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 - 2부 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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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 - 무지개 연못 4
상진이와 나는 한참을 말없이 담배만 피워댔다. 한적한 사무실에 지독한 담배냄새
가 가득 베여드는 것을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가 쉴세 없이 내뿜는 담배
연기가 천장을 향해 날아가 구름처럼 모였다가 안개처럼 흩어지는 것을 보며, 이러
다가 화재경보기가 울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내 자신이 우수웠다. 그렇게 엉뚱
한 생각을 해서라도 지금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잊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내 간절한
소망이었다.
"그 사진.. 너랑 유팀장 맞아?"
"응. "
"걔 사진을 누가, 왜?"
"넌 모르겠지만.. 조현석이라는 PG가 있어. 저번 프로젝트 할 때 나 때문에 물 먹은
놈인데.. 걔 밖에 없어."
"그런 놈이 너랑 지영이 사이를 어떻게 알고!"
"그걸 모르겠어. 이 일, 너 형에게 부탁 좀 하자."
상진이의 큰형은 수원지방검찰청 모지청의 과장으로 있었다. 형이라면 내 일을 조
용히 처리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부탁을 하는 내 모습이 가엽고 초라했지만, 지
금은 그런 것을 따질 순서가 아니었다. 망나니 같은 동생과 친하게 지내는 그나마
남자같은 놈이라고 좋아해주던 형이었는데, 아무래도 이 일로 동생과 동급으로 취
급될 것 같았다.
"믿을 만한 사람이.. 너랑 네 형밖에 없어. 부탁할께."
"후우.. 너도 참 더럽게 산다."
"니가 그런 말을 하면.. 내가 섭하잖아."
"지랄한다.. 미친 새끼. 그런 말 하는거 보니 정신은 좀 있나 보지?"
필터까지 다 핀 담배를 꽁초가 벌써 수북해진 커피잔에 밀어 넣은 상진이가 몸을 돌
려 나가며 말을 했다.
"걱정말고.. 형한텐 내가 말해줄께."
"미안하다."
"후우, 니 때문에 큰형한테 무슨 말을 들을지 훤하다. 씨발놈아!"
"큭큭.. 방금 그 말 웃겼다."
"친구 하나 있는게 어째 그리 똑같냐고 그러겠지. 큭큭.. 조급해 하지 말고 적당히
머리나 식히고 있어. 이런 일은 급하게 하면 더 안돼. 난 사무실에 가서 애들이랑 놀
고 있을께. 당분간 니 덕분에 심심하지는 않겠다. 큭큭.."
상진이가 그렇게 돌아가고, 직원들이 돌아올 때 까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핸드폰으로 상진이의 연락을 받은 형의 전화가 왔었고, 그가 무슨 말
을 여러번 했었다는 것은 기억이 난다. 큰형의 질문에 자동응답기처럼 대답을 한 내
게 걱정말라는 말을 하고 통화는 끝이 났다. 한동안 사무실에서 담배만 폈던 것 같
다. 그리고 기억이 끊어졌다. 다시 기억이 나는 것은 퇴근 무렵 기름기 흐르는 모습
으로 돌아온 부하직원들이 사무실에서 담배 냄새가 난다고 잔소리를 했었지만, 굳
은 표정으로 가만히 있는 내 얼굴을 보며 입을 닫는 것만이 기억날 뿐이다.
그렇게 멍하니 있었다. 시간을 죽이며 내 의지와 상관없이 돌아가는 상황에 내 영혼
을 죽임으로써 나름의 도피행각을 벌이고 있었다. 퇴근 시간이 넘어 직원들이 인사
를 하고 하나 둘씩 사라질 때까지도 난 자리에 앉아 멍하니 촛점없는 시선으로 모니
터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책상위의 핸드폰이 다시 울려 왔다. 그 순간까지 난 이
지독한 현기증과 두통이 오히려 달갑고, 또 당분간 지속되기를 처음으로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짙은 안개처럼 내 몸을 둘러싼 이 느낌이 사라진다면, 밝은 태양앞
에 도저히 서있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깨어나지 못하는 악몽처럼 두려웠다.
핸드폰 액정에 뜬 여자 이름은 그녀였다. 오전에 그렇게 통화하기를 원했지만 연락
이 되지 않았던 사람이었고, 동시에 지난 1년이 넘는 시간동안 잠자리를 같이 한 그
녀, 유지영이었다. 그녀도 뭔가 그 사진에 대해 알고 있는게 있을 거라 생각이 들어
핸드폰을 열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좀 만나.."
