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야설

감기 - 1부 1장

본문

안녕하세요. 이곳에 처음으로 글을 올리는 아로미입니다.




원래 이 글은 야문에서 한번 발표되었던 글입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별로 야하지 않다는 이유로, 


몇 분에게 욕설이 담긴 쪽지와 리플을 받은 후 글을 모두 지우고 


야문을 탈퇴하게 만들었던 글이기도 합니다. 




당시 야문에서 5편의 일반 소설과 한 편의 무협 소설을 올렸었는데.. 


제가 돈을 받고 글을 올리는 것도 아니고, 


제 개인 시간을 쪼게어 취미처럼 쓰는 글을 함께 보고자 올린 글임에도 불구하고,


단지 야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악의적인 쪽지와 리플을 남겨주시는 것은 


제가 소심해서 그런지 몰라도 참을 수 없더군요.




이미 결말이 난 글이지만, 


야문에 올렸던 글과는 결말이 다르게 현재 수정중에 있습니다. 


야문에서 읽으셨던 분이 계신다면, 전혀 다른 결말의 맛을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에서는 이 소설이 과연 어떤 평과를 받을 수 있을지 조심스럽게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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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 - 01




그날도 감기에 심하게 걸렸던 나는 차를 두고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하고 있었다. 오래전


감기에 걸렸을 때 운전을 하다가 큰 사고가 날 뻔했던 적이 있던 나로썬, 몸이 아플 때는 


차를 두고 다니는 것이 당연한 일과처럼 되어 버린지 오래다. 이 지독한 감기는 얼마나 오


랫동안 날 괴롭히다가 떨어져 나갈까. 흔하디 흔한 감기라는 가벼운 이름으로 부르기에는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의 무게는 그 무엇보다 무겁고 어두웠다.




사람들이 가득 찬 출근길, 지하철을 타자 머리가 어지러워 졌다. 마치 잠에서 깬지 얼마 


되지 않는 듯한 몽롱한 기운. 그리고 전철의 흔들림에 따라 내 머리도 함께 울리는 듯한 느


낌은 어지러운 머릿속을 깊고 깊은 심연속으로 가라앉게 만드는 것 같았다. 애써 아침에 


먹은 약기운 때문이라고 속으로 되내이며 어서 빨리 회사앞 역에 도착하기만을 바랄 뿐이


었다. 신선한 공기를 어서 빨리 마시고 싶었다. 폐속 깊은 곳까지 가득찬 이 더러운 공기를 


모두 쏟아 버리고 싶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내뱉은 이 탁한 공기를 마시고 있자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몸속을 휘감고 


돌아다녔다. 차갑고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다면, 조금이라도 좋으련만. 이런 생각을 하


며 마지막 객차의 구석 벽에 머리를 박고 어지러운 기운을 가까스로 누르고 있었다. 주머


니에서 깨끗하게 다려진 손수건을 꺼내 입과 코를 막고, 손수건에 살짝 뿌려진 향수 냄새


를 맡으니 토할 것 같은 기분이 조금 가시는 것 처럼 느껴졌다. 그때였다. 누군가 내 옆으


로 오기 위해 사람들을 밀며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 




지하철의 마지막 객차. 딱히 환승하기 편한 곳은 아니지만, 한쪽 벽에 편하게 기댈 수 있


다는 장점때문에 지하철을 이용할 때 마다 종종 이용하는 자리였었다. 누가 날 알고 다가


오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모든 게 귀찮고 짜증나기만 했다. 앞으로 30분. 30분만 더 기다


리면 이 지옥같은 지하에서 벗어나 깨끗한 공기가 가득찬 지상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과장님!"




회사 사람이었나? 하는 생각, 그 보다 반갑다기 보단 귀찮다는 느낌. 이렇게 망가져 있는 


상황에서 회사의 누군가에게 내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 결코 달갑지가 않았다. 다음 역에서 


내려 버릴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도 역시 귀찮았다. 감고 있던 눈을 억지로 떴다. 무


수히 많은 사람들 틈에 누군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이 반쯤 감겨진 눈꺼풀 너머


로 보였다. 이름이 뭐 였더라.. 




