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 - 2부 4장
본문
감기 - 무지개 연못 2
기획본부에서 전 부서 팀장들이 모인 종합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난, 드디어 몇 달간의
고생에 조만간 마침표를 찍을 수 있게 되었다. 부서의 모든 팀원을 모아 놓고, 느슨해
질 수 있는 긴장감을 다시 한번 채찍질했다. 이 시기에 발생되는 작은 실수는 결코 돌이
킬 수 없는 결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만큼의 극도의 긴장
감이 사무실을 무겁게 짓누르며 지나가고 있었다.
"드디어 이제부터 Final Step입니다. 지금까지 각자가 이어온 이 긴장감을 풀지 말고,
조금만 더 기운을 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광고인이 되고자 한 그 순간부터
우리는 이미 평범한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AD라는 두 글자를 위해 피를 말리는
고통을 웃으며 즐길 수 있는 사람."
주위에 날 바라보는 팀원들의 얼굴을 하나씩 훑어 본 후 나지막히 말을 했다.
"그런 존재가 되기 위해 스스로 찾아 걸어 온 길입니다. 자 그럼, 연말 대상을 위하여! "
내가 손을 뻗으며 탁자 위에 놓자, 팀원들이 하나 둘씩 내 손위에 손을 올리고, 이윽고
힘찬 함성과 함께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 마지막 주가 되면 어김없이 하게 되는 우리 부
서만의 전통적인 응원. 자칫 극도로 올라간 긴장감으로 인해 빠질 수 있는 경색을 많이
줄여주는 역활을 해주고 있는 행동 중에 하나였다.
아침 미팅을 끝내고 마케팅본부에 보낼 보고서를 점검하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 왔다.
"날세.."
"예, 기획본부장님."
"잘 되고 있나? 자네가 보내준 걸 검토해보니, 이번 Area안에 경쟁사가 몇 개있어. 만
약, 우리 광고가 밀린다는 소리가 나오면.."
"예, 특히 Billboard에 신경을 써서 그 문제도 무리없이 소화할 수 있습니다. 다음주
Work가 나오면, SP미디어팀과 한 곳에 집행해보고 결과보고 드리겠습니다."
"기대하네."
"예, 감사합니다. 본부장님."
책상위에 벌써 몇 잔의 커피잔이 겹쳐지기 시작하고, 담배피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
질 무렵 전화가 또 걸려왔다. Final Step이 다가오면, 내 전화기는 내려 놓고 있을 때 보
다, 어깨에 걸쳐놓고 있을 때가 더 많았다. 회사내 구석 구석 포진하고 있는 각종 부서
로부터 확인 전화가 쉴세 없이 이어지고, 내 책상위 전화기는 지금도 연결램프를 깜빡이
고 있었다.
"나야, 이 놈아.."
"씨발..왜? 바빠. 끊어!"
"다음주까지 내가 걱정 안해줘도 되지? 씹새야."
"니가 걱정하면 될 것도 안돼! 만약 다음주에 내가 출근 안하면 자살한 줄 알아. 씨발."
"우리 애들 지금 몸이 근질거려서 난리났어..."
"이 나쁜 새끼! 내 새끼들은 지금 코피 터져서 죽어가고 있는데. 개새끼.. 끊어!"
"큭큭..담주 현장에서 보자, 수고해라. 씹새야."
"알써. 씨발아."
SP미디어팀의 팀장 한상진. 단지 나이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친구가 된 놈이었다. 그는
다음주 설치까지 문제가 없는지 확인전화를 한 것이다. 녀석의 딴에는 기분을 풀어줄려
고 한 전화인지 모르지만, 이런 통화까지도 내 속을 까맣게 태워버리고 있었다. 1분, 1
초가 흐를 때 마다 내 몸에서 한 방울씩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든다. 이럴 때는 차라
리 전화 코드를 뽑아 놓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을 정도로 긴장감이 최고치에 달하게
된다. 몸속에 과도한 아드레날린이 흐르는 듯한 느낌이다.