"어딘데?"
"가끔 술 마시던 데.. 어딘지 알거야."
"30분쯤 후에 도착할거야."
"지금 도착해 있으니까.. 기다릴께."
평소와 다른 그녀의 차분한 목소리가 무겁게 내 마음에 짖눌러 온다. 그녀에게 뭔가
있다는 느낌이 확실하게 전해져 왔다. 주차장으로 내려간 나는 그녀가 있는 곳으로
차를 몰고 가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엔진소리가 유난히 귀에 거슬렸다. 아마도 그건
무엇이든지 트집잡고 시비걸고 싶어하는 지금 내 마음 때문일 것이다.
오래된 턴 테이블에서 흘러나오는 추억의 노래가 무척이나 어울리는 한남동의 지하
술집. 이곳은 그녀와 내가 음악과 술이 고플 때 찾아오던 곳이었다. CDP로는 도저
히 느낄 수 없는 LP만의 튀는 음색을 느끼고 싶을 때 마다 찾던 이곳에서, 그녀가 어
디에 있을지 굳이 애써 찾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와 파트너로 있으면서
이곳에만 오면 그녀는 같은 자리만 찾았고, 그 자리가 없으면 그녀는 망설이지도 않
고 밖으로 나갔던 것도 함께 기억이 났다.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고, 모른척 할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녀와 함께 한 시간만큼 내 몸이 기억하고 있는 오
랜 습관과도 같은 것이었다. 잊어야 할 것들이 머릿속에 남아 있으면 머리가 아파온
다. 아침부터 악몽과 함께 계속되는 두통에 얼굴을 찡그리며 기둥 뒤편 구석 테이블
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홀에서 보이지 않는 그 자리에 역시 그녀가 혼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지하 술
집안은 푸짐한 몸집 만큼이나 포근하게 생긴 주인장이 선곡한, 담배필 때 들으면 좋
은 Stan Gets의 Desafinado가 늘어지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흘러 나오고 있었다.
"왔어? 한잔 줄까?"
"아니. 감기 걸려서 머리 아파."
"그래? 그럼 잔이나 채워줘."
그 말을 하며 내게 빈 잔을 들어보이는 그녀. 벌써 탁자 위에는 두 병의 빈 술병이
놓여 있지만, 이 정도로 취할 여자는 아니니까 하는 생각으로 그녀의 잔에 술을 가
득 부어주었다. 그녀가 앉아 있는 탁자 주위로 술냄새와 함게 진한 장미 향기가 내
코를 자극해 왔다.
"왜 불렀어?"
"훗.. 얼굴에 다 표나. 숨기지 말고 말해."
"뭘? 누차 말하지만.. 아는 척 하지 말라고 했지?"
"사진.. 그것 때문에 궁금해서 나온 것 아냐? 지금 생각하는게 맞아. 내가 올렸어."
이건 또 뭔가. 난 조현석이 사진을 올린 줄 알고 상진이의 큰형에게 말을 했는데.
그 놈과 지영이의 합작품이었던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 조현석이 올린 줄 알았는데.. 너도 나처럼 협박을 받고..."
"그 바보가 나한테 협박을 해? 그 병신이? 큭큭..큭큭큭.... 하하하하"
뭐가 그리 웃긴지 통쾌하게 웃고 있는 그녀. 웃음의 강도가 견디기 힘든지 눈물까
지 흘리며 웃고 있는 모습은 처량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그녀의 웃음은 웃는게 아
니라, 자신의 손목에 날카로운 칼로 찌르며 울부짖는 표정이었다.
"조현석이 끼어 들지 않았다는 거야? 나.. 지금 그 녀석 부숴 버릴 생각인데.."
"그 인간이 끼어들기는 했지만.. 별 것 없어. 사진도 내가 다 가지고 있다가 그거 빼
고 다 지웠고.. 걘 그냥 바보야. 옆에서 바람 불어주면 바람을 따라 날아 다리는 날
벌레 중에 하나야. 그것 뿐이야. 큭큭..그런데 날 협박해? 별 거 아냐. 하하하하. 진
짜 웃겼어."