"윤진희씨? 으음.." 




토할 것 같은 기분을 가까스로 누르고 인사를 했건만, 이 여자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내 얼


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한다. 인사 받아줬으니 이만 사라져 주면 좋겠는데..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였다. 




"과장님. 저 홍윤희인데요. 어떻게 매번 틀리시네요. "


"미안.. 사과는 나중에 다시 할께.."




어차피 난 직원들의 이름을 잘 외우지 못한다. 특히, 결혼하면 그만 두기 일쑤인 여직원의 


이름을 외운다는 것은 시간 아깝다는 생각마저 가지게 한다. 그런 이유로 난, 애써 이름을 


외어야 하는 필요성을 못 느껴 평소에 여직원의 이름을 내 마음대로 바꿔 부르기 일쑤였다. 




윤진희인던, 홍윤희이던 신경쓰기 귀찮았다. 지금 내게 유일한 관심사는 이 탁한 공기속


에서 맑고 시원한 공기를 어떻게든 공급받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 뿐이었다. 고개를 다시 


돌려 객차의 벽에 머리를 박고 손수건으로 얼굴을 감싸기 시작했다. 전동차의 바퀴가 레


일 위를 굴러가는 것이 두개골을 통해서 그대로 전해져 온다.




"쿵 쿠쿵.. 쿵 쿠쿵.. "




한동안 그 울림에 온 몸을 맡기고 있는데 내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 지는 것이 느껴졌다. 


가뜩이나 어지러운데 이게 무슨 짓인지. 화를 낼려고 고개를 돌려보니 안쓰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내 입안에 멤돌고 있는 말을 뱃속깊이 삼켜버리게 만들었다. 




"나 어지럽거든. 그러니 제발 귀찮게 하지 말아줘.."




기운이 없는 내 몸을 감싸고 한쪽 벽 구석에 몰아 넣은 그녀는 내 귀에 대고 나지막히 속


삭였다. 




"과장님, 너무 힘들어 보여요. 잠시만 저한테 기대고 계세요. 편하실 거예요." 




여직원들은 새벽에 일어나서 화장을 하고 옷을 갈아 입는다고 했던가. 그녀의 몸에서 풍


겨져 오는 화장품 냄새와 묘한 체향이 내 코를 자극하고, 손수건으로 겨우 막고 있던 토할 


것 같은 기분이 조금씩 가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금 더 맡아 보고 싶었다. 탁하고 더


러운 공기가 가득한 이 지하철 안에서 유일한 생명수 같은 맑은 공기가 나는 그녀의 몸에 


얼굴을 묻고 좀 더 느껴보고 싶었다. 




"화내서 미안해. 부탁할께."


"아니예요. 제가 아파도 그럴 건데요. " 




그러면서 내 몸을 자신의 몸으로 막아주는 그녀. 그리고 난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그


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진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귀찮기만 했던 그녀가 


이제는 쓰러질 것 같은 내 몸을 지탱해 주는 생명줄 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내 


코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겁고 거친 숨이 그녀의 목과 어깨를 타고 그녀의 살짝 열려진 블


라우스 안으로 스며들어가고, 어지러운 기운에 쓰러질 것 같은 날 붙잡고 있는 그녀의 손


은 내 허리를 쓰다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언제부터 였을까? 그녀와 나의 자세가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이. 딱히 달라진 것이 없으면


서도 우리는 조금 전과 같은 심정이 아니라는 것을 서로가 느끼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그녀의 몸의 긴장감. 그리고 안길듯이 그녀를 안고 있는 내 자세는 결코 아픈 환자를 부축


하는 여직원과 직장 상사의 모습이 아니었다. 딱히 어디라고 말을 하기는 그렇지만, 무언


가 달라진 미묘함. 더 이상 이런 모습은 곤란하다는 생각으로 간신히 힘을 내서 그녀의 몸


에서 떨어질려고 했지만, 내 허리를 붙잡고 있는 그녀의 완력은 날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


았다. 




