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야설

감기 - 2부 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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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 - 17 개미의 날개 4






오래전에 이미 잊었다고 생각되는 설레임이 핸드폰을 쥐고 있는 내 손을 통해 전해져 


왔다. 얼마만일까.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무작정 누군가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지는 것이. 


마치 십대 사춘기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통화를 기다리는 동안 실없는 미소가 내 입가


에 절로 잡혔다가 소리없이 사라진다. 




"여보세요?"




핸드폰을 통해 들려오는 부드러운 속삭임은 거의 한달만에 듣는 그녀의 목소리였다. 처


음 전화를 걸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는 무슨 말을 먼저 할까 고민했었지만, 막상 그녀의 


목소리를 듣게 되자 그런 생각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입밖으로 엉뚱한 말이 세어


나오기 시작했다.




"저.. 선우영인데 기억하세요? 아저씨 옆에 몇 달 동안 누워있던.."


"그럼요. 목소리 들으니 알겠는데요. 오랜만이네요."


"어디세요? 아직 병원이시면 뵐까 하는데요."


"지금 병실인데.. 이제 집에 갈려구요."


"저 지금 근처에요. 입구로 갈께요."


"예? 네. 그럼 병원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께요."




병원 본관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자 회색빛 긴 치마를 입고 카키색 코트를 걸치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프라하에서 감기에 걸려 누워있으면서 얼마나 


그녀를 떠올렸던가. 지금 이런 내 감정은 아직 나 혼자만의 열병일지도 모르지만, 그녀


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자 또 다시 그때의 감정과 시간들이 새삼스럽게 머릿속을 스치


고 지나갔다. 그리고 가슴을 찌르듯이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그녀의 뒷모습을 천천히 


쫒으며 입을 열었다. 긴장된 만큼 가슴속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말이 입밖으로 나오며 


새하얀 입김으로 변하는 것을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유경씨."


"오셨어요?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내 목소리와 함께 돌아서서 웃으며 말을 해주는 그녀. 그동안 머릿속으로만 그리워했던 


그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자 가슴 한 구석이 따끔거려 왔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결


코 느끼지 못했던 긴장감에 지금 난 혼돈의 회오리 한 복판에 서있는 듯한 충격을 받고 


있었다. 오래전 부터 노리고 있던 포획물 앞에서 여리고 약한 뱃가죽을 드러내는 듯한 


이 나약하고 비참한 내 모습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떤 이야기를 먼저 해야할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보고 싶어서 이곳까지 달려왔다고 하는게 정확한 


말이 될 것 같았다. 




이건 결코 나에게 어울리는 감정도 모습도 아니었다. 한동안 그녀를 그렇게 바라만 보


고 있을 때 차가운 초겨울 바람이 우리 둘 사이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그제서야 느껴


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고 있었던 걸까. 그 바람의 끝자락에 코트의 옷깃을 여미면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가 주차장쪽으로 걸어가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식사하셨어요? 안하셨으면 같이 하실래요?"


"예, 유경씨도 안하셨을 텐데.. 어떤 거 좋아하세요?"


"전 아무거나 잘 먹죠. 드시고 싶으신 것 있으세요?"




그나마 지금 나에게 다행한 한 가지는 이야기 거리가 조금이라도 풀리기 시작하면 그 


다음부터 부담이 줄어드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발바닥안에 감추어 두었던 발톱이 


어느세 조금씩 자라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부터는 정글을 질주했던 오래전 


모습을 나 스스로 되찾을 때다. 늘 처음이 가장 망설여지고 힘든 것 뿐이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분 좋은 전율이었다. 




"오늘처럼 추운 날은 뜨거운 설렁탕이 좋을 것 같군요. 진하게 우려낸 사골 국물에 뜨


끈한 밥 한공기 말아서 먹으면 좋지요. 그리고 잘익은 깍두기도 함께 곁들일 수 있으면 


더 좋구요. 먹고 나면 든든한게 기분도 좋아지실 겁니다."


"후후.."




내가 한 말에 잠시 웃음을 흘리며 걸어가는 그녀. 그녀의 웃음이 어떤 뜻인지 궁금한 나


는 그녀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아직도 내 몸에 남아있는 감기 기운 때문일까. 그녀의 


웃음이 어떤 의미인지 쉽게 보이지 않았다. 나쁘진 않지만 너무나 많은 의미가 내포된 


그 미소에 난 또 다시 할 말을 읽고 그녀를 바라보아야만 했다.




"별로 웃긴 말도 아니었는데.."


"훗, 미안해요. 그저 그런 말을 하실 줄 예상을 못했다고 할까요? 다들 이렇게 오랜만


에 만나게 되면 근사한 레스토랑이나 뭐 그런 곳을 말하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제 예


상이 보기 좋게 빗나가니까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네요. 혹시 기분 나쁘셧어요?"