책상위의 전화기에서 또 한번의 벨이 울린다. 사람의 피를 말리는 이 전화기를 던져 버
릴 수도 없고, 벨이 울릴 때 마다 로이로제가 걸릴 것 같은 기분이다.
"기획 2팀장 유지영입니다."
"예, 어쩐 일이신지요?"
바빠죽겠는데 뭔 전화를 한 건지, 뻔히 서로 바쁜 것 알 때는 전화를 안해주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다는 것, 그녀가 모르지는 않을텐데 하는 생각으로 대답을 기다렸다.
"Final Step 마무리 이상없는지 확인차 걸었습니다."
"현재로선 별 문제 없습니다. 수요일까지 Output 나오고 다음주 바로 설치. WS는 걱정
마세요."
"칼라는 문제 없겠죠?"
칼라라고 말을 하면 그녀와 나의 암호로 비상계단을 말한다. 바쁜데 왜 만나자고 하는
지 모르겠지만, 일단 그녀가 먼저 말을 꺼내면 중요한 일이 따로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회사 각 부서 분위기가 어떤지는 그 일을 주도하는 기획실의 그녀가 모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비상계단보다 차라리 주차장이 더 좋았다. 엘리베
이터를 기다리는 시간도 아깝다고 비상계단을 다람쥐 챗바퀴 돌듯이 뛰어다닐 사내 직
원들이 있을 터였다.
"제가 최종 점검했으니 이상없습니다. 다만 에디트가 조금 남아 있습니다. 전 잠시 자
리를 비워야 할 것 같아서, 자세한 것은 나중에 말씀드리지요."
내가 우리가 쓰는 암호인 에디트를 말하자 그녀가 별다른 말없이 대답을 한다. 잠시 후
에디트를 뜻하는 주차장 그녀의 차로 가면 될 것이다.
"예, 그럼 그 문제는 그렇게 가닥을 잡고 저도 자리를 비워야 하니, 나중에 검토해서 말
씀드리지요."
전화를 끊고 잠시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며 밀려오는 졸음을 쫒은 나는, 주차장으로 내
려갔다. 그녀가 차를 주차하는 곳은 항상 CCTV의 사각지대인 지하2층 기둥 뒤편 구석
이었다. 언제 내려온 건지 주차장 구석의 노란색 뉴비틀에 사람이 타고 있는 것이 희미
한 음영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주위를 훑어 본 후 그녀의 노란색 뉴비틀 조수석에 몸을
실었다.
"바쁜데... 왜?"
"나 OD 다음날 월차거든. 우리 잠깐 만날까?"
그러면서 작은 핸드백에서 버지니아 슬림을 꺼내 불을 붙이는 그녀. 실내공간이 작은
뉴비틀의 차안에 매케한 담배 냄새가 퍼져나가기 시작하자, 나도 와이셔츠에서 한 개피
의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연기를 빨아 들였다. 윈도우를 내리지 않은 작은 차안에 두
명이 한꺼번에 담배를 피자 이내 차안은 새벽안개가 내려온 듯이 뿌연 장막을 드리워
간다. 그 안개의 두께 만큼이나 급속히 채워지는 니코틴의 영향 때문인지, 수 십잔의 커
피를 한꺼번에 마신 것 처럼 머리가 잠시 어지러워진다. 안개속에 헤메이는 듯한 몽롱
함이 내 몸을 무겁게 감싸기 시작한다.
"그래? 음.. 난 이젠 슬슬 우리관계 정리하고 싶어. 이러고 지낸지 벌써 1년 넘었어. 시
작할 때 딱히 언제까지 라고 말은 안했지만.. 이렇게 오래 만나는 것 서로 바람직하지
않잖아."
내가 한 말이 의외였는지, 내 얼굴을 한 동안 바라보던 그녀가 말을 했다.
