, 압델 파타는 오른발 아웃사이드로 공의 왼쪽 부분을 차올려 오른쪽 포스트로 슛을 날렸고 


공은 유유히 대한민국의 골망을 흔들고야 말았다.




0 : 1




순간 암만 스타디움은 관중들의 함성으로 떠나갈 듯 했고, 고작 단 한번의 역습으로 실점을 허용한 대한민국 


선수들은 모두 허망한 얼굴들이었다. 이제 이기고 있는 팀은 요르단이었으니 지금보다 더욱 수비가 두터워 질 


것이었고, 당연히 골을 넣기는 점점 더 어려워 질 것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어쩌면 영후만이 짊어지고 있는 무겁디 무거운 짐이었을지도 몰랐다.




‘저 녀석… 이었나…?’




이윽고 전반 종료를 알리는 휘슬소리가 호주 심판의 입에서 울려퍼지자, 어깨가 축 쳐진 채로 경기장을 빠져 


나오는 선수들이 영후를 스쳐 지나 갔지만, 영후의 눈은 범석에게 고정된 채로 한동안 떨어질 줄을 몰랐다.








-




“아빠? 저런 게 국가대표 맞아!?”




“……”




혜미는 단순히 대한민국이 한 골 실점을 했다는 사실에 씩씩대며 흥분을 한 채 무턱대고 비난을 퍼붓고 


있었지만, 수비수 출신의 규식 또한 그리 간단하게 볼 문제가 아닌 것 같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설마, 일부러…?’




하지만, 무엇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할 수 없었다. 


태극마크를 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인 때가 있었다. 그리고 가슴에 태극마크가 이글거리는 것 이상으로 선수들은


자신들이 가진 백 퍼센트를, 아니 그 이상의 실력을 발휘하곤 했고 또 그래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대표 선수가


짊어져야 할 운명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아빠! 쟤 곯아떨어졌잖아!”




“응? 뭐?”




너무 골똘히 생각에 빠져있었던 규식에게 볼멘소리를 하는 혜미 덕분에 정신을 차려보니, 고작 캔맥주 두 개 


정도에 해롱대며 잠들어있는 남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어쩌긴 뭘 어째? 장에서 이불이라도 꺼내 덮어주지 않구. 감기 걸릴라.”




“아니 생판 모르는 애보고 뭐 하러 축구를 같이 보재? 게다가 안 마신다는 술도 일부러 먹게 하고!”




툴툴거리는 혜미를 바라보던 규식은 갑자기 반달눈을 하며 놀리듯 입을 열었다.




“너 임마, 여태까지 연애 한 번 못해봤지?”




뜬금없는 규식의 돌발질문에 혜미는 잠시 멈칫거렸지만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들어보았다.




“가…갑자기 그 얘기가 여기서 왜 나와? 그리고 내가 안하고 싶어서 안했겠어? 


그게 다 엄마 대신 아빠 챙기느라…”




장난처럼 얘기를 하다가 혜미는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엄마 이야기를 꺼내고 나면, 언제나 무겁게 가라앉는


아빠의 모습을 또다시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조심스레 혜미는 규식을 바라봤지만, 


규식은 심각해지기는커녕 대견스러운 눈으로 혜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왜 그런 눈으로 봐? 징그럽게…”




“이 녀석 말이다. 아빠 맘에 좀 들더라. 자고로 남자는 남자가 판단하는 거다.”




“그… 그래서 뭐? 나보고 얘랑 사귀기라도 하라는 거야 지금?”




“꼭 그러라는 건 아닌데… 어쨌든 괜찮은 놈 같다 이거지 뭐… 보자… 맥주가 다 떨어졌군.”




규식은 맥주 핑계를 대며 골방을 나갔고, 멍하니 남겨진 혜미는 뾰로통한 얼굴로 구석에서 술에 취해 잠든 


남학생을 바라보다 주먹을 쥐어 한대 콕 쥐어 박으려다 말았다.




“아빠가 널 살렸다.”




