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 - 2부 9장
본문
감기 - 16 개미의 날개 3
아무도 모르는 이들이 살아가는 곳에 간다면 내가 잃었던 그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떠난 뚜렷한 목적도 없는 유럽 여행. 이주일 동안 프랑크푸르
트와 뮌헨을 여행한 후 열차를 타고 도착한 프라하는 눈이 내리고 있는 겨울 새벽이었
다. 예상하지 못했던 체코의 지독한 한겨울 날씨에 그만 감기가 걸리고 말았다. 고풍스
러운 도시의 이곳 저곳을 다니며 사진을 찍을 거라던 계획과 달리, 프라하에 도착한 그
날부터 예약되어진 프린스 호텔안에서 이틀을 내리 누워만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계획중에 꾸준하게 실천을 하고 있었던 것은 단지 세면기에 오줌 누는 것 뿐이었다. 욕
실에 마련된 세면기에 오줌을 눌 때 마다 난 배설을 통해 살아 숨쉬고 있다는 느낌을 받
을 수 있었다. 새하얀 도기의 굴곡을 따라 힘차게 굽이쳐 흘러가는 뜨거운 소변을 보며,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가장 원초적인 것에서 인간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찾으려 했
던 밀란 쿤테라의 그것을 난 프라하에서 모방하고 있었다. 그 모방을 통해 나는 그가 말
하고자 했던 진실의 허무함과 영혼의 가벼움을 느끼고 있었다.
소변을 누고 고개를 들어보니, 세면기 위의 거울을 통해 병자처럼 초췌해진 몰골에 수
염이 잔뜩 난 내 얼굴이 보였다. 거울은 1년 전 사비나를 닮았던 유지영과 토마스를 닮
아 갔던 내 지난 모습을 비춰주고 있었다. 서로를 증오하며 동시에 동정했던 두 동물이
유일하게 공유할 수 있었던 그 행위에,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반복과 영원한 회귀를 난
직감했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함께 했던 그 순간마다 그녀의 몸에 모든 것을 쏟아 붓고
헐떡거렸던 숱한 시간들이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공허함으로 자리 잡아 갔다. 그
당시 난, 사랑은 내게 과분하고 칙칙한 무거운 짐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렇다면 그녀
와의 행위는 과연 아름다운 가벼움이라고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녀가 말한 그 진
실의 무게는 또 어떤가. 이곳 프라하에 도착한 지금에서야 유지영이 언제나 내게 가식
없는 모습으로 자신의 욕구에 충실했던 것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육체에
게 배신당하고, 잔인한 진실을 보기를 두려워 외면하고 도망쳤던 이는 다른 누구도 아
닌 바로 나였다.
그리고 사비나를 떠나 우연히 테레사를 만난 토마스처럼, 지금 내가 배설한 소변을 한
국에 있는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떨쳐버리고 지울 수 없는 지난 과
거에 이렇게 몸서리를 치고 있지만, 내가 이렇게 살아있음을 그리고 가볍지 않은 그 무
언가가 어느세 내 마음속에 자리잡기 시작하는 것을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이제는
잊었다고 생각이 드는 구역질 나는 냄새를 대신할 그 무엇인가를 손에 쥔 느낌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감기의 몽롱한 기운에 죽어있던 내 성기에 피가 몰려오는 것이 느껴
졌다. 한겨울속에 있었던 내 몸의 일부에서 뜨거운 열기가 피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소변을 본 후 갑작스럽게 발기된 내 성기를 쥐고, 난 그 자리에서 힘차게 자위행위를 하
기 시작했다. 거울속 내 모습뒤로 하얀색 데이지를 손에 들고 있는 그녀의 눈부신 나신
이 떠올랐다. 아직 소변 냄새가 가시지 않은 좁은 호텔 화장실의 세면기에 끈적하고 희
뿌연 내 정액을 쏟아내며, 난 진심으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세면기 배수구를 통해 빠져가는 정액이 내가 감당해야 하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면, 하얀
색 데이지를 들고 있는 그녀는 원형의 시간이 돌아 내가 선택할 수 밖에 없는 메타포였
다.