"왜? 우린 아직 별 문제 없었잖아."
"그 문제라는게 꼭 겉으로 드러난 문제만 없으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면 안돼. 그리고
슬슬 지겹기도 하고. 우리 애들은 집에서 쉬지도 못하고 코피 터져가고 있는데, 팀장이
라는 내가 계집질이나 하고 있으면.. 큭큭, 요즘은 딸 칠 시간도 없고 생각도 없어."
"훗.. 넌 언제나 일이 우선이지?"
그러면서 그녀의 폐포를 가득 채웠었던 담배 연기를 내 얼굴에 길게 내뿜는 유지영. 그
녀의 그런 말과 행동에 짜증이 내 몸속에서 조금씩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넌 언제 그런거 아닌 줄 알았어? 일 때문에 결혼 안할거라고 한건 바로 너야. 그리고.."
"뭐? 말을 할려면 똑바로 해. 중간에 끊지 말고!"
"너하고 나하고 이젠 끝내자. 뭐가 씨발 만나기만 하면 붙어먹고 헤어지는데.. 하고 나
면 허탈해져서 미치겠어. 기분 좆같아. 이건 사랑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아냐. 우리가
같이 있는건 도대체가 아무런 의미없는 행위일 뿐이잖아. 배고프면 끓여먹는 라면처럼
당장은 허기를 면할지 모르지만.."
"이제 슬슬 다른 여자 만나고 싶어진건 아냐?"
그때 난 처음으로 봤다. 그녀의 얼굴에 무표정함 외에 묘한 그 어떤 표정이 생기는 것
을, 그리고 지금까지 그녀를 만나오며 처음으로 그녀가 늘 얼굴에 쓰고 있던 두꺼운 가
면의 한 구석에 금이 가는 것을 그렇게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서로가 감정이 없이 섹스
만 하자고 처음 제안을 한 것은 그녀였었다. 그런데 지금처럼 이런 표정을 지으면 부담
스럽다. 무언가 그녀를 변화게 한 것이 틀림없이 있었다. 그녀의 표정을 보자 물로 씻어
낼 수 없는 기름때가 몸에 묻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변화의 원인이 무엇인지 난 알
수 없지만, 깨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그녀의 철가면이 마치 연약한 유리가면 처럼 금이
가게 한 그 놀라운 변화가 날 두렵게 만들었다. 짙은 안개속을 걸어가다 발밑의 수렁에
빠져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의 바닥으로 몸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이거 왜 이래? 너하고 나하고 무슨 사랑이라도 있었던 거야? 무슨 웃기지도 않는.. 야,
너하고 나하고 1년 좀 넘게 이 짓거리 하는데 너, 나 빼고 남자 바뀐 게 한 두번이야? 무
슨 여자애가 한번에 남자 두셋은 만나야 만족을 하냐? 그리고 중요한 건.. 쿨하게 놀자
고 하면서 별 놈에게 다리 벌려주고 다니는 건 바로 너야. 내가 너 만나며 딴 년 만나든?
여자는 모르겠는데.. 난 피곤해. 다른 여자 만나고 싶어진 게 아니라, 니가 지겨워진거야.
아무런 감정없이 반복되는 사랑도 없는 섹스, 솔직히 자위행위보다 조금 나은 것. 그 정도
아냐? "
"큭큭..큭큭큭큭..."
작은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내려진 윈도우 밖으로 담배를 던지며 스산하게 웃
음을 흘리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그녀가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
가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의 그 근원이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그건 내가 신경쓸 부분이
아니었다. 그건 서로가 암묵적으로 지켜야 할 최소한의 룰이며, 이 내기의 근간을 이루
고 있는 핵심이기도 했다. 그리고 게임의 법칙이었다.
"왜 웃어? 내 말이 웃겨?"
"그게 아니라.. 재미있는 생각이 들어서.."
