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구번홀 - 14부
본문
"사랑아, 니 신랑 이춘풍 빰치겠는걸."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지 않다구."
"그런 여자 집까지 얻어줬다면 화 낼만 하네."
"지랄을 떨구 온 날은 꼭 내 품을 파고 들더라구.
딴년한테 힘 빼구 온것도 모른채 딱하다고 보약까지 먹인걸 생각하믄..."
"니가 그래두 신랑은 끔찍히 위했나보구나."
"하늘인줄 알았지."
"그랬으니 웬수 같었겠군?"
"이젠 끝내야 할 것 같지?"
"이혼 도장 찍어주기 전에 재산조사부터 해봐.
막상 도장 찍은 다음에는 재산분할하려던 마음을 바꿔 먹는 사람들이 많거든."
"설마, 지 잘못으로 이혼하는건데..."
"똥 누기 전과 똥 눈 후 차이라고나 할까?
도장 찍기전엔 이것저것 다 준다는 사람들도 막상 찍구나면 한푼이라도 덜 주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이 많아.
신랑을 하늘처럼 떠 받들었다면 마음의 상처도 클텐데
평생 먹고살 기반은 마련해 놓고 도장 찍어야 할꺼 아니니.
니가 알고 있는 재산도 순식간에 명의이전하거나 감춰서 재산분할청구권을 행사할 때 쯤에는 이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거지 행세를 하는게 그런 부류의 사람들의 공통된 심성이야."
"끔찍하네."
사랑이가 돌아간 시간은 점심시간을 훨씬 초과한 다음이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나는 고뚜루상사 정사장에게 전할 비행기표를 확인한 후 여러 가지 결재서류를 보고 받으며 거래처와 환담하는 사이 벌써 퇴근 시간이 임박하고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김부장, 자네 출장 안떠났나?"
"사장님, 아직 시간 많이 남았습니다."
"늦지 않토록 서두르고 잠시 시간이 되면 내 방에 들러봐."
문을 열고 들어서니 사장님은 서랍속에서 작은 물건을 꺼내 책상 위에 놓았다.
"이건 프랑스제 향순데, 페르몬 성분이 있어서 여자들이 좋아할걸세."
"어디다 쓰라고요?"
"고뚜루 사장이 여자라며.
내 선물이라고 넌즈시 전해주게.
여자라면 향수 안좋아할 사람 있나.
그리고 내가 못가게 되서 미안하다는 말도 전해주고."
사장님의 선물을 우측 주머니에 넣고 출장보고를 마친 후 자리에 돌아오니 직원들도 출장 잘 다녀오라며 약간은 부러운 듯 전송하는 통에 서둘러 김포로 향하는 차를 타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공항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잠시 담배를 한 대 꺼내 피우며 먼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길 옆을 달리던 차에서 갑자기 크락션이 울렸다.
"부장님, 타세요. 제가 공항까지 모셔다 드릴께요."
목소리를 들으니 신입사원 김미애라는 것을 알겠다.
"퇴근하지 않고 거기가 어디라고 간다는거야?"
"피곤해서 일찍 퇴근하려구요."
"그럼 어여 집에 들어가."
"부장님 모셔다 드리고 가면 되요."
"난 공항버스 타면 되니까 그냥 가."
"집에 가는 방향이잖아요. 어서 타세요."
김미애의 집 방향이 화곡동 쪽이라는 사실을 깜박 잊고 있었지만 다행히 편안하게 공항까지 가게되었다 싶어 조수석에 앉았다.
카오디오에서 클래식이 잔잔하게 흐르고, 나는 공항에 도착할 때 까지 미애와 한마디 말도 없이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이른 퇴근시간에 출발한 덕분에 교통체증이 없어서 눈깜짝할 사이에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김미애씨, 고마웠어."
가볍게 감사의 표시를 하며 안전벨트를 풀렀다.
"부장님, 요금 안주세요?"
"얼마?"
"돈 말구요. 볼에 뽀뽀라든가..."
"그런 말하면 못써요."
모른 척하며 벨트를 푸르고 조수석 문을 열고 공항쪽으로 무뚝뚝하게 걸어나갔다.
김미애는 그런 나를 향해 뜀박질하듯 달려와 볼에 뽀뽀를 하며 잘 다녀오라는 말을 던지고 쏜살같이 자기 차로 달음박질쳤다.
기습적으로 볼을 훔친 김미애가 그다지 밉지는 않았지만 조심해야겠다 싶어 마음이 오히려 무거워진다.
정사장을 기다리려고 이층 커피숍으로 오르는 계단을 밟고 있으려니 급히 따라오는 사람이 있었다.
힐끗 뒤를 돌아보니 정사장이 가벼운 운동복 차림으로 급히 계단을 올라오며 내 옷자락을 잡을 듯이 손을 뻗치고 있었다.
"어, 벌써 오셨어요?"
"네, 계단을 오르는데 김부장이다 싶은 사람이 오르길래 조금 뛰었죠."
"근데, 일행은요?"
"일행요? 낼 오죠."