그녀와 함께 내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고 푼 마음이 몸속 깊은 곳에서 샘솟아 나고 있었
다. 한 차례의 사정후 찾아오는 나른함과 감기 기운에 몽롱해진 몸을 뜨거운 물에 샤워
를 한 후. 호텔 룸메이드가 가져다 준 이름을 알 수 없는 해열제를 먹고 물속을 걷는 것
같은 몸을 끌고 거리를 나섰다. 그리고 한동안 길을 잃고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는 방랑
자처럼 프라하의 거리를 헤메고 다녀야만 했다. 함박눈을 맞으며 프라하 거리를 걷고
있을 때, 골목 한 귀퉁이에 있는 플라워 샵에 진열된 악세사리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
했다. 가지고 있던 카메라로 사진을 몇 장 찍은 후, 가게에 들어가 독일을 떠나며 열차에
서 연습을 한 체코어로 여주인인 듯한 여인에게 인사를 했다.
"째시메에~"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내 인사를 받아 준 후 그녀가 뭐라고 말을 한다. 입국부터 호텔까지 영어로만 말을 하다
가 처음으로 듣는 진짜 체코어에 당황되기 시작했다 . 곤란했다. 내 체코어는 뮌헨역에
서 구입 한 가이드 북을 외운 것 뿐인데 말이다. 교보문고에서 읽었던 유럽 안내책에는
체코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것이 영어보다 편하다고 적혀있었지만, 한국에 돌아가면
그 저자에게 체코에 가 보고 그런 책을 썼는지 묻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만난 체코인들
은 독일어가 전혀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호텔에서 급하게 몇 가지 체코어 -
가령, 지하철역에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가까운 경찰서가 어디에 있나요? - 등을
외워야만 했지만, 의외로 영어가 통하는 곳이 많아 큰 불편함은 없었다. 지금 이 순간까
지는..
"Sorry, Would you speak in English? I"m poor to speak Czech."
양쪽의 어깨를 살짝 올리고 웃으며 다른 곳을 가는 그녀. 체코 여자들을 많이 만나 본
것은 아니지만, 그간 있으면서 느꼈던 이곳 체코인들의 공통점은 귀찮을 것을 상당히
싫어한다는 느낌이라고 할까. 말이 통하지 않았던 탓인지도 모르지만 대답을 하기 싫으
면 고개부터 돌려 버리고 가는 것을 몇 번 경험했었다. 독일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손짓
발짓 해가면서 웃으며 대해주던 것을 보고 온 나로썬 멋적은 마음이 들 수 밖에 없었다.
한동안 쇼윈도우에 진열된 꽃장식들을 구경하다가 꽃잎이 투명한 플라스틱안에 장식되
어진 열쇠고리를 가르키며 그녀에게 말했다.
"What a beauty! May I know how valuable it is? It seems really gorgious.."
그녀가 내 말에 고개를 돌려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인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 사람 영
어 못하는거 아니었나? 알아 듣네, 하는 생각이 잠깐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웃
으며 손가락을 들고 있는 그녀를 보며, 내 머릿속에는 싸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Ten Korun?" (주, 그 당시 원화로 1Korun은 대략 45-50원)
고개를 살랑 살랑 흔든다. 당장 생각나는 가이드 북으로 외운 체코어가 몇개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 가이드 북에서 외운 "가까운 경찰서가 어디입니까?"나 "죄송합니다"를 말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할 수 없이 체코 화폐만 따로 넣어 둔 작은 지갑에서 체코
지폐를 몇 장 꺼내어 보여주며 그녀에게 말을 했다.
"Twenty korun?"
내 말에 그녀가 웃으며, 내 손에 들린 지폐들의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르킨다.
"One Hundred Korun!"