"뭐? 너도 똑바로 말해. 중간에 말 끊고 궁금하게 만들지 말고."
"그런게 있어. 나중에 말해주던가 할께. 내가 기억을 하면 말이겠지만.."
"중요한게 아니면 그럼 차라리 말도 꺼내지도 마. 난 간다. 너도 일해라. 쫑파티때 보자."
차문을 열고 나갈려는 내게 그녀는 돌아보지도 않고 말을 했다.
"나 그 날 약속 있어."
차 문을 닫으며 열려진 창을 통해 그녀의 옆 얼굴을 보며 말을 했다.
"훗.. 그런데 왜 날 만나자고 했어?"
"글쎄..그 이유가 뭘까? 궁금하지 않아?"
"사람 가지고 노는 것 이젠 지겹지도 않아? 씨발 몰라. 하지만 이건 명심해. 너와 난 지
금 이 순간부터 남이야. 우리가 시작할 때 정한 룰은 한쪽이 거부할 때 까지였어. 그 룰
을 정한 건 바로 너였고. 아무리 여자라지만 나이 서른이상 먹었으면 한번 한 말은 지킬
거라... 믿는다."
"그거 알아? 나중에 놀라게 되는 건... "
"뭐? "
대답을 하지 않고 차시동을 걸고 어디론가 떠나는 그녀. 주차장에 혼자 남겨진 난, 다
시 담배 하나를 더 꺼내 입에 물고 피기 시작했다. 그때 분명히 차시동과 함께 묻혀진
그녀의 입술은 무언가 내게 말을 했었다. 아니, 말을 할려고 했었다고 하는게 더 정확할
지도 모른다. 조금전까지 차가 있었다는 흔적도 남지 않은 지하2층의 주차장에서 난 그
녀가 떠나간 후에 남겨진 진한 허탈함과 알 수 없는 떨림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의 내
기분은 무언가 잃고 나서, 그것이 무엇인지 조차 알 수 없을 때의 기분과 비슷했다. 그
녀에게 전화가 오고, 그리고 혼자 남겨진 지금까지 내 몸에 흐르고 있는 감정의 찌꺼기
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이었다.
"씨발, 정리하고도 더러운 기분이... "
오너에게서 최종 승인이 떨어지고 광고는 각종 미디어를 등에 업고 노출에 들어갔다.
리서치의 분석에 의하면 최초 기획보다 다소 높은 반응이 나오고 있었다. 성공적인 광
고를 자축하기 위해 기획본부의 여러 부서가 모두 모여 단체 회식을 했다. 서울의 한 식
당을 통채로 빌려 지난 몇 개월간의 고생을 위로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축하한다며 돌리는 여러 잔의 술을 연거푸 마신 나는, 감기가 올 것 처럼 몸이 떨리는
것을 느끼고 식당앞 주차장에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이렇
게 들여마시는 담배 연기는 마치 오랜 전투후에 찾아오는 달콤한 휴식과 명예로운 훈장
같은 느낌이었다. 지난 시간, 내 몸을 지배하고 있던 강렬했던 긴장감이, 각종 네온사인
으로 밝혀진 도시의 밤하늘 속으로 담배연기와 함께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자 그 공허한
빈자리에 감기가 밀려 올 것 같았다. 조금씩 몸이 떨려왔다.
주차장쪽 유리창을 통해 웃고 떠들며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 틈으로 예전
날 거쳐갔었던 여직원들의 모습도 간간히 보였다. 얼마전 정리를 한 그녀의 모습은 보
이지 않았다. 오늘 그녀는 약속이 있다고 했으니 어디선가 광란의 몸짓을 하고 있겠지.