"아뇨. 그렇지는 않았어요. 사실 제 외모만 보면 고풍스러운 곳에서 나이프를 잡고 식


사를 할 거라 상상을 하실테니 그건 당연한 반응인데요. 하지만 전 국과 밥을 숟가락으


로 퍼먹는 한식을 더 좋아하거든요."


"하아~..."




내 말이 끝나자 어의없다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가 운전석에 몸을 싣고 


차문을 닫는다. 나도 옆으로 돌아가 조수석에 탄 후 안전띠를 메며 그녀에게 말했다. 




"제 말이 안 믿기세요?"


"그런 어처구니 없는 말은 도대체 누구한테 들은 거죠?"


"거울 보면서 저 스스로 생각한건데요. 그 놈 참 고풍스럽게 생겼구나 하구요."


"큭큭.. 머슴처럼 이겠죠?"




그녀가 운전하는 차가 대학병원 주차장을 빠져나오기 시작할 때 흘낏 내 열굴을 바라보


던 그녀가 내게 어디로 가고 싶은지 물어왔다. 




"어디로 가실래요? 어디 잘 아는 곳이 있으세요?"


"여기선 국세청이 가까우니 그쪽으로 가죠. 다른 건 몰라도 그 집이 맛은 좋아요."


"그 다른 거라는 건 어떤 거죠?"




국세청으로 향하는 길로 차를 몰아가며 그녀가 내게 말해왔다.




"뭐 전통있는 곳이라고 하면 흔히 그런 것 있잖아요. 조금 시끄럽고, 그다지 친절하진 


않고, 그리고 좁고 불편하고.. 하지만 이 시간이라면 손님이 그다지 없을 거예요."


"그런데 저하고 가자고 하신거예요?"


"예전에 병원에 있을 때 부터 생각해 오던 거라서요. 언젠가 유경씨와 처음으로 뭔가 


먹으러 가게 된다면 뭐 부터 먹을까 생각했었거든요. 근사한 레스토랑이나 평소에 흔히 


먹을 수 없는 특이한 외국음식들, 아니면 어디 바닷가라도 가서 회라도 먹을 수 있을테


고.. 뭐 그런 상상을 했었지요."


"조용하게 책만 읽으시는 줄 알았더니..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이나 하시고 계셨군요."




그녀와 가볍게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녀와 나를 태운 차는 벌써 국세청 뒤쪽 길로 들어


와 있었다. 우리는 차를 한 곳에 주차시켜 놓고 설렁탕집으로 걸어갔다. 




"사실 책을 읽고 있어도 유경씨가 옆에 있으면 눈에 잘 안들어 오더라구요. 그래서 이


것 저것 생각도 해보고.. 뭐 그런 오만 상상을 해보고 그랬죠."


"그 오만 상상이라는게 어떤 거였는데요?"




설렁탕 집에 들어와 보니 한차례 손님들이 휩쓸고 지나갔는지 아줌마들이 분주하게 상


을 치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문쪽에서 벗어난 따뜻한 곳에 자리를 잡으며 그녀에게 


말을 했다. 




"뭐 유경씨가 지금 상상하는 그런 오만가지 상상.. 그거 맞아요."


"큭큭, 제가 지금 무슨 상상하는데요?"


"그러니까요. 결국 상상이라는 것은 굳이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거잖아요. 애써 알 필요


도 없을지도 모르는 것이구요. 상상이란, 그런 매력적인 것이니까요. 맞아도 좋고 틀려


도 좋은 것이 상상이니까요."


"대답을 회피하는 건 아니구요?"


"글쎄요? 유경씨 상상에 맡길께요. 후후.."




이야기를 하고 있는 우리 둘 사이에, 아줌마 한 분이 간단한 반찬을 차려주며 주문을 받


았다. 눈으로 그녀에게 먹을거냐고 물어보니 그녀도 대답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거린


다. 어차피 이곳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는 터라 어려운 주문도 아니었다.




"설렁탕 하나 하고, 특대 하나 부탁드릴게요."




아줌마가 부엌을 향해 내가 말한 것을 되풀이 해서 말을 하고 돌아간 사이에 그녀가 수


저통에서 젖가락과 수저를 닦아서 내게 건내주며 말을 한다. 




"평소에 많이 드시는가 봐요?" 


"아뇨, 오늘 먹은 게 귀국하면서 먹은 기내식 밖에 없어서.. 배가 무척 고프네요."


"아.. 여행 갔다 오셨어요?"


"예, 오늘 도착해서 핸드폰 살리고 전화 드린거죠."