"곧 내려야 해."


"제가 부축해 드릴께요. 기대고 계세요."


"혼자 갈 수 있어. 챙겨줘서 고마워"


"아니예요. 어차피 같이 출근하면 되니까...."




몸이 아파도 남자는 남자라는 것인지. 어지럽고 토할 것 같은데 여인의 향기를 맡은 내 아


랫도리는 부풀어 올라 지퍼를 열고 튀어나올 것처럼 커져 있었다. 내려야 할 역이 다가오


고, 안내 방송이 객차 안에 울리기 시작하자 사람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안


으로 들어갈려는 사람들과 문앞으로 다가설려는 사람들의 흐름속에서 무언가 내 아랫도


리를 살짝 쥐었다가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윤희씨... "




처음으로 불렀던 것 같다. 그녀의 이름을 똑바로 부른 것이. 사람들에 섞여 문이 열리기만


을 기다리는 그 순간이 길게 느껴지고, 지하철에서 내려 함께 걸어가고 있는데 그녀가 나


에게 웃으며 말을 했다. 




"과장님, 제 이름도 모르시더니... 훗훗" 




회사에 출근해서 한동안 정신이 없었다. 아침부터 준비되어 있는 미팅을 끝내고 겨우 한


숨을 쉬고 있을 무렵, 이번 프로젝트에 대해 기획보고를 준비하라는 부장의 전화 한 통에 


맑은 공기로 좋아졌다고 생각했던 머리가 다시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그 놈


의 보고는 매일 해줘도 알아 듣지도 못 하면서 뭘 그리 듣는 것을 좋아하는지. 배 나온 늙은 


것들은 보고를 많이 들으면 들을 수록 업무성과가 좋아진다는 멍청한 편견이 있는 것 같


았다. 속으로는 욕을 하면서도 손은 어느세 파일을 꺼내 준비하는 셀러리맨의 비애. 한숨


이 저절로 입밖으로 세어 나온다. 




"후우... "




그렇게 한숨을 푹푹 쉬며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는데 파티션 너머로 누군가 다가오는 것


이 느껴진다. 모든 것이 귀찮았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담아 나지막히 말을 던졌다. 




"중요한 것이 아니면 오후에..."


"과장님 이거 드세요. 몸도 안 좋으신데..."




아침에 날 부축해 줬던 홍윤희였다. 그녀가 내밀어 주는 유자 향기가 가득한 종이컵 하나. 


아침에 출근해서 탕비실에서 유자차를 찾았을 때 없었는데.. 설마 날 위해 사온 건 아니겠


지 하는 생각에 예의상 감사 멘트를 날려주었다. 




"아침에 유자차가 그렇게 마시고 싶었는데.. 탕비실에 안 보이더라구. 고마워. 윤희씨."


"과장님 아프시면 꼭 유자차 드시잖아요. 없어서 제가 사왔어요. 헤헤"




밝은 웃음을 흘리며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그녀. 내가 감기 걸릴 때 마다 유자차를 마셨던


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편으론 그녀가 왜 그걸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궁금


증도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웃긴 생각이 들어 유자차를 마시며 실없이 웃고 말았다. 




"유자차 한 잔 받고 착각한다면... 큭큭 "




이 회사에 몸 담은지 몇 해가 흐르게 되자 대충 간부들의 특징을 하나 둘씩 꽤뚫기 시작했


다. 특히 부장이 좋아하는 것은 일시키고 난 후에 중간보고 받는 것을 어찌나 좋아하는지. 


프로젝트 시작할 때 부터 그것에 대해 미리 준비를 하고 있던 나는, 몇 개의 파일 중에 대


충 아무 거나 골라서 부장에게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 배 나온 늙은이 감동시키는 것은 


일도 아니니까 말이다.