진짜 놀랐다. 체코의 물가를 생각한다면 기껏 1-2천원 정도할 것 같은 물건이 오천원이
훌쩍 넘어가는 가격이라니. 그래도 정말 마음에 쏙 드는 물건이라 다른 곳에 갈 수도 없
었다. 동전 몇 개로 끝날 줄 알았던 나는 한동안 고민을 하다가, 피 같은 100 Korun 지
폐 한 장을 그녀에게 쥐어주고야 그녀는 웃으며 쇼윈도우에서 내가 가르킨 열쇠고리들
을 꺼내 가져온다. 그리고 내게 뭐라고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그녀에게 습관적으
로 고개를 끄떡거려 주자, 그녀는 밝은 웃음을 보여주며 꽃이 그려진 포장지로 포장을
해준다. 호텔 밥값도 5000원을 안 넘는데 꽃이 들어간 열쇠 고리 세트가 그걸 훌쩍 넘다
니 왠지 바가지를 씌인 듯한 느낌은 피할 수 없었다.
앞치마에 손을 닦은 후 웃으며 내게 악수를 청하는 그녀. 밝은 그녀의 미소가 마치 "니가
우리 가게 하루 매상을 채워줬어!"라고 말을 하는 듯 하지만, 이렇게 마음에 드는 열쇠고
리는 독일에서도 찾지 못했었기에 만족하기로 했다. 쇼윈도우에서 빛이 나던 데이지의
꽃잎이 앞으로 새로 출발할 내게 행운의 부적이 되어줄 것 같았다.
"Thank you, Take care.
"@%#$%#$%#@@#$"
프라하에서 한국으로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난 주머니에 있는 작은 포장을 손으로
만져보며 그녀에게 어떻게 첫인사를 하는 것이 좋을까를 고민하며 잠에 빠져들었다. 감
기의 나른함이 온 몸을 감싸기 시작하고, 덕분에 난기류를 헤치고 지나가는 비행기의 울
렁거림도 포근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떠나기 전 공항에서 먹은 해열제가 그제서야 약
기운이 도는 듯 몽롱한 기운에 깊은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난
서울 상공을 날아가고 있을 것이다. 새롭게 출발할 그곳을 향해 난 그렇게 다가가고 있
었다.
* * * * * * *
드디어 한국에 도착해서 캐리어를 끌고 공항을 빠져 나오다가 예전 함께 일을 했던 상
진이가 생각이 났다. 병원에도 가끔 문병을 와서 먹을 거나 축내고 갔던 놈. 그래도 친구
놈이라 선물도 하나 사왔는데, 녀석의 얼굴이나 볼 겸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한동
안 신호가 가더니 수화기 넘어로 녀석의 걸죽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해기획, SP미디어팀 한상진입니다."
"씨발놈아!"
"야이 개새끼야. 핸드폰 좀 사라. 연락이 안돼잖아."
내 목소리를 알아 듣고 욕으로 화답을 하는 녀석. 이 놈과 이야기를 하면 옷을 벗고 목
욕탕에 들어가는 듯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내가 생각날 때 전화하면 녀석이
욕을 하며 받아주고, 녀석이 전화를 하면 내가 욕으로 받아주는 그런 사이. 거친 말을 주
고 받으면서도 끈적한 정을 느낄 수 있다고 해야 할까.
"새끼야, 핸드폰 쓸 일이 있어야 살리던 말던 하지."
"연락할 일이 있었는데.. 니 때문에 죽겠다. 개새끼, 원시인도 아니고 핸드폰 부터 살려!"
"뭐 그러지, 어려운 일도 아니고 앞으로 쓸 일도 있을 건데."
"좀 시끄러운데, 거기 어디냐?"
"나? 지금 귀국했어. 큭큭.."
"개새끼, 혼자 좋은데 갔다 오고.. 지금 좀 바쁘니까 있다가 전화해. 전화 안하면 죽인다!"
"알써, 씨발놈아. 끊어."
어스름이 내리는 저녁에 도착한 나는, 공항 리무진을 타고 도심에 스며들었다. 창밖으
로 스쳐지나가는 서울의 모습이 세삼 새롭게 느껴진다. 달라질 것도 없는 모습이건만,
지난 3주전과 지금의 내가 다른 것 처럼, 이곳의 모습도 무언가 다르게 느껴지는 것 같
다.