아줌마의 손에 설렁탕 두 그릇이 탁자위로 옮겨지고, 구수하고 뜨거운 김을 내뿜고 있


는 설렁탕을 바라보고 있자 다른 말이 필요없는 순간이 다가왔다. 큼직하게 썰려있는 


빨간 깍두기 하나를 그녀의 그릇에 넣어주며 말을 했다. 




"많이 들어요."


"사주는 건가요? 제가 살려고 했는데.."


"전부터 같이 먹고 싶었던 거라 비싼 건 아니지만 제가 사고 싶어요. 많이 들어요. 깍두


기를 함께 넣어서 먹으면 더 좋아요."




고개 숙여 먹다가 흘러 내린 머리카락을 귀 넘어로 넘기며 밥을 먹는 그녀의 모습을 간


간히 지켜보았다. 애써 내숭을 떨지 않고 먹고 싶은 만큼 잘 먹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할까. 눈에 콩깍지가 씌이니 별 것도 아닌 그 모습이 좋게 보인다는 실없는 생각이 스치


고 지나갔다. 밥을 다 먹고 주차장으로 돌아오면서 따뜻한 캔커피 두개를 사서 그녀와 


함께 마시고 있을 때였다. 




"담배 하나 펴도 되죠?"


"훗, 남자들은 꼭 밥먹고 나서 담배피더라.. 전 괜찮아요."


"습관이라는게 무서운 거니까요."




주머니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 불을 붙였다. 골목을 휘돌아 오는 바람이 내쪽으로 향해 


불어오자 담배를 입에 물고 그녀의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내게 의문의 표시로 눈을 살


짝 뜨고 바라보는 그녀에게 담배를 가르키며 웃어보이자 그녀도 덩달아 웃으며 말을 한


다. 그녀의 미소가 처음보았을 때 보다 조금 더 진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의외로 세심하네요. 그런데 비행기 안에서는 어떻게 참았어요?"


"잤어요. 눈감고 생각하다가.. 감기약을 먹었더니 잠이 오더라구요. 덕분에 편하게 왔


지요. 아무런 생각을 할 필요도 없으니까요. "


"지금은 괜찮구요?"


"뜨거운 걸 먹어서 그런지 지금은 괜찮네요."




담배를 다 피고 그녀의 차에 타고 주차장을 빠져나오자, 한동안 신호를 기다리던 그녀


가 내게 말을 했다. 




"무슨 생각하셨어요? 오면서.. "


"그냥.. 이것 저것요. 그동안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요. 마치 방학숙제 하듯이.."




내 대답을 기다리는지 아무런 대답도 않고 묵묵히 앞만 바라보는 그녀. 긴 치마속에 숨


겨진 그녀의 두 다리가 무척 예쁘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다리만 계속 볼 수가 없어 


핸들을 움켜쥐고 있는 그녀의 길고 하얀 손가락으로 눈을 돌렸다.




"체코를 다녀왔는데 무척 추웠어요. 도착하자 말자 감기가 된통 걸렸을 만큼요. 눅눅한 


눈까지 내려서 더 추웠던 것 같아요. 한동안 몸에 열이 나서 움직일 수가 없었거든요."


"어머, 많이 아팠나 봐요."


"아팠다기 보단.. 어지러었다고 하는게 더 정확할 것 같아요. 마치 깊은 물속을 헤엄치


는 듯한 몽롱한 기운 때문에 한동안 침대를 벗어나지 못했으니까요."




밤 11시가 넘은 도심을 지나가는 수 많은 차량들이 우리가 탄 차의 옆을 스치고 지나가


고 있었다. 창밖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내 눈은 며칠 전 프라하의 호텔을 떠올리고 있


었다. 눈이 내리던 그 날. 프라하의 골목을 걸어가던 내 모습이 차창밖에 비친 화려한 


도시의 불빛과 어울려 오버랩되기 시작했다.




"토할 것 같은 기분에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거울속에 하얀 꽃을 손에 들고 있는 유경


씨 모습이 떠올랐지요. "




내 말이 의외였는지 운전을 하며 살짝 내 얼굴을 쳐다보던 그녀가 다시 고개를 돌리며 


내게 말을 걸어 온다. 그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차안을 가득 울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


다. 




"그래서요? 잃어버린 날개는 찾고 오신건가요?"


"예. 갈 때는 그저 막연히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갔었지만, 그때 거울을 보자 알 


수 있었어요. 내가 지금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젠 다신 놓치고 싶지 않은 


그런 것이 생겼다고 할까요? 지금은 다시 시작하고 싶은 생각만 간절하지요. 이젠..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거든요."