감기 기운에 예정에도 없던 보고까지 마치고 자리에 돌아오자 어느덧 점심이었다. 하나 


둘씩 자리에서 일어나서 점심을 먹기 위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난 어릴 적부터 몸이 아프


면 밥을 먹지 않았다. 아플 땐 그저 뜨끈한 방안에 배를 깔고 누워있는 게 최고라고 생각하


기에, 직원들이 점심먹으러 가자고 말을 해도 생각없다고 말을 했다. 




"어서 내려가서 점심들 들어. 난 생각없으니까." 




모두가 내려가고 빈 사무실. 잠시 창밖으로 뿌연 회색빛 거리를 보고 있자 아침에 마셨던 


향긋한 유자차가 간절해졌다. 탕비실에 사 놓았을려나 하는 생각으로 들어갔지만, 유자차


는 보이지 않았다. 그것만 사놓았을 리는 없을 건데. 꿩대신 닭이라고 구석에 놓여져 있는 


녹차티백을 꺼내 우려낸 뒤 내 자리에서 홀짝 거리며 앉아있었다. 




정신없는 오전을 보내서 그런지 잠이 쏟아졌다. 벗어 놓은 양복 상의를 덮고 책상에 엎드


려 잠을 청하고 있는데, 얼마나 잠을 잤을까. 한참 기분 좋은 때였는데 누군가 내 등을 흔


드는 것이 느껴졌다. 벌써 업무 시간인가 하는 생각에 기지개를 펴며 애써 잠을 쫒아내기 


시작했다. 




"어? 윤희씨? "




또 그녀였다. 뭐 어차피 같은 부서 사람이니 매일 부딪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 


사람 오늘따라 날 너무 귀찮게 만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얼굴에 침이라도 묻었을까 하


는 생각에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문지르며 그녀에게 물었다.




"윤희씨, 무슨 일이라도?"


"아뇨, 과장님 아프셔서 식사도 못하셨을 건데.. 죽 사왔어요."


"죽? 괜찮아. 마음만 고맙게 받을께. "


"그러면 안 되는데.. 뭐라도 먹고 약을 먹어야 감기가 빨리 떨어지죠. 어서 일어나세요."




가녀린 몸의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184cm가 넘는 내 몸을 벌떡 일으켜 탕비실로 


억지로 끌고가는 그녀. 그녀가 떠주는 플라스틱 수저에 가득 담긴 죽을 보니 어릴적 생각


이 떠올랐다. 어릴적에도 감기만 걸리면 아무 것도 먹지 않는 날 위해 어머니가 죽을 떠서 


입에 물려주셨는데. 그 기억때문이었을까. 지금 이 상황이 묘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러


고 보니 오늘 따라 그녀의 두 다리를 감싸고 있는 스타킹이 유난히 매끄럽게 보였다. 저 정


도 광택이 나는 펄 샤이닝 스타킹은 비싼 건데 라는 생각도 함께. 




"윤희씨. 내가 먹을 수 있는데.. 이제 내가 먹을께. 고마워."


"아니예요.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요. 아~ 하세요. "




알뜰하게 바닥에 남아 있는 죽까지 싹싹 긁어 내 입에 넣어주는 그녀. 그리고 그걸 받아먹


는 나. 입에 떠주는 죽을 넙죽 넙죽 받아 먹는 내 모습을 다른 직원들이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하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항상 불안한 기분이 들 때면 조심하라고 누가 그랬던가. 


탕비실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어머, 과장님. 홍대리? 호오~.. 수고하세요. 호호 "




뭘 수고하라는 건지. 이 상황이 기가 막힌 난 제대로 대응도 못하고 뻘쭘한 자세로 앉아있


고, 묘한 상황이 들킨 그녀는 별로 부끄러운 것도 없는지 다 먹은 죽 그릇을 정리한 후 따


뜻한 물이 담긴 잔을 내게 가져다 주었다. 이 상황에서도 물의 온도를 생각하는 그녀라니.. 