"근데, 비행기표는 두장 구해달라 하셨잖아요?"
"김부장이랑 같이 가려면 두장 필요한거 아니에요?"
"전 내일 새벽에 출발할건데요."
"그래요? 제가 같이 가잔말 안했던가요?"
"못들었어요. 전 아무런 준비도 안된채 비행기표만 전달하려고 나왔는걸요?"
"저런. 제가 깜빡 했나보네요.
실무진은 내일 제주로 올꺼에요.
오늘은 김부장이랑 늦게까지 얘기하며 이번 사업권을 포기하고 김부장네 회사 제품을 취급해도 될 것인가를 판단하기 위해서 먼저 가려던거였어요."
"어쩌죠? 전 집에다 연락도 안했는데."
"전화 없어요?"
셀프 커피를 마시며 정사장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니 미인이다 싶었다.
나이가 몇인지 가름하기 어려울 정도로 잘 관리된 몸매며 얼굴을 보니 애엄마한테 무심했다 싶을 정도로 많은 차이를 느껴야 했다.
"뭘 그리 물끄러미 쳐다봐요?"
"젊어보여서요."
"젊어요. 몇으로 봤는데요?"
"당차게 일하는 걸로 봐선 오십대로 알고 있었는데, 막상 가까이서 보니 삼십대 초반 같은 느낌이 드네요."
"호호, 전 삼십대말이에요."
"그런데 그 큰 회사를 운영하세요?"
"공부를 많이 했죠.
식구들 따돌리고 회사를 맡으려면 능력 우선 아니겠어요?"
"하긴 남자분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텐데 어떻게 그 자릴 맡으셨을까 궁금했었어요."
"회사 운영이 소꼽장난인가요?
수백명의 생계를 책임지려면 능력있는 사람이 회사를 맡아야겠죠."
"그런 정사장님댁의 어른들의 결단에 경의를 표합니다."
"가만히 보니 제 자랑만 늘어놨군요?"
"가당치 않은 말씀입니다.
사회가 여성을 너무 얕보는 경향이 있어서 그럴 뿐이지 남자보다 월등한 능력을 갖고 계신 분들이 많다고 믿습니다.
그런 견해를 갖고 봤을 때 오히려 정사장님의 경영은 회사 발전에 큰 힘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좋게 평해주니 고맙군요.
이젠 탑승 수속을 해야 할 시간이니 내려가요."
정사장의 의도적인 동행에 약간은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으나 어차피 집이나 회사에는 오늘 밤 출장을 떠난다고 통보해 놓은 상태라서 큰 부담은 없다.
다만 여러사람이 동행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과 달리 남녀 두사람이 밤새도록 무슨 얘기를 하며 제주쪽 호텔예약을 전혀 하지 않은 상태에서 빈방이라도 없으면 잠잘 곳이 마땅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새벽에 떠날 계획이라서 호텔예약도 안했는데 정사장님은 호텔 예약하셨어요?"
"일단 비행기나 타세요.
전 예약해놨지만 그냥 가도 구할 수 있을꺼에요."
창가쪽에 정사장이 앉고 그 옆에 나란히 앉아 석양이 물든 창공을 달고 있다.
높은 빌딩이 서서이 작아지며 마침내는 성냥갑으로 지은 모형처럼 보인다.
노을진 구름 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하늘은 점차 어둠으로 변해가면서 멀리 내려다 보이던 산하들도 울긋불긋한 옷을 벗고 점차 검은 빛으로 같은 색깔을 내더니 칠흑같이 어두운 세상으로 변하고 있다. 반디불처럼 희미한 불빛만 저 멀리 우주를 향한 손짓인양 흔들던 도시의 꼬리가 사라지고 낭만을 꿈꾸던 바다 조차 어둠속으로 파뭍히면서 비행기는 제주공항에 착륙을 위한 렌딩기어 내리는 소리로 요동치고 있었다.
"전 아무 준비도 안하고 내려와서 뭣부터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걱정할게 뭐 있어요?
먼저 호텔에 도착하면 밥먹고 얘기하다 뭐 그러면 되는것 아니에요?"
"그럼 정사장님이 예약한 호텔부터 가야겠군요?"
"방을 정해도 일단 호텔부터 가야할 것 아니겠어요?"
"그렇기는하죠."
"작은 일로 고민하지 말아요.
준비되지 않았다면 제가 호텔방 정도는 책임질께요."
"어휴, 그런말 마세십시오.
접대하려고 온 건데 오히려 신세질수는 없잖아요."
"비행기표는 김부장이 부담했으니까 호텔방 정도는 제가 부담해도 문제될게 없잖아요."
공항앞에 줄비하게 늘어선 택시 중 하나를 골라타서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카운터에 도착한 정사장이 뭐라고 몇마디 하자 보이가 짐을 받아들었다.
정사장은 짐을 맡기고 이층 식당으로 가자며 나를 향해 손짓한다.
이층에 마련된 호텔식당은 화려하면서도 깔끔한 인테리어로 손님을 편안한 분위기로 맞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메뉴판을 서로 권하며 음식을 골랐다.