목이 탔다. 감기에 오른 체온 만큼이나 몸은 차가운 것을 원하고 있었다. 깨끗한 냅
킨이 덮여진 빈 잔에 술을 가득 부워 마시기 시작했다. 화려하게 타오르는 불꽃에
기름을 부은 것 처럼 머릿속의 열기가 더 강렬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뜨거움 만
큼 멍하고 몽롱한 기분에 짜증이 밀려 왔다. 한동안 그녀를 노려보다가 화를 억누르
고 힘겹게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말을 해. 하나도 빠트리지 말고. 내 화가 너한테 향하면.. 죽일 수도 있어."
"별 거 아니라니까. 걱정마.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건 내가 판단할 일이고. 벌써 조현석 그놈 조사 들어갔을 거야. 시간 끌지마. 지
금 마음 같아서는.. 너도 부숴버리고 싶으니까."
"자기는.. 예전부터 행동 하나는 빠르다니까.. 큭큭.."
조금씩 취하기 시작하는지, 혼자 웃는 것이 점점 잦아지기 시작하는 그녀를 쳐다보
고 있으면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망가트리기 시작한건지 궁금해졌다. 그녀의 철가
면에 금이 가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아니, 훨씬 더 오래전 부터 나와 그녀의 만남이
길어질 수록 우리 사이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벽이 생겨나고 있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보이지 않던 그 벽의 실체를 오늘 난 처음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애써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믿었던 그 유리로 만들어진 성벽을 처음으로 만
질 수 있었다. 게임의 법칙에 따라 애써 들어가지 않았던 비밀의 방에는 이렇게 보이
지 않는 유리벽이 우리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장난은 내가 먼저 시작했는데.. 언제든 가지고 놀다가 버릴 수 있는 남자. 내 배위
에서 헐떡거리다가 좆물 싸고 일어나면 끝나는 그런 관계. 지금까지 만나 온 이름도
다 기억못하는 많은 남자들 중에 한 명. 뭐 그렇게 생각했는데.. 자기는 이상하더라구."
"뭐가? 어차피 룰은 룰이야. 지키라고 있는 거고. 그리고 그걸 정한건 바로 너야!"
"그건 자기 생각일 뿐이고.. 어쩌면 오래전 그 놈의 말이 내 머릿속에 남아 있었던
가 봐. 약속은 깨라고 있는 거고, 룰은 어기라고 있다던 그 말. 어떤 놈도 자기처럼
그 룰을 지킬려고 메달리지 않았는데, 내가 한 말 그렇게 지켜주는 거 보면서.. 자기
가 지금껏 날 거쳐간 남자들과 다르게 보이더라구."
마음 속 깊이 묻어두었던 말을 꺼내서 일까. 목이 마른 듯 손에 들고 있는 술잔을 급
하게 마신 그녀는, 내 눈을 한동안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때 부터 자기를 볼 때 마다 이상했어."
그리고 다시 자기 손으로 잔을 채워 또 한 잔의 술을 마시는 그녀. 그런 그녀의 모
습을 보며 나도 술잔을 채워 마시기 시작했다. 어느세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에는
내가 선물해 준 반지와 함께 버지니아 슬림이 불이 붙은 채 들려있었다. 진한 장미
향기가 담배 냄새와 어울러져 내 코를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느다란 담배
연기가 길게 이어지고 있는, 자신의 손에 있는 반지를 눈을 떼지 않고 한동안 바라
보고 있었다.
"이 반지. 자기가 이 반지를 선물했을 때. 나 사실 자기를 비웃었어. 이 남자도 별 수
없구나. 냉정한 척 하고, 제법 사내다운 척 하지만 결국 내 몸뚱아리 노리고 있는 숫
컷들이랑 별반 다를게 없구나.. 그렇게 실망했었어. 그래서 비웃었지. 우리 룰도 그
래서 만든거고.."
그녀가 손에 든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새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을 때, 나도 주
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후우..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자기를 비웃었는데, 조금 불안해
지더라구. 자기와 이런 생활이 매일 이렇게 이어지다가 이 룰이 끝이 났을 때 내 모
습을 상상하는게 불안했었어. 거의 2년이지. 우리가 그렇게 시작한게.."
"2년.. 벌써 그렇게 됐나..."
"내가 자기를 거절하지만 않으면.. 우리 사이는 계속될거라, 그렇게 믿고 싶었거든."
나는 1년이 조금 넘었다고 생각을 하고, 그녀는 2년이 다 되어 간다고 생각하는 것
이 좀 우수웠다. 이런 작은 차이가 여자와 남자의 차이라고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작은 차이들이 조금씩 모여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을 만들 수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
이 일어났다. 1년이면 어떻고, 2년이면 어떤가. 그 차이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이젠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자기한테 길들여졌다고 할까? 나도 모르게.. 그리고.. 오기도 생기고.."