왠지 그녀는 아이를 키우면 아주 잘 키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릴적 엄마처럼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하는 그런 모습이 저절로 그려진다고 할까. 잠깐 동안의 엉뚱한 생각을 


접고 이 상황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조금전 김대리에게 우리의 모습이 어떻게 보였든, 선


의의 배려를 해 준 그녀가 나 때문에 피해를 보게 할 수는 없으니까. 




"김대리에게는 내가 오해없도록 말을 할께. 걱정하지 마. 그리고 챙겨줘서 고맙구."


"그런 건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거 신경쓰면 어떻게 회사 다녀요. 후후 "




여자가 보는 직장생활과 남자가 느끼는 직장생활에는 차이가 있는 것인가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적당히 선을 긋고 그 안에서 생활할려는 나와는 사뭇 다른 행동. 한동안 이런 생각


을 하고 있다가 그녀가 보는 앞에서 약을 먹고 자리로 돌아왔다. 벌써 대부분의 직원이 돌


아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 책임자인 내가 나태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조금전 먹었던 약 때문인지 눈꺼풀은 천근의 무게처럼 내리 누르기 시작하고, 한동안 울


리지 않았던 어지러움도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혈관의 파동


이 그대로 느껴지는 듯한 멍한 기분. 어차피 파티션 넘어로 내가 자는 모습은 보이지 않을 


테지 라는 생각이 들어 잠시 눈을 붙여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사내 메신져를 열어 그녀에


게 쪽지를 보냈다. 




[윤희씨. 오늘 챙겨줘서 정말 고마워.]


[아니예요. 별로 한 것도 없는 걸요. *^^*] 


[나 귀찮은 부탁이 하나 있는데..]


[말씀하세요. 과장님이 처음으로 하는 부탁이 뭘까나..^^]


[부장님이 오면, 내 전화로 전화 좀 해줘. 나 잠시 눈 좀 붙일께.]


[ㅋㅋㅋ 걱정마세요. 안심하시고 푹 주무세요.]


[그럼 윤희씨 믿고 잘께]




잠시만 잔다고 생각하고 눈을 붙였는데, 어느세 푹 자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몇 번 잠에서 


깨어난 기억이 나지만, 전화가 울리지 않은 것은 부장님이 내려오지 않았다는 말. 몸도 안


좋은데 오늘은 푹 쉬고 내일부터 열심히 일을 하자는 생각으로 잠에 빠졌다가 깨기를 몇


번 반복을 하자 어슴프레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집에 가기 전에 


내일 할 건 챙겨놓고 퇴근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기지개를 펴고 모니터를 켤려는데 전화가 


울렸다. 부장님이 내려왔나 하는 놀란 마음에 사무실 입구를 살펴보니 아무도 없었다. 그


러고 보니 난 잠에서 깨어 난 상태가 아닌가. 감기에 걸리면 멍청해지는 내 자신을 탓하며, 


잠에서 깬 목소리를 잠깐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예, 디자인지원팀 선우영입니다."


"과장님, 메신져..."




속삭이듯 나지막히 용건만 말한 후 재빨리 끊는 전화.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라고 생각


할 필요도 없었다. 오늘 하루종일 내 주위를 아른 거린 그녀. 아직도 채 가시지 않은 어지


러움증에 머리를 한 손으로 짚으며 모니터를 켜고 바라보니 창 구석에 깜빡이는 것이 보


였다. 




[과장님, 몸은 좀 괜찮으세요?]


[윤희씨 덕분에 푹 쉰 것 같아. 고마워.]


[그럼 저녁 사주세요.^^;; ]


[오늘은 내 몸이 안좋아서.. 다음에 내가 맛있는 거 사줄께. ]


[흐음.. 오늘 꼭 먹고 싶은데.. 과장님에게 드릴 말씀도 있고..]