오피스텔에 도착해서 가지고 온 짐을 대충 정리하고, 서랍안 깊숙한 곳에 들어가 있는
핸드폰을 꺼내 보았다. 사고가 났을 때의 상황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듯 핸드폰 이
곳 저곳에 긁힌 상처가 몇군데 보인다. 충전기에 핸드폰을 연결하고 샤워를 하며, 상진
이를 만난 후 어떻게 그녀와의 일을 풀어야 할까 생각해 보았다. 의미없는 옆 베드 환자
의 보호자 중에 한 사람으로 다가왔다가, 이제는 남다른 사람으로 느껴지기 시작하는
그녀. 혼자만의 감정이 마치 풀릴 곳 없는 헝클어진 매듭이 되어 몸을 타고 흐르는 뜨거
운 물과 함께 녹아 내리고 있었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몸이 더 떨려오는 것 같았다. 내일은 병원에 한번 가봐야 겠다고 생
각을 하며, 두꺼운 옷을 찾아 껴입고 밖으로 나왔다. 가까운 핸드폰 대리점을 들려 정지
되어 있던 핸드폰을 살리고 상진이의 단축번호를 눌렀다.
"씨발놈아!"
"야이 새끼야. 전화 기다리고 있었잖아. 어디야?"
"방금 오피스텔에서 나왔는데? 회사 근처로 갈까?"
"차도 없는 놈이 무슨.. J에서 기다려. 곧 갈께."
"알써. 오면서 차조심하고.. 씨발놈아."
"눈감고 운전해도 니보다 잘 하거든. 운전 못하는 새끼나 병신같이 차 사고를 내지."
"개새끼.. "
상진이와 내가 이야기를 할 때 가끔 들렸었던 청담동의 조그마한 바, 제이. 몇 가지 술
과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인데 조용한 이야기를 하기에 좋았다. 너무 어린 아이들이
와서 주위에 신경을 써야 하는 다른 곳에 비해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몇 안되는 공간중
의 하나였다. 오랜만에 제이를 찾아가자 친하게 지내던 주인장 형이 아는 척을 하며 다
가온다.
"많이 다쳤었다면서? 소문 났던데.. 지금은 괜찮아?"
"소문이 얼마나 났길래.. 큭큭, 아직 살아있으니까 헛소문이라고 다시 퍼트려줘요."
"어떤 거 줄까? 예전 대로?"
상진이와 이곳에 올 때면 늘 마셨던 것이 윈저 언더락. 하지만 이젠 술을 안마시기로 결
심했기에, 형에게 다른 것을 주문하기로 했다.
"이젠 술은 마시지 못해요. 술 말고 다른 거 되죠?"
"안타깝군. 이젠 내가 주는 술을 못하다니.. 그럼 어떤 거?"
"얼 그레이 되죠?"
"하아, 정말 너무 하네. 여기서 홍차를 주문하다니.. 커피로 안될까?"
"커피도 마시기 좀 그래요. 지금 감기가 심해서 얼 그레이로 주세요."
"오랜만에 와서 까다롭게 굴기는.. 큭큭.. 내가 만들어도 맛이 나올려나? 맛은 보장 못해."
"원래.. 아니예요. 낄낄.."
"내가 만들어 준 거는 다 맛없었다고 할려고 그랬지?"
이야, 이 사람도 이제 눈치가 대단한데.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식당과 술집에서 주인
의 마음을 어지럽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짓이라고 오래전 고참에게 배웠던 터라, 웃
으면서 농담을 던졌다.
"지금까지 만들어 준 건 다 좋았는데.. 훗훗, 칭찬을 안해주니 몰랐나 보네요."