영어로 비명을 질러가며 나에게 했던 행동을 내가 모르는 또 다른 남자에게 하고 있을
것이다.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저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쇼윈도우를 바
라보는 느낌이라고 할까. 내가 즐겼던 여자를 다른 남자가 접근할려고 작업을 거는 모
습을 이렇게 지켜본다는 것은, 발정난 원숭이가 가득한 동물원 우리를 보는 것 같은 기
분을 들게 한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그녀들을 먼저 거쳐갔었던 다른 남자들도 가지고
있는 생각일테다. 우리는 도시라는 동물원속의 발정난 원숭이들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SP미
디어팀의 팀장 한상진이었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한참 불렀잖아. 씹새야."
"아? 응,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아니긴.. 씨발. 쟤도 건드렸지?"
"훗, 너도 아닌 척해도 했다는 거 대충 알아. 다 그런거지. 너랑 나랑은 구멍동서야. 새끼야."
"쟨?"
"응?"
상진이가 얼굴로 가르키는 곳을 보니, 술에 취한 건지 취했다고 연기를 하는 건지, 어
색한 비틀거림으로 한 남자와 주차장을 빠져나오는 낮익은 여직원이 눈에 보였다.
"쟤, 지금 저기 한 놈이랑 밖에 나가는 저 얘."
"저 새끼가 새로 들어왔다는 그 CW아냐? "
"말 돌리지 말고.. 어때?"
"한 6개월 만났나? 그 후 별로 소식없었는데.. 이번엔 신참 CW를 물었군. 큭큭.."
묘하다. 차를 타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두 남녀를 보니, 딱 그 말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저 모습은 어쩌면 지난날의 내 모습일 것이다. 수백 수천
만의 인구가 살고 있는 이 거대한 도시에서 안주할 곳 하나없는 인간이 마지막 지푸라
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집요하게 파고들 수 있는 그것에 메달리고 있었을 그때의 내 모
습이었다. 지금 사라진 그 둘의 모습은 단 한순간의 쾌락에 살아있음을 증명할 수 있던
그 시절의 내 일그러진 자화상이기도 했다.
또한 안식을 원하는 구도자가 타락한 성배를 처음으로 들었던, 어둠속에 영혼을 판 그
순간과 같았다. 타락한 성배의 저주받은 피를 마신 나는, 영원히 채울 수 없는 공허한
목마름에 그렇게 서서히 말라가고 있었다. 뜨겁고 달콤한 그 피는 언제나 끝없는 갈증
으로 내 몸을 옥죄어 왔다. 타는 듯한 갈증에 몸부림치다 못견뎌 내 몸에 흐르는 피를
마시던 난, 이제서야 그 모질고 끈질긴 사슬을 끊고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앞에서 내 몸
을 산산히 태워버리고 싶었다. 단 한순간만이라도 내가 살아있음을 밝은 태양빛 아래에
서 증명하고 싶었다. 그건 지난 날에 대한 속죄가 아니라, 가질 것 없는 자가 선택하는
마지막 자위이며 동시에 자살이었다.
다 펴서 필터만 남은 담배를 버리고 새 담배를 하나 꺼내고 있으니 한팀장이 자신도 하
나 달라고 한다.
"하나 줘."
"넌 니꺼 펴. 새끼야."
"씹새야. 식탁위에 올려 놨는데 어떤 새끼가 가져갔어. 씨발. 내 성질 아는 우리 애들은
아닌데.. 잡히면 죽었어. 씨발. 가져갈 게 없어서 담배를 가져가. 그것도 내껄!"
"큭큭..병신새끼. 니꺼니까 가져가지. 옛다."
둘이서 담배를 나눠 피고 있으니 한동안 무거운 정적이 이어진다. 그러다 한팀장이 내
게 고개를 돌리며 말을 했다.
"유팀장과 사귄다는 말이 있던데.. 맞아?"
"누가 그래?"
"그런 소문이 조금씩 나고 있던데.."
"좆까라 그래. 정리한 게 언젠데.. 벌써 백만년은 지났어."
"그럼 다행이고.."
아무래도 상진이가 뭔가 할 말이 있어서 온 것 같아 좀 더 물어보기로 했다.