"비프로 하려는데 어떠신지요?"
"좋아요. 레드 한잔 곁들이면 좋겠군요."
포도주와 간단한 안주가 먼저 나왔다.
포도주잔을 가볍게 부딪히는 소리가 청하한 음으로 변해 귀에 울린다.
입술로 가볍게 음미하며 잔잔하게 전달되는 알콜과 약간은 비릿한 레드의 맛을 혀끝으로 감아 올리며 목젖으로 살짝 넘겨본다.
샹들리에의 불빛.
상큼한 인테리어로부터 풍기는 아늑함.
맑은 크리스탈 잔에 쏟아진 붉음.
가벼운 입술.
차갑게 그리고 부드럽게 넘어가는 감미로운 향기.
그윽하게 바라보는 정사장의 눈빛.
고통스럽던 과거의 모든 일 마져 잊어버릴 정도의 고요함.
그것은 평화, 행복, 사랑이라는 단어가 교차되는 순간이었다.
정사장은 호텔 식당을 나오며 바닷가를 구경하고 싶다고 했다.
택시를 잡아타고 용바위까지 도착하니 많은 사람들이 바다를 구경하고 있었다.
찰싹이는 파도소리가 유난히 큰 것이 내일 아침의 일기를 예측하기 어렵겠다는 우려도 없지 않았지만 차가우면서도 부드럽고 포근한 바닷바람에 설레는 마음을 느꼈다.
"좋죠?"
"네."
"전 가끔 이곳에 와요."
"전 엄두도 못내죠."
"혼자 이곳에 오면 사업구상이 잘되거든요."
"그렇겠군요."
돌투성이의 바닷가까지 내려가서 물결에 따라 발을 담그고 있는 사람들.
언덕 위에 서서 쏟아지는 바닷바람을 몸으로 견디는 사람들.
다정하며 더욱 다정하기를 다짐하는 많은 사람들 속에 낯설며 가까이 할 수 없는 두 사람은 서로에게 유익하지 않을 수도 있는 너무 일상적인 얘기들만 늘어 놓으며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바람을 맞이하고 있었다.
"가요. 갈대 무성한 곳이 있거든요."
"또요?"
"거긴 더 좋아요. 평원이 펼쳐진게 가슴이 탁 트이죠."
"많이 다니셨나봐요?"
"자주 온다니까요."
정사장이 이끄는데로 택시를 잡아 타고 넓은 평원이 펼쳐진 곳에 도착했다.
허리를 지나 어깨까지 덮을 것 같은 무성한 갈대 밭이 펼쳐진 곳이다.
신혼여행을 온 듯한 많은 쌍들이 서로를 부등켜 안고 키까지 자란 풀 속에 있었다.
"저 아래 불빛을 봐요."
정 사장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하늘을 찌를 듯 서있는 송전선위의 불빛은 마치 UFO 의 불빛처럼 깜빡인다.
발 아래 펼쳐진 넓은 초원.
그 위에 서면 키를 가릴 것 같은 무성한 갈대.
두 사람은 마치 연인과 같은 기분으로 멀리 펼쳐진 밤하늘을 쳐다 보고 있었다.
따뜻한 손 하나가 가만히 다가왔다.
살짝 손이 마주치며 온기가 몸 전체에 퍼져나간다.
어깨위에 머리 하나가 놓였다.
향긋한 풀냄새처럼 코 끝에 아리한 여운을 남기며 점차 무게를 더해간다.
하늘거리는 부라우스 사이로 봉긋한 젖무덤이 눈에 들어온다.
가만히 허리를 감아주며 밤 하늘을 쳐다본다.
"김부장님, 당신 용기 있는 사람이에요."
"제가요?"
"경쟁회사에 뛰어들기는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경쟁과 협력은 같은 맥락이죠."
"용기 덕분에 협력할 일만 남게 된거죠."
"감사드려요."
"제 마음에 쏙 들더군요."
"전 회사일을 한 것 뿐인 걸요."
"당신 같은 사람이랑 사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행복과 불행은 종이 한 장 차이죠."
"저는 언제 당신같은 사람을 만날까요?"
"결혼하지 않았어요?"
"공부했죠. 악착같이..."
"이제부터 찾으면 되겠죠."
"찾아질까요?"
두 손으로 정사장의 어깨를 감싸며 가볍게 안아들였다.
발끝을 들어 올리며 정사장의 부드러운 입술이 얼굴을 덮는다.
어깨를 안던 손을 내려 그런 정사장의 가녀린 허리를 끌어 안았다.
뜨거운 콧김이 얼굴에 와 닿는다.
그 입술에 맞춰 입술을 포개니 보드라운 혀 끝이 입술을 파고 든다.
가만히 그 혀를 받으며 허리를 더욱 끌어 당겼다.
도툼한 아랫배가 서로 닿는다.
허벅지로 전달되는 뜨거움이 느껴졌다.
젊은 연인들처럼 한참을 그렇게 입맛춤하며 탐닉하며 서로에게 조금만이라도 더 다가갈 수 있도록 안간힘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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