"거짓말 할 땐 다른데 쳐다보고 해야겠어. 표가 너무 나. 큭큭.. "
주인 형이 홍차를 준비하려 간 사이에 담배를 하나 꺼내 물고 피고 있으니, 상진이 녀석
이 2층으로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새끼, 그동안 연락도 안되고.. 뭐 한다고 외국에 나갔던거야?"
"그냥, 머리나 식힐 겸.."
"지랄한다. 머리 식힐려고 외국까지 왜 기어가? 너한텐 월미도로 충분해. 씨발놈아."
"이 새끼가 만나자 마자 지랄하네. 선물 사왔는데.."
선물 이야기를 하자 자세를 고치며 태도가 달리지는 상진이.
"머리 식힐려고 외국도 갈 수 있지. 난 이해해. 그러니까 선물이나 꺼내. 쪼짠한 새끼야."
"씨발놈.. 그런데는 예민해서.."
먹을 것을 바라보는 강아지 마냥 눈을 빤짝거리며 바라보는 녀석의 얼굴이 부담스러웠
다. 난 주머니에서 작은 콜라캔을 꺼내 던져 주며 상진이에게 말을 했다.
"옛다~ 이거 보니까 니 생각나서 사온거야. 세관 통과하면서 쪽팔려서 죽는 줄 알았다."
"뭐야?"
"캔을 양손으로 잡고 비틀어 봐. 안에 니가 좋아하는 거 나올꺼야"
상진이가 콜라 캔을 잡고 한동안 힘을 주고 있을 때, 주인 형이 뜨거운 김이 나는 컵을
들고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상진이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을 보더니 웃으
며 말을 했다.
"여기, 얼 그레이. 감기 심한 거 같은데 따뜻할 때 마셔. 어? 저거 콘돔아냐?"
"어? 형이 어떻게 알아요?"
"아.. 그냥 느낌에...하하하, 보면 딱 알겠는데.."
상당히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는 주인 형. 그래도 상진이를 보며 주문을 받
는 노련함은 빠지지 않았다.
"넌 뭐 마실래?"
"멕켈런 주세요. 쪽팔리니까 괜히 어색하게 웃지 말구요. 바보같잖아요. 형"
"으응.."
아는 척 했다가 바보가 된 주인 형이 돌아가자, 한동안 콜라캔을 만지작 거리고 있던 상
진이가 내 얼굴을 보며 심각하게 말을 했다.
"담배 하나 줘 봐."
"야! 너 아직도 얻어 피냐? 씨발놈.. 자!"
"있었는데 짜증나서 다 폈어. 이 까짓 것 가지고 지랄 좀 하지 마. 얼마 한다고.. 새끼가."
"씨발놈 얻어 피면서 지랄하기는.. 무슨 일인데?"
내가 건내 준 담배에 불을 붙이며 한동안 천장을 바라보는 상진이. 왠지 그가 꺼낼 말이
평범하지 않을 거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상진이는 담배만 피며 천장을 바라고 있
고, 난 말없이 뜨거운 홍차를 마시고 있기를 수 분이 흘렀을 때. 주인장 형이 술잔을 가
져다 놓고 자리로 돌아간다.
"무슨 말을 할려고 그렇게 개폼을 잡아? 한잔 마시고 이야기 하던가."
얼음이 들어간 잔을 한동안 바라보다 반쯤 마신 후 내게 말을 하기 시작하는 상진이.
"예전에.. 내가 선 봤었다고 말한 적 있지?"
"병원에 있을 때 니가 와서 자랑했잖아. 선 보고 다음날 잤다메? 씨발놈, 그런 건 빨라요."
"나.. 결혼 한다."
"뭐! 야?"
필터가 있는 부분까지 담배를 피운 후, 술을 다시 마시기 시작하는 상진이. 얼마 남지
않았던 술이 금방 동이 나고 얼음이 굴러가는 소리가 짤랑 거리며 들리기 시작한다. 심
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녀석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담배갑에서 담배를 꺼내 녀석에서 던
져주고 나도 하나 꺼내 물었다.
"천천히 마셔. 더 시켜 줄께."
"걔가 따라오길래 그냥 잤거든. 걔도 별로 부담없어 하는 거 같아서 말야."