"무슨 오기가 생겨? 그런 건덕지도 없었는데.."
"뭐랄까.. 내가 어떤 여잔지 뻔히 알면서, 아무런 말도 안하고 나 만나주는 자기 볼
때 마다, 그냥 화가 나고 미칠 것 같고, 그러더라구. 그래, 자기한테 욕심이 생겼어.
그래선 안되는 줄 알면서.. 그게 웃겨서 자기한테 실망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
잖아."
"지랄 한다."
"자기가 좀전에 그랬지? 날 부숴버리고 싶다고. 딱 그 심정이 들더라. 나한테 헤어
지자고 말했을 때.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만나자고 했는데 거절하는 걸 보니까 부
숴버리고 싶었어. 나도 나한테 그런 감정이 생기게 될 줄은 몰랐는데.. 덕분에 며칠
동안 미친 것 처럼 잘 웃기는 했어."
"그래서 조현석 그 놈에게 연락하고...?"
"뭐 그렇지. 그 놈도 한번 대주니까 좋다고 난리더라구. 큭큭.. 단순한 새끼. 그 새끼
가 가져간 카메라엔 내 발 사진만 잔뜩 찍혀있으니까 뭐 걱정마. 큭큭.. 하여튼 걘
그냥 지가 잘난 줄 착각하는 불쌍한 병신이야."
또 한잔의 술을 채운 후, 난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동안의 신
호음이 간 후 중후한 목소리의 남자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형님, 저 우영입니다. 예."
한동안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나 싶었는데, 바로 알아듣는 것을 보면 그에게 이런
일은 일상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이쯤에서 없었던 것으로 하는 것이 형
에게도 편할 터였다.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해주고 바쁜데 괜한 부탁을 했던 일은 죄
송하게 되었다고 마무리를 지었다. 조작가가 끼어든 죄값을 받게 하고 싶은 생각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한 댓가로 내 이름이 퍼지는 것 또한 묵과할 수는 없었다.
서로 겉치례 인사를 한 후 핸드폰을 끄고 그녀를 바라보니 묘한 표정을 지으며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봐? "
"아냐. 그런데 누구야?"
"말했잖아. 날 건드리면.. 됐어."
"왜? 나 부숴버리고 싶다면서.. 근데 왜 그만뒀어?"
또 다시 담배 하나를 꺼내 물고 궁금해 하는 그녀에게 대답을 해주었다.
"어떻게 돌아간 일인지 다 알게 됐으니.. 이쯤에서 접어야지. 너하고 나하고 어차피
남이니까. 그리고 나도 잘한 것 하나 없으니까 이번은 넘어 갈께. 앞으로 눈에 거슬
리면 오늘같은 일, 다신 없을 줄 알아. 1년 넘는 시간을 생각해서 참는거야. 알아?"
"큭큭.. 항상 그렇게 편한대로 생각하지? 자기 맘대로 결정하고, 자기 뜻대로 되는
일이 세상에 얼마나 되는 것 같아? 바람따라 날아다니는 건 자기도 마찬가지 잖아.
안그래?"
온 몸을 파고드는 불쾌한 기분에 그 말의 끝을 듣지도 않고 일어서서 돌아서는데,
그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거침없이 파고 들었다. 그리고 그 말이 날 움직
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마치 어릴적 즐겨했던 놀이처럼, 얼음이 된 것 마냥 난 몸이
굳은 채 서서 그녀의 다음말을 기다려야만 했다.
"나 임신했었거든.. 알아?"
임신했다는 말이 아니었다. "했었거든.."이라는 말에서 난 그 뜻을 알아버리고 말았
다. 얼어붙은 몸을 힘겹게 돌려 쳐다 본 그녀의 얼굴은 장난기가 가득한 천진한 어
린 아이의 표정을 닮아있었다. 그녀는 지금 그 어릴적 놀이를 내게 강요하고 있었
다. 술기운인지 머리가 어지럽고 화가 나서 미칠 것만 같았다.
"나 목 아파. 앉아. 듣고 싶을 건데.. 계속 서 있을꺼야?"