그때 또 한 개의 창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또 뭐야 하는 심정으로 열어 보았더니 탕


비실에서 그녀와 내 모습을 지켜보았던 김대리였다. 이름은 기억이 안나지만, 작년 프로


젝트 때문에 야근을 매일 같이 반복했던 한창 바쁘던 때에 결혼 휴가를 길게 받아간 그녀. 


덕분에 부서 일이 무척 고단했던 기억이 난다. 




[과장님, 푹 주무시더니 몸은 좀 어떠세요?]


[김대리가 나 자는 거 지켜줘서 덕분에 잘 잤어. -_-;; ]


[내가 지켜줬나요. ㅋㅋ ]


[사적인 대화는 업무후에 하는게 어때? 김대리.]


[항상 깐깐 하시다니깐. 그래도 오늘 새로운 모습을 봤어요. 과장님. ㅋㅋㅋ] 




여자가 많은 부서이다 보니, 수많은 소문들이 항상 끝없이 이어지곤 한다. 작고 사소한 배


려 하나에도 불려저서 엉뚱한 이야기가 퍼지기 일쑤인 부서의 특징이라고 할까. 이런 미


묘한 문제는 초기에 강하게 대응을 해야 했다. 절대 상대방이 약점을 잡고 물고 늘어지기 


전에, 쓸때 없는 소리를 퍼트리면 보고만 있지는 않겠다는 늬앙스는 풍겨줘야 조용해 진


다. 




[소문 낼 생각이라면 알아서 해.]


[어머, 아니예요. 그런 생각으로 말한 것은 아닌데...]


[나 바쁘거든.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면 나중에 하지.]




그리고 다시 그녀에게 메신져질을 하시 시작했다. 이게 무슨 짓인지. 업무시간에 부서외


의 사적인 활동을 하지 말라고 누누히 말을 하던 내가 어떡하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미안해. 급하게 메신져가 와서.. 처리하느라 대답이 늦었네. 식사는 나중에 대접할께]


[김대리죠? ]


[응. 걱정하지마. 윤희씨 직장생활 피곤하게 만드는 것 같으면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고마워요 과장님 *^^*]




쓸 때 없는 소문이 흘러 부서내 이상한 기류를 만드는 것을 막아준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


는데, 메신져의 텍스트 넘어로 느껴지는 그녀의 마음은 왠지 나와 방향이 다르다는 것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한동안 내일 출근해서 열어 볼 파일을 정리하고 퇴근 준비를 서두르


고 있는데 메신져가 다시 깜빡였다. 




[과장님, 꼭 밥 사주세요.]


[한번 내뱉은 말은 지켜. 난 내 말 안 믿고 조르는 거 싫어해. 다신 하지마.]


[^^;; ] 




집으로 돌아오니, 마누라는 친정에 가고 쪽지만 붙어 있었다. 산달이 다가오면서 친정 어


머니와 함께 있는 것이 마음 편한 것 같아, 자주 가는 마눌이 한 편으로 고맙기도 했다. 이


렇게 몸이 안좋을 때는 따로 떨어져 있는 것도 좋은 편이니까. 뜨거운 물에 몸을 씻고, 냉


장고에서 콜라를 꺼내 마시면서 TV를 보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에 뜬 홍대리라


는 짧막한 이름. 




"응, 무슨 일이야?"


"과장님 집이 어디세요? 아침에 만난 거 생각하면 저랑 가까울 것 같은데.."


"나? A동에 사는데?"


"어머, 저도 A동 벽산에 사는데, 과장님은요?"


"어? 그래? 나 벽산에서 조금 떨어진 롯데. 생각보다 가깝네. 몰랐는데..."


"치.. 과장님은 직원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으시니까 그렇죠. "




그렇게 이야기를 하다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몸이 아프지 않을 때는 그녀를 카풀해서 함


께 출근하기로 했다. 어차피 나홀로 차량으로 주행을 한다는 것은 기름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으니까. 오랜만에 이런 가벼운 통화를 해서인지, 이런 저런 장난스런 이야기를 하다


가 문득 이런 말을 그녀가 했다. 