"그런데? "
주인 형이 다시 술잔을 가져오고, 그걸 마시면서 상진이가 어렵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
다.
"한동안 데리고 놀았거든. 걔도 처녀가 아닌데, 나랑 좀 논다고 달라 지는 것도 아니고..
뭐 그랬지. 솔직히 걔 나이에 거쳐간 애가 몇 명인데 안그래?"
고민이 있는 사람이 동의를 바라면, 일단 맞장구를 쳐주고 난 후에 전후 사정을 따지는
것이 좋다는 충고를 들었던 적이 있어서, 일단 추임세를 적당히 넣어 주기로 했다.
"그렇지. 그래서?"
"아 씨발! 생각할 수록 열받네... 담배 하나 더 줘봐."
내가 담배갑 채로 던져주자 한 개피를 뽑아 급하게 입에 물고 담배를 피기 시작하는 상
진이. 평소에 보던 장난기와 웃음이 많던 녀석의 모습이 아니었다. 도대체 그 여자랑 자
고 난 후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 궁금함을 넘어 걱정되기 시
작했다.
"하루는 어떤 남자한테 전화가 온거야. 날 만나제."
"누구였는데?"
"일단 들어봐. 새끼야! 짜증나니까 말 좀 끊지 말고."
적당히 추임세를 넣어주는 것도 귀찮아 죽겠는데, 짜증부터 내는 녀석에게 화를 낼까
하다가 참고 넘어가기고 했다. 일단 무슨 일인데 이렇게 무게를 잡는지 부터 알아내야
했으니까.
"만나보니 걔 아버지인거야. 다짜고짜 나한테 이러더라. 콩밥 먹고 싶냐고 말야. 아 생
각만 해도 좆같아.."
"뭐야?"
"선 보고 자기 딸 건드렸으니 어떻게 할 거냐고 그 영감이 묻잖아. 후우...."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다시 천장을 바라보는 상진.
"그래서, 내가 억지로 강간한 것도 아닌데, 여기서 콩밥이 왜 나오냐고 따졌지. 그랬더
니 날 혼인빙자간음죄로 고소할거래."
"그게 성립되냐?"
"그래! 나도 그래서 말했지. 당신 딸이랑 나랑 서로 좋아서 모텔에서 딩굴었는데, 콩밥
이든 쌀밥이든 어디 하고 싶은대로 하라고 말야. 우리 형도 검찰에 다니니까 어디 법대
로 해보자고 했지. 누가 더 빽이 쎈지 한번 붙어 보자고.. 씨발."
"그래서? "
"그랬더니 내가 다니는 회사에도 소장이랑 탄원서 써서 돌리고.. 아 몰라. 그렇게 됐어.
아 씨발..나 좆됐어! 개새끼야. 나 이제 어쩌냐.."
대충 어떻게 일이 흘러갔는지 더이상 들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상진이의 약점은
고소가 아니라, 회사에서의 승진이었기에 그 부분에서 꼬리를 말 수 밖에 없었을 것이
다. 회사에서 인정을 받아 AE로 올라갈려고 예전부터 꿈을 꿨던 녀석에게 회사에 알린
다는 것은 감방에 갔다 오는 것 보다 더 두려운 일이었을 터. 가장 효과적인 협박이 되었
을게 분명했다.
"걔 아버지 어떤 사람인데?"
"중소기업 사장이래. 대리석 수입해서 뭘 만든다고 하는데.. 나도 몰라."
"그쪽이 바라는 게 정확하게 뭔데?"
"결혼만 해주면 된다고.. 내가 결혼 할 생각이 있었으면 벌써 했지! 아 씨발.."
"그러면, 너네 부모님은?"
말 안듣는 망아지 같은 막내 아들을 힘겹게 키운 이 녀석의 부모님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궁금했다. 평소의 그 분들이라면 절대 가만있지 않으실 분들이신데, 특히
상진이 아버지의 무서움은 내가 잘 알고 있었기에 더욱 궁금했다.
