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머무는 자리 - 25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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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부 - 아버지의 여자
민혁은 소문의 최초 진원지가 어디인지 수현이 알 수 없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온실 속의 화초로 이십 일년을 보낸 여인에게 동성애자라는 소문의 무게는 감당하기 벅찼을 것이다.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 불가항력의 상황에서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을 어떻게 견뎌냈는지 수현이 담담한 어조로 풀어놓는다.
[모두들 저를 벌레 대하듯 피해 다녔어요. 강의실, 도서관, 식당…… 그 어디에서도 혼자였죠! 휴학, 아니 자살까지 생각했어요. 오죽하면 모르쇠로 일관하던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해볼까 고민했겠어요? 2학년의 늦은 봄부터 3학년의 가을이 되도록 저는 외톨이였어요. 그런데 거기까지가 제 한계였나 봐요.]
민혁은 벼랑 끝에 내몰린 수현이 선택할 수 있는 카드를 꺼내본다. 첫 장을 뒤집으면 가을비가 추적추적 흩날리는 창가에 수현의 그림자가 위태롭게 흔들린다.
다음 장은 방 안에 쓰러진 수현과 그 옆에 뒹굴고 있는 알약을 보여준다. 응급차와 위세척, 병실에 누운 수현의 모습이 빠르게 지나간다. 영양실조와 우울증이 적힌 카드가 뒤집히고, 수현의 등 뒤로 누군가 다가오는 장면에서 카드는 사라진다.
[같은 대학에 다닌다면 우연히 스치기라도 했을 텐데, 그날 문병 온 단짝 친구와는 고등학교 졸업 후 한 번도 만나지 못했어요. 하긴 아버지 연구실에 간 적이 없으니 그럴 만도 하죠! 그렇다고 오해는 마세요.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하자는 아버지의 부탁 때문이었으니까요. 그보다 민혁 씨, 한 잔 하실래요?]
수현의 학창시절에 얽힌 비화는 냉장고 여는 소리와 함께 잠시 중단된다. 컵과 술병만 놓인 간단한 술자리가 마련되고, 수현은 땀이 식어버린 후의 찝찝한 몸을 뒤늦게 씻는다. 차를 가져 왔다는 생각도 잊은 채 민혁은 몇 모금 들이킨다.
‘소문이야 그렇다 쳐도 영혼결혼식을 올렸다는 친구는 뭐고, 문병 온 친구는 또 뭐란 말인가? 수현과 아버지, 문병 온 친구는 단과대만 다를 뿐 같은 대학에 있는 걸까?’
민혁은 샤워를 마친 수현이 테이블에 앉을 때까지 추리를 거듭한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수현의 이야기에 석연찮은 구석이 많다는 사실이다.
[민혁 씨도 씻어야죠?]
[아뇨! 나중에 씻을 게요. 그것보다……]
민혁은 잠시 사이를 두고 수현의 잔을 채운다. 수현의 눈매가 짧은 순간 파르르 떨린다.
[수현 씨 이야기를 듣다가 생긴 의문인데……]
민혁은 이해가 되지 않던 부분을 한꺼번에 질문한다. 흰 가운 사이로 수현의 아담한 젖무덤이 살짝 고개를 내밀고, 진지한 분위기임에도 불구하고 민혁은 섣불리 눈길을 떼지 못한다.
마음만 먹는다면 다시 한번 질펀한 정사를 나눌 수 있다는 계산이 머리 속을 유영한다. 몹쓸 생각이라며 떨치려 하지만 탱글탱글한 젖가슴의 유혹이 강렬하다.
[음…… 제 얘기가 너무 겉돌았나 봐요, 민혁 씨. 간단히 설명 드리자면 이래요!]
수현은 자신의 가슴에 붙박여 있는 민혁의 시선이 좀 더 자유롭도록 가운의 상의를 개방한다. 조금 전까지 마음껏 농락한 여체의 부드러운 곡선이 뻣뻣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 친구는 아버지의 선물이었어요. 자살이라는 극한의 상황을 막기 위해 아버지가 짜낸 궁여지책인 셈이죠. 일이 그렇게까지 진행되리란 걸 아버지가 미리 알았더라면 절대 문병 보내는 실수 따윈 안 하셨을 테지만……]
민혁은 아버지가 보냈다는 선물의 포장을 한 꺼풀씩 뜯어본다. 수현의 동창생이자 아버지의 극진한 수제자로 낙점된 정희가 문병을 와 있다. 고등학교 졸업 후 3년 만의 어색한 재회를 시작으로 정희는 수현의 절친한 단짝이 된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친구…… 수현의 애틋한 연정이 싹튼다.
[그렇게 비극의 서문이 열렸어요. 정희는, 정희는……]
선물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 민혁은 어금니를 꽉 깨문다. 너무 세게 깨문 탓인지 턱이 얼얼하지만 미처 깨닫기도 전에 오금마저 저려 온다.