혜미는 화장실에 가려 일어서다, 아무 상관없는 윤지가 떠올랐다.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자신이 


어떤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면, 그러면 윤지는 뭐라 할까. 아니, 윤지를 두고 자신 혼자만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평소답지 않은 아빠로부터 이상한 소리를 듣게 돼서인지 몰라도 괜히 이상한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지만, 혜미는 이내 세차게 머리를 흔들어 보았다.










-




“뭐 하는 거야 이 새끼야!!!”




라커룸에 들어서자 마자, 근명은 범석의 멱살을 잡고 다짜고짜 벽에 밀어붙였다.




“그러고도 너 같은 새끼가 국가대표 수비수냐? 그 따위로 할거면 당장 때려 쳐!!!”




“이 자식이! 그러는 넌 뭘 잘했는데? 그렇게 죽어라 찔러줬는데도 골 하나 못 넣은 건 누군데!!!”




결국, 범석도 폭발해 근명의 멱살을 잡은 채 일촉즉발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지금 뭣들 하는 겐가!!!!”




근명과 범석, 그리고 다른 모든 선수들의 시선은 순간 모두 노감독에게로 쏠렸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제나 


조용조용한 분이기만 했었던 노감독의 엄청난 일갈에 다들 놀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경기가 끝났나? 그게 아니면, 대한민국에서 난다 긴다 하던 네놈들의 한계는 고작 여기까지였던 게냐!!!”




그제야, 근명과 범석은 눈을 부라리면서도 어쩔 수 없이 떨어졌고, 이내 범석은 라커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뿐만아니라 다른 선수들 또한 몸만 라커룸에 남아있었을 뿐이지 마음은 이 귀찮은 A매치를 끝내고 팀으로의 


복귀를 꿈꾸고 있었기에 노감독은 그런 선수들의 속내를 어렵지 않게 읽어내고는 잠시 한숨을 내 쉬더니 다시금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가슴팍에 태극마크 한번 달아보는 걸 평생의 목표로 삼는 미련한 놈도 있다는 


얘길 하고 싶구나.”




하지만, 당장 이런 이야기가 선수들에게 먹힐 리 만무했기에, 노감독은 경기장에서 직접 몸으로 보여줄 단 한 


명의 남자를 가장 먼저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미안하구나, 영후야.’










-






“범석아.”




라커룸을 뛰쳐나오던 범석은 복도에 기대 서 있던 영후가 부르는 소리에 멈춰 섰다.




“실점에 관한 이야기라면,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요.”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바라는 눈빛이라는 걸, 


영후는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때문에 영후는 들고 있던 음료병을 흔들어보였다.




“자, 마셔.”




짧은 10분을 이렇게 허비하고 나면 후반전엔 더욱 힘들어 질 것이었기에, 영후는 이온음료와 물을 일정비율로 


희석한 물을 건넸고, 가뜩이나 목이 타 들어가는 것 같았던 범석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물병을 받아 들었고,


꽤나 달게 물을 들이키고 난 후 이내 영후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괜찮다면,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머리를 드는 것도 지쳐 보이던 범석은 그러나 말없이 고개를 들어 영후를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눈동자. 


영후는 몇 번이고 망설이고 있었다. 자신의 생각이 맞다 면? 혹은 틀리다 면? 결과가 어찌되든 자신이 어찌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이 유망한 선수가 그런 문제로 괴로워하고 있다면, 어떻게든 그 짐을


덜어주고 싶어졌을 뿐이었다.




“난 네가 대한민국 최고의 오른쪽 윙백이라고 생각하는데, 넌 어때?”




‘최고의 윙백!’




‘최고’라는 수식어에 자신도 모르게 온몸에 부르르 전율이 일었지만, 차마 영후의 눈을 마주하지 못한 채 범석은


고개를 떨궜고, 영후는 그 남자의 어깨를 따뜻하게 다독여 주며, 그의 옆에 털썩 앉았다.




“자신의 꿈은 그 누구의 힘을 빌려 이룰 순 없는 거야. 그러니”




‘누구’라는 단어에 꿈틀하는 범석의 손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던 영후였지만, 그 손을 자신의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주며 말을 이었다.




“후반엔 네 녀석 최고의 플레이를 보여줘라.”




참으로 간단한 이야기였지만, 어쩐지 영후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범석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한 것 같아 


보였고, 운동장으로 나가려는 영후를 붙잡으며 범석이 입을 열었다.