"울 아버지? 큭큭.."
"왜? 호적 파신다고 안해?"
"큭큭.. "
한동안 실없이 웃던 녀석이 잔에 남아 있는 술을 말끔히 마시고 다시 담배 한개를 꺼내
물고 있었다. 몇 모금의 담배 연기를 폐속 깊이 마시고 있던 상진이가 내 얼굴을 쳐다보
며 말을 했다.
"울 아버지.. 나보고 잘 됐다고 하시더라. 후우... 그냥 끝난거라 생각해. 인간 한상진.
좆 한번 잘못 놀려서 인생 종치고 끝난거라 생각하라구. 내가 만날야 할 여자가 앞으로
한 둘이 아닌데.."
그러다가 탁자위에 올려져 있던 콜라캔을 손에 들더니 내게 던지며 말을 했다.
"씨발놈아! 하고 많은 선물중에.. 선물이 콘돔이야? 이딴 건 너나 가져!"
몇 잔 마시지도 않았는데 취했는지 탁자 위에 쓰러져 엎드리는 녀석을 한동안 바라보
다가, 녀석의 옆자리로 가서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냈다. 그리고 주인 형있는 곳으로 걸
어갔다.
"형. 대리운전 아는 곳 있으면 좀 불러줘요."
"상진이 많이 마셨어? 몇 잔 안될 건데?"
주인 형은 어디론가 전화를 하며 눈으로 내게 질문에 대한 답을 요구했다.
"괴로운가 봐요. 몇 잔 안마셧는데 뻗었네요."
"왜? 무슨 일인데..?"
"상진이.. 곧 결혼한데요."
"뭐?"
갑자기 놀라더니 허리를 숙여 엄청나게 큰 소리로 웃기 시작하는 주인 형. 상진이를 조
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는 생각에 입안이 씁쓸해지기
시작했다. 그러게 평소에 좀 진중한 모습도 보이고 그랬어야지.
"큭큭..내가 술을 병채로 줄 걸 그랬어. 큭큭....상진이가 결혼을.. 큭큭 아, 배야."
"상진이는 심각한데.. 형은.. "
근처에 대기를 하고 있었는지, 형이 웃고 있는 사이에 대리운전 기사가 도착해서 바 입
구에서 우리를 찾고 있었다. 상진이를 부축해서 내려와서 지갑을 꺼내고 있는데, 형이
억지로 웃음을 참는 표정으로 말을 했다.
"돈은 됐어. 니 홍차야 뭐 물만 부으면 되는 거고, 상진이꺼는.. 큭큭.. "
"아 형. 제발! 얘 인생이 달린 일인데 그렇게 웃지 좀 마요."
"어엉. 큭큭.. 상진이꺼는.. 큭큭.. 결혼.. 선물이야. 큭큭 "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겨우 말을 마친 주인 형은 다시 입밖으로 세어나올려는 웃음을
손으로간신히 막고 자리로 돌아갔다. 도대체 평소에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었길래 단지
결혼한다는 그 말 한마디에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 대충 이해가 안가는 것도 아니
지만 그래도 친구 녀석인데..
대리 운전기사의 도움으로 상진이를 주차장까지 끌고가서 뒷자석에 눕히고, 그의 집
위치를 대충 말해주었다. 나머지는 녀석이 알아서 할테고. 떠나가는 녀석의 차를 한동
안 바라보다 시계를 보니 밤 10시가 되기에는 30여분이 남은 상황. 이곳에서 병원이 있
는 대학로까지 가면 아마 10시가 조금 넘었거나 비슷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지하철
을 타기에는 갈아 타기 귀찮아서 싫고, 버스는 차가 막힐 것 같고, 택시는 이 시간에 타
면 빨간불이 켜질 때 마다 느리게 갈게 뻔하고, 막상 병원에 갈려니 갑자기 귀찮아졌다.
한동안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지하철에 몸을 싣고 혜화역에서 내려 병원쪽으로 걸어가
며 전화를 걸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듣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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