[정희는 아버지의 여자였어요!]
청천벽력 같은 그 한 마디로 민혁은 앞뒤 정황을 빠르게 이해한다. 대학 입학 후 정희는 아버지의 연구실로 발탁된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정희에게 아버지가 어떤 미끼를 던졌는지, 수현과 연락이 단절된 배경이나 연구실 출입이 통제된 이유 등을 민혁은 굳이 추론하지 않는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도시를 장악하던 날, 정희와 수현은 둘만의 결혼식을 올린다. 정희와 아버지의 관계를 전혀 모르는 수현에게 첫날밤의 신성한 의식은 소문 그대로 동성애자임을 각인시킨다.
두 여자의 알몸이 엉키고, 혀와 혀로 서로의 타액을 건넨다. 잘 길들여진 정희의 손길이 수현의 젖가슴을 연주한다. 참을 수 없는 흥분에 수현의 허리가 뒤틀리고, 정희의 손가락은 수현의 처녀림에 길을 낸다.
처음 맛본 황홀함은 해를 넘겨 계속 이어진다. 수현이 방송국에 입사하던 날, 대학원에 진학한 정희가 수현의 집에서 자고 간다. 정희가 핸드백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더니 한껏 달아오른 수현의 계곡을 들쑤신다.
흉물스럽게 생긴 이물질이라 거부하고 싶은 여심과 달리 육체의 반응은 뜨겁고 적극적이다. 계곡물이 넘쳐 범람하고, 쥐어짜는 신음 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운다. 분화구의 열기가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고, 마침내 수현은 절정에 이르러 폭발한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아버지가 들이닥쳤어요. 지금 생각하면 처음부터 엿듣고 있었던 게 분명한데, 그 때는 제 신음 소리가 너무 컸었기 때문이라고 여겼어요.]
민혁은 발가벗은 상태로 동성애를 나누다 현장을 들켜버린 여자들에게 상식적으로 통할 수 있는 변명이란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저희 둘은 파국을 맞이했어요. 다음 날 아버지를 찾아 갔어요. 제가 저지른 불장난이니 수제자인 정희만큼은 용서해 달라고 애원할 작정이었죠!]
회상에 잠긴 수현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젖가슴 위로 한 자락의 물기가 떨어진다. 민혁은 선물의 마지막 알맹이를 풀어본다.
머리조차 제대로 빗지 못해 산발한 상태로 수현이 연구실로 찾아간다. 아무리 두드려도 닫힌 문은 열릴 낌새가 없다. 한참을 쪼그려 앉아 있는 수현의 근처로 누군가가 다가온다. 정희다. 얼핏 보기에 사나운 비바람이 할퀴고 간 흔적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태풍의 눈처럼 지극히 평온한 표정이다. 정희는 아무 말 없이 열쇠를 꺼내 문을 연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수현에게 정희가 낮고 빠르게 속삭인다.
[캐비닛 속에 숨어 있으라는 거예요. 어리둥절했지만, 정희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죠!]
캐비닛의 밀폐된 공간이 어느 정도 익숙해질 무렵 밖이 소란스러워진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추가되고, 연이어 살과 살이 부딪히는 끈적끈적한 소음이 메아리친다. 수현은 틈새로 보이는 남녀의 교접에 전율한다.
[소리치지 않으려고 입을 틀어막아야 했어요. 아버지에 대한 분노보다 정희의 배신이 믿기지 않았죠! 아버지가 나간 뒤에 정희가 그러더군요. “난 교수님을 사랑하고, 교수님은 널 사랑해! 내 자궁 속에 정액을 뿌릴 때 수현, 네 이름을 불러. 이게 인생이야!” 라고……]
수현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민혁은 점점 더 뒤죽박죽이 되는 심정이다. 아버지는 왜 하필이면 자신의 정부를 문병 보냈을까? 진실을 밝혀버린 정희의 속셈은 무엇일까? 수현은 결국 아버지를 용서한 것일까?
[아버지의 여자는 바로 저였어요. 부녀지간의 건널 수 없는 간극을 정희가 메웠던 것이죠! 어긋난 사랑 아니, 왜곡된 집착이 저희 셋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다고 해야 할까요?
아버지와 정희의 노림수가 무엇이었던 간에 민혁 씨를 만나기 전까지 저는 심한 후유증을 앓았어요. 섹스 자체에 대한 혐오증이랄까, 아무튼 일에 파묻혀 살았죠! 그렇게 어정쩡한 반쪽 여자인 저를 민혁 씨가 온전한 여자로 만들어줬어요.]
풀릴 듯 풀리지 않는 의문점을 남겨 둔 채 수현의 이야기가 일단락된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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