“잠깐… 제 이야기… 들어줄 수 있어요…?”




너무나 간절해 보이는 범석의 눈빛에 영후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여주었고, 잠시 후 범석은 고개를 떨군 채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




“윤아 네가 복덩이는 복덩인가 보다. 이런 물주들도 잘 물어오고 호호!”




윤지의 예명을 부르며 희희낙락 하는 마담 언니의 이야기 덕분에 윤지는 겨우 잊고 있었던 축구 경기가 떠올랐


다. 요르단과의 경기는 분명히 영후에게 ‘덫’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윤지의 마음은 가시방석 같았다.


그리고 사실은 경기를 마치고 실망할 선수들이, 아니 조금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이영후가 걱정되고 있었던 것이


다. 조전무의 마수가 분명히 실제 경기에도 뻗쳐있을 것이 너무나 자명한 일이었기에 윤지는 지금 이렇게 쉬는


날 임에도 요정에 나와 일을 하며 애써 텔레비전 중계를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젊고 힘 좋은 것들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좋아 죽겠는데, 전무님께서 돈까지 두둑하게 챙겨주신다니 


얼마나 좋으니?”




‘미친년.’




윤지는 속으로나마 마담언니를 비웃고 있었지만, 사실은 자신도 별반 그녀와 다를 것이 없었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녀보다 훨씬 더 돈이 필요한 건 다름아닌 윤지였으니까.




‘아빠 엄마를 찾으려면, 그래서 셋이서 행복하게 살려면… 어쩔 수 없잖아…’




돈을 위해서 악마 같은 조전무와 손을 잡을 수 밖에 없었던 윤지는 며칠 전 가게를 찾아온 조전무를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










-




“어머, 전무님! 그러니까 우리 애들 전부랑 축구 대표팀 선수들 전부랑요? 정말이세요?”




룸에서 조전무의 팔짱을 낀 채 딸기를 포크로 찍어 입에 넣어주며 마담이 물었고, 조전무는 입에 들어온 딸기를 


우걱우걱 씹으며 조금은 쳐졌지만 충분히 풍만한 마담의 가슴을 주물러대며 호기롭게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빈말하는 거 봤나? 힘든 경기 하고 돌아온 선수들에게 기운도 북돋아 줄 겸, 서울로 돌아오면 호텔에


가서 밤새 다독거려 주라고.”




“근데, 서울로 와도 경기가 또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있지, 그러니까 더더욱 자네들이 필요하다는 거 아닌가? 피로를 제대로 풀려면 합방만큼 좋은 게 또 있겠나? 


그러니 밤새 즐기게 해 주라고 흐흐흐!”




“암요 암요! 호호호!”




장죽이 맞은 두 사람의 맞은편에서 조전무의 술잔에 술을 따라 주면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윤지는 조전무의 


끝없는 계획에 치를 떨었지만, 결코 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전무의 바람대로 선수들이 이곳의 여자들과 


경기 전날 밤 섹스를 나누게 된다면 그 다음날의 경기력은 불을 보듯 뻔할 것이었다.




‘감독님…’










-




이야기를 마친 범석이 화장실로 가버린 후에도 한동안 영후는 멍하니 복도에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도대체 뭣 때문에? 왜?’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국의 팀 승리를 위해 심판의 매수는 못할망정, 팀의 패배를 위해 저 어린


선수의 미래를 가지고 장난질을 치다니. 결국 축구는 여전히 정치의 더러운 수렁에서 한발자국도 빠져 나오지 


못한 채 허우적 거리고 있던 것이었다. 노감독의 젊은 시절에도 그랬듯.




하지만 그나마 다행이었다. 범석의 말에 의하면 조전무와의 자리에서 범석은 확답을 주지는 않았다고 하니, 


후반전엔 조금은 부담감을 털어버린 채 경기에 임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여전히 영후는 불안함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과연 조전무에게 범석이 만으로 충분했을까?’




“뭘 그렇게 멍하니 서있는 게냐?”