"왜? "
"미디어본부 A.E 하나랑 만나는 모양이야. 이건 확실해. 우리 애들이 직접 본거 거든."
"난 또 뭐라고. 그건 걔가 알아서 할 일이지. 뭐. 우리가 한 두살도 아니잖아."
"그 A.E를 너도 잘 알건데.. 김재준 부장이라고.. "
"뭐? 참네..허.. "
내 입에서 묘한 소리가 섞여 나오기 시작했다. 김재준 부장은 회사내에서도 평판이 안
좋기로 소문이 난 자였다. 비록 광고성사율이 높아서 경영진쪽에선 상당한 인정을 받고
있지만, 사내 여직원, 사외 여직원, 그리고 광고출연을 빌미로 모델이나 신참 연예인들
까지 그가 건드리지 않는 여자가 없었고, 심지어 오너에게 성상납도 하고 돌아다닌 다
는 소문이 꽤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퍼져있는 사람이었다. 다만 그의 뛰어난 업무능력이
그것을 수단으로 보이게끔 억지로 가려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검은색 바탕
위에 칠해진 빨간색 물감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남자와 그녀가 만나고 있다니까 묘한 느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확실히 미혼여성
최대의 적은 노련한 유부남인 것 같다는 생각도 함께 든다. 씁쓸한 그런 생각이 얼굴에
나타났던 걸까. 한팀장이 내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더니 주차장의 한쪽 구석으로 담배를
던지며 말을 해왔다.
"왜? 그 놈이라고 하니까 이제 좀 속이 쓰려?"
"이 새끼. 그러고 보니 내 반응 보면서 즐기고 있었던 거냐?"
"내가 겨우 이걸로 너랑 나랑 갈라서게 만들 정도로 바보는 아니잖아. 새끼야."
"속이 쓰리진 않고... 그저 기분이 좀 더럽네. 웃기기도 하고."
다시 담배를 하나 더 꺼내 입에 물고 있는데, 말도 없이 내 손에 쥔 담배갑에서 자기 것
도 챙기는 상진이. 이런 넉살 좋은 놈이기에 이 녀석과 난 욕을 하며 이야기를 해도 앙
금이 남지 않아 편하고 좋았다. 신방과를 나와서 기자가 안되고 이곳에 들어 온 능글맞
은 놈이었지만, 사내에서 이 녀석만큼 나와 죽이 잘 맞는 놈도 없었다. 마치 사우나에
들어온 듯이 서로의 벌거벗은 알몸을 보여도 전혀 부끄럽지 않는 놈이 이녀석이었다.
"원래 그래. 자기 암컷을 빼앗긴 숫컷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반응은 원래 비슷해. 그게
본능이야."
"마케팅 배울 때 동물학도 가르쳐 주던?"
"인간도 집단으로 계산을 하면, 동물들의 집단이나 인간들이나 크게 다를 것도 없어.
개개의 차이점은 양쪽 모두 존재하지만, 집단으로 확장될 수록 양쪽 모두 성향은 단순
해지고 몇 가지 목표만을 위해 달려가게 되니까. 그게 개개의 개체 존속에 유리하거든."
"그 목표가 본능의 욕구총족을 위한 것이라면 더 유사해지고?"
"그렇지. 그러니 자기 감정을 억지로 숨길 필요 없어. 네 반응은 당연한거야."
"그럼 난 머리에 뿔이라도 하나 달고 그 유부남 새끼에게 달려들어야겠군."
그 말을 내뱉은 후 담배를 다 피고 다시 회식 자리로 들어갈려는 내게 한팀장이 말을
걸어왔다.
"병신새끼. 뻔히 내가 널 아니까 속일 생각은 하지마."
"내가 어떻게 할 거라고 지레 짐작하는 건데? 뭘?"
"유팀장 버린 거,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 아냐?"