"야이... 후우.. 참자 참자. 후우... "
거친 내 손길에 의자가 밀려나며 거친 마찰을 일으켰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
가 없었다.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목적도 목표도 없는 분노가 내 모든 신경
을 억누르고 있는 탓이었다. 주먹을 폈다 쥐었다가 하며 머릿속에 가득찬 분노를 억
지로 가슴속 깊은 곳으로 밀어 넣고 있느라 어지러움증이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그
런 답답한 마음에 다시 술잔에 잔을 채워 급하게 마셔대기 시작했다. 몸에 퍼지기
시작하는 분노의 열기를 차가운 술잔으로 식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술잔이 거듭될
수록 그 열기는 줄어들기는 커녕 점점 더 커져 폭발할 것 처럼 급격해지기만 했다.
타오르는 불꽃속에 던져진 차가운 기름통과 같았다.
"천천히 마셔.. "
그녀의 말에 신경질 적으로 잔을 탁자에 내려치며 말을 했다.
"씨발.. 니가 그 말 할 자격이라도 있는 줄 알아?"
"왜? 재미있잖아. 안그래?"
"넌 그냥 미친거야. 나도 미쳤던 거고.. "
한번의 긴 한숨을 내 쉰 후, 나오지 않는 질문을 억지로 목구멍 밖으로 끄집어 냈다.
"그 아이, 나야? 아니면 김재준이야?"
"훗, 누군지도 알고 있었어? "
"니가 나 골탕먹일려고 조현석이랑 잤다는 건 방금 말을 해서 안거고, 그 외에는 대
충 누군지는 알아. 관심을 안가진게 아니라.. 내가 신경쓸 수가 없는 문제니까 말을
안한거야. 그게 룰이고. 네가 처음부터 그런 룰을 만들지 않았다면.. 애써 그럴 필요
가 없었어. 그 룰도, 내가 너한테 반지 준 날, 니 맘대로 정한 거 아냐! 날 그렇게 만
든건 바로 너잖아!"
"나만 바보 된 느낌이다. 그치? "
"넌 원래 병신이야. 미친년이고. 넌 그걸 이제 알게 된 것 뿐이야. 다시 묻는데.. 그
아이 누구야? "
"후훗.. "
내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웃으며 내 술잔에 잔을 채워주는 그녀. 그리고 자신의 잔
도 채운 후 내게 잔을 내밀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내쪽으로 쏠리는 그녀와 나의 거
리 만큼 장미 향기가 다가왔다가 물러가는 것이 느껴진다. 그 지독한 향기에 머리가
어지러워 졌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지겨운 두통에 모든게 귀찮기만 했다. 마치 떨쳐
버릴 수 없는 악몽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었고, 깊은 수렁속에 빠져있
는데 누군가 와서 구해주기를 바라는 심정이었다.
"후후, 원샷해. 그럼 말해줄께. "
한동안 그녀의 얼굴을 노려보다가 손에 들고 있는 술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어차피
뜨거워진 머리를 식히기 위해선 체온보다 낮은 온도가 필요했었다.
"후우.. 말해봐. 누구 애야? 그놈이야? 나야?"
"누구 아이기를 바래? 훗훗, 어차피 아이는... 내가 만나자고 한 그 날, 지워버렸는
데. 이미 지난 일이야. 더이상 누구의 아이인지 중요한 것도 아니고. 안그래? "
"너!..."
"내가 산부인과에서 다리 벌리고 누운 게 한두번도 아닌데.. 훗훗.. 그리고 그날, 안
만나 준건 바로 자기잖아?"
"누구야!.."
내 스스로의 감정에 못이겨 감미로운 째즈가 흐르던 술집안이 떠나갈 정도로 큰 소
리를 내고 말았다. 그리고 그 말을 하며 또 한 잔의 술을 들이켰다. 입안이 쓰게 느
껴지기 시작하고 두통이 머리를 쪼갤 것 처럼 느껴졌다. 더이상 마시면 안되는 줄
알지만, 지금은 술과 담배. 이 두가지 밖에 믿고 의지할 것이 없었다.
"왜? 책임이라고 지게? 낳아서 줄 걸 그랬나?"
"내 아이였냐? ...씨발.."
이 순간 어머니가 떠오른 것은 아침에 꾼 그 악몽 때문일 것이다. 악몽같은 이 지독
한 상황이 그 꿈과 오버랩되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입대를 앞둔 내 나이 스무살의
저녁. 아들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눈 한잔의 술에 어머니는 눈물과 함께 지난날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그 고통스러웠던 기억의 편린을 자신의 손으로 하나씩 끄집어
내어주었다. 아들을 위해선 모든 것을 줄 수 있다던 가녀린 여인은 자신의 하나 밖
에 없는 아들을 위해 오래전 딱지가 앉은 그 상처에 스스로 생채기를 내고 있었다.