"그럼 그때 제 제의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녀의 제의. 그녀가 만일 신경쓸 이유가 없는 여자였다면 그 제의를 듣고 그녀의 회사


에 입사할 준비를 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와 회사를 함께 다닌다고 해도 상관이 없었


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녀의 제의를 받아 들일 수 없는 이유가 생긴 상태라 바로 


대답하기 힘들었다. 그때 차창밖으로 오피스텔 근처의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


작했다. 좀 더 그녀와 있고 싶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함께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 생각


에 그녀에게 말을 했다. 




"그건.. 나중에 대답해 드릴께요. 전 여기에서 내려주세요. 조금만 걸어가면 오피스텔


이거든요. "


"좀 더 가도 되는데.. 감기 걸리셨잖아요."


"여기 벗어나면 차를 돌리기 힘들거예요. 집이 B동이죠?"


"어떻게 아셨어요? 아, 아버지가 말했군요."


"뭐, 같이 누워있으면 심심하니까 이것 저것 이야기했죠. 환자 둘이 누워있으면 할 게 


별로 없거든요."


"훗, 알만하네요. 그런데 여행갔다 오면 선물 사온다고 안하셨어요?"




잊지 않고 그 말을 해주는 그녀. 사실 난 그녀가 그 말을 해주기를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선물을 지금까지 주지 못하는 이유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그렇게 긴장


했던게 거짓말처럼 지금까진 내가 예상한 흐름에거 크게 벗어난 것은 없었다. 산중의 


호랑이가 우리에 갇힌다고 해서 고양이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




"잊지 않고 기억하시네요."


"제가 원래 그런데는 기억력이 좋거든요."


"프라하에서 정말 마음에 드는 선물을 찾아냈어요. 독일에서도 찾지 못했던 것을요."


"그래요? 보여줘요."




갓길에 차를 세우며 호기심이 잔뜩 어린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그녀. 딱히 지금 줘도 별 


문제는 없지만 그녀와 나의 끈을 좀 더 이어보고 싶은 욕심이 났다. 그리고 지금보다 더 


좋은 상황이 기다릴 것 같은 느낌이 그녀에게 선물을 주는 것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난 


내 몸에 둘러진 안전벨트를 풀며 그녀에게 말을 했다. 




"나중에.. 나중에 드릴께요."


"왜요? 지금 줘요. 궁금한데.."




대답을 기다리는 그녀에게 몸을 돌려 차문을 열고 내린 후,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잠시 차가운 공기를 마셨기 때문일까. 지금까지 몰랐던 그 어떤 향기가 차


안에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그 향기를 가슴속 깊이 들여마신 후 천천히 그


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나중에... 유경씨가 좀 더 좋아지면 그때 드릴께요."




내 말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바라보고만 있는 그녀를 나 또한 한동안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 마주치고 있는 시선만큼 그녀와 날 둘러싸고 있는 시간의 흐름이 점점 느


려지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가끔 전화해도 되죠?"


"예? 예....괜찮아요."


"집에 들어가실 때 차 조심하세요. 감기 조심하구요. 유경씨.."


"예, 우영씨도.. "




차 문을 살짝 닫아주고 그녀의 차가 떠나가는 것을 한동안 바라보다 오피스텔로 발걸음


을 옮겼다. 돌아오는 동안 난 그녀가 내 이름을 오늘 몇 번 불러주었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딱 한번. 그녀가 내 이름을 불러준 것은 그 한번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한번이 


이제 시작이 될 것이라는 강한 예감에 내 가슴은 두근거리고 있었다. 이 미약한 한걸음


이 언젠가 그녀와 내가 나란히 걸어가는 길고 긴 발자취가 될 것이라는 것을 난 머리가 


아닌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내 오랜 본능이 알려주는 예언이기도 했다.




오피스텔로 돌아와 뜨거운 물에 몸을 씻을 때 다시 머리가 지끈거리고 어지럽기 시작했


지만 더이상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녀를 만나기 전에 약국에서 사먹은 약기운은 이제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물기를 닦고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나는 차가운 침대속에 몸을 


뉘우며 몽롱한 어지러움 속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하룻동안 버텼던 몸에 달콤한 휴식의 


시간을 줄 때가 된 것이다. 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난 그녀에게 한발 더 다가서고 있을


거라는 설레임이 어지러움 속에 한줄기 희미한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난 그렇게 귀국


한 첫날을 즐거운 마음으로 잠을 잘 수 있었다. 오늘 꿈에는 하얀 꽃을 든 여인을 만날 


수 있을까. 매일 밤 반복되는 그 지겨운 악몽에서 어쩌면 벗어날 수도 있을거라는 판도


라의 선물이 조금씩 자리잡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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