"과장님, 내일 처음으로 함께 출근하는건데 어떤 옷을 입고 갈까요?"


"무슨 날도 아닌데.. 암거나 입고 와. 오래 못기다리니까 늦지나 말고. "


"아잉, 그래도 과장님이 좋아하는 옷이 있을 거 아니예요."


"나? 음.. 난 사실 여자 옷 잘 모르는데.."


"어머, 우리같은 디자이너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면, 프로가 아니라는 거 아시죠?"


"겉으로 자신을 꾸민다 게 그 사람의 실력을 가늠할 수는 없어. 그래서 난 신경안써. 몸빼


를 입고 일을 하던, 빤스만 입고 일을 하던, 중요한 것은 디자이너라고 이름을 붙인 사람의 


결과물이야. 오더에 충실하고 시장에서 가치가 있는 워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자가 프로


지, 옷 잘 입는다고 프로라고 한다면 디자이너라는 이름을 떼고 살아야 해."


"아잉. 과장님은 정말 고리타분하세요. 그럼 옷 말고 뭐 평소에 좋아하는 건 없으세요?"




그녀와 처음으로 밤에 통화를 하는데, 너무 딱딱하고 설교 같은 말을 했나 하는 생각이 들


었다. 그래서 약간은 가볍고 장난스런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음.. 내가 윤희씨에게 이런 말을 하면 어떨지 모르겠는데.."


"괜찮아요. 걱정말고 우리 사이엔 다 말씀하셔도 되요. "




전화기를 통해 웃음을 흘리면서 우리 사이라고 말하는 그녀가 조금 부담스럽게 다가왔


다. 그녀와 나의 사이는 어떤 사이인가? 죽을 떠 먹여 주고, 아플 때 몸을 기대게 해주는 


사이 정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을 하고 있다가, 그녀가 말한 우리사이라는 그 말 한마디


에 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던 그녀의 자리가 평소보다 조금 더 크게 자리 잡은 듯한 느낌


이 들었다. 




"난.. 후각과 촉각에 약해. 그래서 오늘처럼 윤희씨 몸에서 나는 화장품 냄새를 맡으면 많


이 약해지거든. 그리고.. 오늘 윤희씨 스타킹 이쁘던데, 그런 투명하면서 펄이 섞인 스타킹


을 난 좋아해. 만졌을 때 거칠면서도 부드럽게 손에 감기는 듯한 스타킹 특유의 느낌은.. 


후우. "


"어머, 과장님 상상하는 것 만으로.. 으흥~ 오늘 아침처럼 건강해 지셨어요? "


"그건 실수였어. 미안하기도 하고.. 부하 직원에게 안좋은 모습을 보여서 미안해.."


"아네요. 저 때문에 그렇게 되셨는데... 후후 "




그리고 다음 날, 이른 아침에 그녀를 기다리며 벽산 아파트 단지 앞에 주차를 해 놓고 무


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똑똑.."




눈을 감고 잠시 잠을 잤던 것일까.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그녀가 웃으며 


차문을 열고 타고 있었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니, 아직 몸이 나른해서.. 잠시 졸았나 봐."


"어머.. 과장님은 아프시면 운전 안하시잖아요?"


"윤희씨는 그런 거 어떻게 알아? 집사람도 딱히 모르는 건데.."


"후후.. 다 이유가 있습니다요~ "




웃으며 장난을 치는 그녀가 차에 타자, 뭐라 딱히 꼬집어 말을 할 수 없는 향기가 차안에 


가득 퍼지기 시작한다. 눈을 감고 잠시 그 향기를 맡아보다 그녀를 천천히 살펴보니, 어제


와 조금 달라진 듯한 외모가 내 눈길을 잡아 끈다. 은색 펄이 섞인 회색빛 스타킹에 주름진 


플레어 스커트, 그리고 목에 두른 주황색 스카프는 그녀의 가녀린 목을 더욱 강조하는 듯 


한 느낌이다. 한참을 그녀를 살펴보느라 말이 없자, 그녀가 웃으며 내게 말을 건다.