피보다 진한 눈물과 비명보다 고통스러운 소리없는 눈물은 그녀를 향한 말이었다.
밤마다 꾸는 악몽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을 때. 추락하는 자에게 남겨진 그 끔찍
한 흉터는 바로 내가 태어나게 한 원인이었다. 그것은 내가 어른이 된 후에 알게 된
씻을 수 없는 악마의 문신처럼, 어머니를 지옥의 바닥에 내동댕이 쳤던 포악한 숫컷
의 모습을 닮아가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 저주받은 피는 이미 내 몸의 반을 차지하
고 있었다. 내가 어쩌지 못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날 때 부터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피로 이어지는 영혼에 세겨진 낙인이었고, 속죄할 수조차 없는 원죄였다.
그렇게 술잔이 여러 잔 겹쳐갈 즈음, 반드시 알아야 하는 내 출생의 비밀에 대한 그
오랜 궁금증을 난 깊고 어두운 내 가슴속에 묻어둘 수 밖에 없었다. 다시는 꺼낼 수
없는, 내 자신조차 찾을 수 없는 망각의 저 편 넘어로 감추어 둘 수 밖에 없었다. 쓰
디 쓴 술 한잔과 함께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의 모습은 자신의 의지도 사랑도 아닌,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날개가 뜯겨나가 지옥으로 추락한 천사의 모습이었다. 세상
을 증오하지도 누군가를 원망하지도 못하는 어리석은 그녀는, 하나 뿐인 자식의 모
습을 보며 살아가야 하는 단 하나의 이유를 그렇게 내 앞에서 눈물과 함께 찾고 있
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때가 어머니와 마지막으로 마신 술 잔이 되었다.
그리고 그 지워지지 않는, 저주받은 악마의 문신처럼 내 몸에 세겨진 피의 굶주림이
오늘 이 자리에 내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한줄기 빛 조차 보지 못하고 사라
진 내 더러운 피가 이어진 생명체는, 오래전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 살리고자 했던
피투성이의 어머니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렇게 꺼져간 나약한 촛불에서 난 출생
의 기억을 떠올렸으며, 그것은 내가 지금껏 숨을 쉴 수 있는 존재의 이유이기도 했
다. 주체할 수 없는, 지금껏 억눌렀던 모든 포악한 악감정이 한꺼번에 분출되어 내
몸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 더럽고 탁한 공기에서 벗어나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었
다. 그러면 모질고 길게 이어지는 이 악몽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일 사표 낼테니까, 회사에서 니가 무슨 짓을 하던 상관없어. 다만.. 또 다시 내 앞
에 니 몰골 들이밀고 나타나면.. 각오해. 내가 지금까지 회사에서 여직원 한두명 건
드린 건 아니지만.. 넌 그중에 최악이야."
"그럼, 자기는 최악이 아니고? 훗훗.. 자기도 진짜 가증스럽다는 거 알아? 응? 애는
나 혼자 만들었어?"
"그래 씨발. 그 생각하면 미치겠으니까 다신 만나지 말자고. 나도 내 책임지고 떠난
다고. 됐어?"
"자기는 내가 왜 만나자고 했는지 그건 궁금하지도 않아?"
"사람 가지고 노는 거 좀 그만해! 이 좆같은 년아!!"
우리들이 싸우는 소리에 카페의 사람들이 쳐다보는지 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 말을 하고 난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녀가 날 만나자고 했던 진짜 이유가 무엇인
지 그건 더이상 내게 중요한게 아니었다.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했던 그 더러운 피
가 지금도 내 혈관속을 흐르고 있다는 것을 느낀 것만으로도 토할 것 같았다. 얼굴
도 모르는 그 숫컷을 내가 닮았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그곳을 뛰쳐 나왔다. 지하에서 뛰쳐나와 주차장으로 가는 동안에도 내 몸을
감싸고 있는 역한 장미 향기는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아니, 그 보다 더한 악취를 신
선한 공기를 들여마시고 서야 느낄 수 있었다. 그 악취는 바로 내 몸에서 나는 냄새
였었다. 터질 듯한 심장을 억누르고 차에 열쇠를 집어 넣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것은 주차장에 주차된 내 차를 끌고 오피스텔로 향했던 기억이 전부였다.
내가 다시 눈을 뜬 것은, 그 날로 부터 한달이 지난 중환자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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