생각에 잠겨있던 영후에게 꽤나 퉁명스런 노감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벌써 선수들은 


하나 둘 경기장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예? 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라고는 했지만, 그 순간에도 영후는 끊임없이 고민을 했다. 조전무와 범석의 일을 노감독에게 


이야기를 할 것인가에 대한. 만일 자신이 입을 다물고 있다면, 이 경기가 끝날 때까지 노감독은 자신도 모르게 


언제 터져도 터질 시한폭탄을 지니고 있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노감독은 당연히 범석을 교체해 버릴 것이었다. 경기를 책임져야 하는 


노감독과 한 젊은 선수의 미래가 걸린 갈림길에서 영후는 여전히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어쩐다…’




“놈! 이렇게 넋을 놓고 있으면 어쩌자는 게야?”




“?”




“경기장에 나가있는 놈들처럼, 하프타임에 충실히 몸을 풀어놨어야지!”




“아…!”




“후반에 바로 투입하기는 글렀구먼, 쯧!”




이내 혀를 차며 뒷짐을 진 채 경기장으로 걸어나가는 노감독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영후는 갑자기 빨라지는 


심장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실타래처럼 묶여있는 범석과 노감독의 문제를 적어도 자신이 피치에 들어서는 


순간 어떻게든 해결해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절로 웃음이 지어지는 것도 같았다. 










-




이윽고 후반전이 시작됐지만, 경기 양상은 크게 바뀐 것이 없었다. 여전히 무의미한 크로스 남발에 중거리 슛은


번번히 밀집수비에 막히기 일쑤였고, 요르단은 아예 공격의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었기에 참으로 지루한 상황이


남은 시간을 좀먹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경기장 밖의 분위기는 아주 묘하게 흐르고 있었다. 대한민국 벤치에 있던 한 선수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터치라인 밖에서 몸을 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먼저 대한민국에서 교체카드를 빼 들 것 같군요?”




“네, 지금 이영후 선수가 몸을 풀고 있죠?”




“그런데… 웃고 있는 거 같은데요. 저 웃음의 의미는 뭘까요?”




“아마도 공격수로서의 자신감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은데요.”




“이영후 선수 부디 자신감에 그치지 말고, 대한민국 팀의 골 가뭄에 단비를 내려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 바로 교체 하는 군요? 누가 교체 되어 나올까요?”




“김남일 선수가 교체될 것 같죠? 알려진 바에 의하면 몸 상태가 그리 좋지도 않았는데 자원했다고 하는데요. 


열심히 뛰어 줬어요.”




“이영후 선수가 트레이닝 복을 벗고 있습니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붉은 태극 유니폼을 입은 이영후 선수가 


교체라인에 들어섭니다.”










-




“나온다!!!”




수림은, 갑자기 썰렁했던 자신의 방이 - 비록 텔레비전 속이었지만 - 그 남자의 등장만으로도 그때 그 꿈같은 


날들 처럼 따뜻해지고 꽉 차는 기분이 드는 것을 가슴으로 느끼고 있었고,




‘감독님…’




남희 또한, 텔레비전을 지켜보며 한국여대 축구팀에 접목시킬 수 있을만한 작전 구상과 포지션 이동, 그리고 


시간대별 체력적 소비에 관한 통계 자료를 작성하다가 멍하니 화면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왔다! 나왔어!!!”




혜미와 규식은 누가 활달한 부녀 아니랄 까봐 구석에서 잠들어 있는 남학생이 깨던 말던 방안에서 방방 뛰며 


난리 법석을 피워대고 있었으며




‘영후야…’




경기를 보며, 기사 작성에 여념이 없던 하연마저 괜시리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보육원의 원장과 아이들도, 한국여대의 총장 및 선수들과 그 선수들의 추종자들도, 마지막으로 


철용과 수많은 에이전트들도, 비록 뿔뿔이 흩어진 채로 장소는 제 각각인 채로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이구동성으로 외치고 있었다. 




이영후, 그가 돌아왔다고.




다만, 윤지만이 ‘지금쯤 후반전이 시작됐겠지’ 라는 체념과 함께, 길고 긴 새벽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기도하면서


이름 모를 남자의 몸 위에서 의미 없는 교성을 내질러가며 허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




‘이것만 넘으면…’




영후는 터치라인 바깥에서 남일을 기다리며 서 있는 동안, 잠시 하연 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선을 넘으면 


자신은 선수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었다. 그것도 그냥 선수가 아닌, 그토록 염원해 마지않던 ‘국.가.대.표.’ 선수로.