"뭐? "
"걔가 책임질 만큼 깨끗하거나, 순종적이거나, 신뢰가 가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서로 미
래를 약속한 것도 아니잖아. 그러니 혹시나 헛짓거리 할 생각이며 지금 당장 때려쳐. 그
리고 니가 눈치 못채고 있었다는 건 말도 안되고. 누군지는 몰랐어도 있다는 정도는 알
았을 거 아냐."
한 여자를 몇 개월 이상 만나게 되면 당연히 자신 말고 다른 남자가 있는지 없는지 알
게 된다. 그건 눈치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이니었다. 아니,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어쩔
수 없이 눈에 미묘한 이질감이 걸리게 된다. 보지 않으려 해도, 알아도 모른 척 할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느끼게 되는 그 더러운 이질감. 하지만 그녀를 만날 땐 그런 거에 신
경을 쓰지 않아서 별 무리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게 우리의 룰이었으니
까. 그리고 내가 책임질 여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강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래서 그
런 것들이 눈에 보여도 모른척하고 넘어갔었다. 어차피 그녀는 내것이 아니었다. 내 몸
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을 잡을 수도, 소유할 수도 없듯이 난 그녀를 그렇게 생각했다.
"남자가 있던 말던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신경을 아예 안썼다는 게 정답이야."
"호오.. 처음부터 자위도구로만 사용했구만. 하긴 걘 그 정도가 딱이야."
"너 말 정말 잔인하게 한다."
"세상을 남자가 지배하고, 그 남자를 여자가 지배한다지만.. 어차피 그 여자위에 올라
타는 건 남자야. 걔들이 어떤 생각을 품고 다리를 벌리던, 챙길 건 챙기고 아니다 싶으
면 갈아타면 그만이야. 저길 봐. 저 안에서 웃고 떠느는 여직원들. 마치 백화점 세일하
듯이 저렇게 자신이 남자들에게 팔리기를 바라는 수 많은 여자들이 주위에 있는데, 쓰
던 물건에 정들었다고 애써 발목 잡힐 필요는 없잖아. 현대 사회에서 인간이 누리는 모
든 것은 쓰고 버리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냐. 멍청한 새끼야."
막내 아들이라서 그런지, 상진이가 가지고 있는 여자에 대한 그의 생각은 매우 편향적
이다. 여자를 색깔별로 가지고 있다가 계절에 따라, 또는 기분에 따라 언제든 갈아입을
수 있는 옷장속의 옷 정도로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딱히 꼬집을 수는 없지만 뭔가 나와
는 맞지 않는 코드라고 생각했다.
"멍청하게라.. 그렇지. 그러고 보면 넌 엄청 계산적이야. 새끼야."
"내가 이 바닥에 벌써 몇 년인데.. 설마 내 머리에 하얀색이라는 것이 남아있는 줄 알
아? 크큭.. 생각만 해도 웃기는군."
"하긴.. 나도 이제는 하얀색만 보면 뭔가 칠해서 덮어 버리고 싶은 나이가 됐으니.. "
"그게 우리 나이야. 그리고 직장인의 살아가는 모습이고.."
어쨌든 상진이의 말을 통해 그녀를 정리한 것이 잘 했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가질 수
있었다. 상진이 녀석은 안보는 척 하면서 내게 다가오고, 약 발라주는 척하며 내 아픈
곳을 건드리는 놈이었다. 아직 딱지가 생기지 않은 생채기를 날카로운 손톱으로 할퀴
며 아프냐고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잔인한 녀석이 바로 이 녀석이었다. 하지만 그 녀석이
쥐어 뜯는 그 생채기를 통해 난 점점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런 변화를 상진이가 나에게 바라는 것이었다.
기다리고 있을 부하직원들을 찾아 식당 입구로 걸어가며 말을 했다.
"어쨋든 오늘은 땡큐!"
"야! 담배 하나 더 주고 가."
"새끼야. 사서 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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