"마음에 드세요? 과장님"


"이거 정말 내 마음에 들라고 이렇게 입은거야? 호오.. 이거.. 정말 고마운데. "


"아잉, 겨우 이거 가지고 뭘 그렇게 고마워 하세요. 자 어서 가요."




오랜만에 누군가를 태우고 출근한다는 것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오디오를 통해 


가벼운 음악이 나오기 시작하고, 강변 도로에 진입하자 차가 막히기 시작했다. 가다가 섰


다가, 가다가 섰다가, 끝없는 무한 루프마냥 반복해야만 하는 구간. 즐거웠던 마음도 이곳


에만 오면 밀리는 차들처럼 답답해지기 일쑤였다. 




"후우.. 담배라도 하나 필까.. "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필려고 주머니를 뒤지고 있는데 그녀가 내 손을 말린다. 




"과장님, 아직 몸도 다 안나았으면서.. 나중에 하세요. 네?"


"그래도 윤희씨가 차에 탔을 때는 좋았는데.."


"호호, 그러면 지금은 안좋다는 거예요? 흐응?"


"아니 그런건 아니고.. 여기만 오면 답답해서 그래. 지금도 윤희씨가 있으니 안피고 견디지. "




스틱에 올려져 있는 내 손을 감싸며 웃어주는 그녀가, 내 손으로 전해져 오는 체온 만큼이


나 따뜻하게 느껴졌다. 




"윤희씨는 애인없어? 이렇게 예쁜데.. 남자도 많을 것 같은데.."


"후후, 저 없을 거 같아요? 있을 거 같아요?"


"윤희씨 정도라면 충분히 있고도 남지. 어때 애인 있는거야?" 


"저 눈 높아서 애인 같은거 없어요. 후후 "


"얼마나 눈이 높길래 남자가 없는거야? 세상 남자들 다 죽일 셈이야? 큭큭 "


"그런게 있어요. 근데 제가 정말 예뻐요?"




초승달로 변한 눈망울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그녀. 조금씩 차량이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지자 엑셀을 가볍게 눌러주며 앞차와의 간격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가면 


정체 구간을 피할 수 있는 길목이 나타난다. 그때 까지만 이 지겨운 거북이 놀이를 하면 된


다는 조급한 생각탓인지, 머릿속에 들어있던 생각이 무심코 입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이쁘지. 얼굴도 이쁘고, 마음씨도 이쁘고, 다리는 더 이쁘고.. "


"얼만큼요? "


"만져보고 싶을 만큼.."




스스로 놀래서 하마터면 브레이크를 밟을 뻔 했다. 말하면 안되는 것이었는데. 약기운 탓


이려나.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니 목까지 붉어진 채로 창밖


을 바라보고 있다. 그렇게 갑자기 조용해진 상태로 회사 근처까지 온 우리는, 회사가 보이


지 않는 곳에서 먼저 내리겠다는 그녀를 내려준 후 갈려고 하는데, 다시 유리창을 두들기


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




윈도우를 내리며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자, 한동안 망설이던 그녀가 한마디를 하고 길을 


따라 가버렸다. 




"오늘 저녁, 꼭 사주세요."


"어? 어엉 "




얼떨결에 대답한 채 그녀가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나. 다음부터 감기에 걸리면 절대 


차를 끌고 오면 안되겠다고 다시 한번 결심하며 회사쪽으로 차를 끌고가기 시작했다. 오


늘은 어떻게 하루를 잘 넘겨야 할까.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아무


런 사이도 아닌데, 그렇다고 아무 사이도 아닌 것도 아닌.. 이걸 뭐라 정의할 수 있을지. 




"나 혼자만의 착각이면 좋으련만... "




무심코 되내이는 짧은 말 한마디가 그날 아침, 내 심정을 고스란히 대변해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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