그리고 저기, 자신을 이 선의 안쪽으로 이끌어 줄 교체 선수가 한시가 아깝다는 듯 뛰어나오고 있었고, 이내 


영후를 끌어안으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부탁한다.”




영후는 대답대신 남일에게 빙긋 웃어주었고, 그 미소를 읽은 남일은 너털웃음을 짓더니 코칭 스텝에게 받은 


타월을 어깨에 두르며 벤치에 앉았다. 




“수고 많았다.”




훈련 전부터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은 남일이었건만, 허리 라인에 있어서 달리 대체할 자원이 부족했던 터라 


노감독의 고심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을 때, 남일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출전하겠다는 의사표시를 해왔었다.


그것만으로도 고마웠는데, 일분 일초를 사력을 다해 플레이 해준 것으로도 노감독은 남일이 고맙고 또 고마웠다. 그랬기에, 평소에 않던 인사를 건넸던 것이었고. 그래서였을까? 남일은 꽤나 평소답지 않게 감정을 드러내고 


있는 노감독에게 슬쩍 질문을 건네보았다.




“감독님. 근데, 영후에겐 뭐 따로 지시하신 게 있습니까?”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고 했다.”




“네?!”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노감독과 반대로 남일은 한동안 벌린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노감독과 영후의 


사제관계가 돈독하다고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 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남일이었던 것이다.




‘국가대표팀에서, 그것도 프리롤이라…’




하지만, 영후의 미소도 그렇고,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는 노감독을 보니 남일은, 


후반전은 생각보다 재밌게 흘러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




운동장을 가로질러 달려오는 영후의 모습을 보자, 그제야 근명은 정신이 번쩍 드는 듯 했다. 하연에게는 


큰소리를 뻥뻥 쳐두긴 했었지만, 솔직히 영후의 플레이를 본 이후로 영후보다 골을 많이 넣을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파주NFC에서의 연습경기 이후로 언제나 꾸던 꿈 속에서조차 영후보다 많이 골을 넣는 꿈같은 것은 


한번도 꿔본 적이 없을 정도로 압박감이 상당했었던 것이다. 그나마 영후가 상대팀 선수가 아니라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을 까. 하지만 이런 속마음을 내색하지 않는 것 또한 남자의 자존심이라고 생각한 근명은 


꽤나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그때처럼 쓰러지지나 마쇼.”




“그때? 아…”




그제야 영후도 그때의 연습경기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이내 아군과 적군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페널티에어리어를 벗어나 하프라인과 페널티에어리어 사이 공간으로 유유히 자리를 옮겼다.




“지금 뭐 하는 거에요?”




“골 넣으러~”




“골대는 이쪽이라구요! 이쪽!”




꽥 소리를 질러대는 근명을 뒤로 하고 잔디밭에 놀러 나온 소년처럼 너무나 즐겁게 뛰어가는 영후의 모습은 


근명 뿐만 아니라 요르단 선수들까지 어깨를 으쓱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영표의 드로잉으로부터 


다시금 경기가 속개되자 영후의 움직임은 순식간에 180도 변하기 시작했다.




“원희!”




영표로부터 공을 받은 원희에게 영후가 사인을 보내자 원희는 영후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영후가 자리잡고 


있던 곳은 참으로 이상한 공간이었다. 요르단 선수로부터 완전히 떨어진 곳도 아니고, 그렇다고 밀착되어있는 


곳도 아닌. 패스를 보내게 되면 요르단 선수가 마음먹기에 따라서 충분히 패싱 루트를 차단당할 수도 있는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칫 커트 당할 수도 있는데…’




하지만, 연신 사인을 보내는 영후에게 결국 원희는 패스를 조금은 빠른 속도로 보냈고, 아니나 다를까 충분히 


뺏을 수 있다고 생각한 알 사이피가 득달같이 달려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못살아, 그러길래… 어?’




패스를 하자마자 판단미스라고 생각한 원희가 다시금 알 사이피가 달려가는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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