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일기 - 2부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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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 남편의 일기(1)
9월 17일
정밀 진단 결과가 나왔다. 지난 해 회사를 옮기는 바람에 건강 진단을 받지 못했던 게 병을 키운 원인이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나한테 이런 끔찍한 사건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선생님! 어, 얼마나 사, 살 수 있나요?]
[그게, 벌써부터 단정 지을 순 없어요. 암이란 게 원래 환자 의지에 따라 완치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지는 거고……]
최선을 다해 치료해보자며 결코 희망을 잃지 말자는 의사의 마지막 말이 더 청천벽력 같았다. 위선에 가득 찬 오만한 의사 양반이 나약한 환자를 기만한다고 느껴졌다.
[간암, 그것도 분명 말기……가 틀림없다는 말씀이지요? 그런 것이지요?]
[………]
[나, 하나도 안 아파요? 멀쩡히 회사 잘 다니고, 밥도 잘 먹고…… 어려서부터 잔병치레는커녕 간인지 위인지 속병 한 번 앓은 적도 없어요. 그런데 씨팔! 간암 말기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자, 자! 진정하세요. 이런 경우 대부분의 환자들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무엇보다 절대 안정이 필요합니다.]
[치료하면 정말 나을 수 있나요? 그렇다면 뭐든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의사는 환자의 예후에 대해 확단을 내릴 수 없어요. 본인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선생님! 살려주세요. 저 좀 살려주세요! 딸아이와 아내를 두고 어떻게 죽는단 말입니까? 저는 반드시 살아야 해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의사에게 매달렸다. 아니 생떼를 썼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보호자에게 연락하고 즉시 치료에 들어가자는 의사의 요청에 정신이 또렷하게 맑아졌다.
[잠시, 잠시만…… 아까 뭐라고 말씀하셨죠? 시한부 어쩌고 했던 것 같은데……]
[아, 그게 그러니까…… 뭐냐면 그게…… 말씀드렸다시피 말기 암이란 게 원래 환자 의지에 따라 생사의 갈림길이 길어질 수도 짧아질 수도 있다는 얘기에요.]
[그러니까 그 생사의 갈림길이 길어도 6개월 안에 저를 찾아온다, 결론은 이거 아닙니까?]
[………]
어떻게 집에 왔는지, 차는 어디에 주차했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백지장처럼 하얗게 바래버린 머리 속은 이미 정상적인 사고력을 상실했다.
아내가 옷을 받아 거는데, 다리가 후들거려 서 있기조차 버거웠다.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죽을지도 모른다고, 아니 곧 죽을 테니 마음 단단히 먹으라고 일러줘야 하나?
9월 23일
의사 말로는 입원해서 방사선 치료를 받는 게 최선이라는데, 약만 챙겨서 나왔다. 한 달, 아니 고작 며칠 더 살자고 벌써부터 아내를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뜨릴 순 없다. 언젠가는 아내도 알게 되겠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누구나 한 번은 죽는다, 내 경우는 그 시기가 남들보다 조금 빠를 뿐이다! 이렇게 수긍해야 되지만, 천지신명의 고약한 심보를 어떻게든 거스르고 싶다.
죽는 건 두렵지 않다. 다만 아내와 민아가 눈에 밟힌다. 그래서, 그래서 미치도록 살고 싶다.
잠든 아내의 귀밑머리를 쓰다듬어 보았다. 단아하고 가지런한 머릿결, 언제 맡아도 향긋하다. 달콤한 향기에 눈이 찔렸는지, 기어이 눈물을 쏟고 말았다. 베란다로 나가 입을 틀어막고 통곡했다.
9월 27일
결혼하고 나서 지금까지 아내의 성적 매력은 여전하다. 아니, 예전보다 더 풍부해졌다. 잡은 물고기에겐 미끼를 주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러나 내겐 처음부터 던질 미끼가 없었다. 그런 나에게 입질해준 아내가 고마울 따름이다.
샤워를 끝낸 아내가 요염한 자태로 걸어와 내 어깨를 짚었다. 아이 엄마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날씬한 몸매를 보며 내 욕정이 꿈틀거렸다. 귓불 가득 아내의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내 부실한 아랫도리가 팽팽하게 일어섰다.
[여보, 우리 그거 안 한 지 며칠이나 됐는지 알아요? 당신 요즘 이상해 보여요! 회사에 무슨 안 좋은 있어요?]
셔츠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어 밋밋한 내 젖꼭지를 꼬집으며 아내가 근심을 표명했다. 하긴 벌써 열흘 동안 아내와 전혀 관계가 없었다. 당연히 아내로서도 걱정 반, 불만 반이었을 것이다.
[아니, 일은 무슨…… 조금 피곤해서 그랬지! 그나저나 당신이 웬일이야? 항상 먼저 하자고 분위기를 잡은 건 나였는데……?]
[어머, 당신은…… 그야 가만히 있어도 매일 당신이 다 알아서 하니깐 그런 거죠! 저는 뭐 여자 아닌가요? 제 피도 뜨겁다고요!]
그렇다! 어느 광고 카피처럼 아내는 여자보다 아름답다. 울컥 뜨거운 기운이 치솟으며 아내의 가냘픈 허리를 감싸 안고 말았다. 빙그르 한 바퀴 얼싸 안고는 아내를 침대에 뉘였다. 고운 이마와 짙은 속눈썹, 갸름한 콧날에 이어 살짝 벌어진 입술로 차례차례 입술 도장을 찍어나갔다.
전쟁터에 끌려 나가는 연인들의 애절한 사랑처럼 아내의 가슴과 둔부, 꽃잎, 허벅지, 발가락을 낱낱이 핥았다. 저승에서 다시 만나는 그날, 수많은 인파가 들끓는 속에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아내의 구석구석을, 세포 한 올 한 올을 기억에 담고 또 담았다.
[아…… 흑… 여보, 너무 부드럽고 달콤해서 온몸이 녹을 것 같아요!]
아내의 입에서 단내가 묻어났다. 오르가슴에 막 도달하려는 순간이다. 아내의 젖가슴이 급류를 따라 오르락내리락 부침을 거듭했다.
아내의 화려한 꽃잎과 작고 암팡진 젖가슴 중 하나를 택하라면, 나는 주저 없이 가슴을 꼽는다. 아내는 자신의 가슴이 빈약하다며 부끄럽게 여기지만, 그런 수줍음이 오히려 나의 ‘작은 가슴 예찬론’을 자극시킨다.
간질이듯 아내의 유두를 살짝 비틀면서 검고 무성한 꽃잎 사이로 진입했다.
[허……윽…… 아, 하……앙…… 여보, 천천히…… 오래 즐겨요!]
나를 격려하는 소리다. 조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아내의 배려다. 성난 물건을 집어삼킨 아내의 꽃잎이 파르르 떨렸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아내의 몸은 충실하게 감각을 쫓았다. 이율배반적인 아내에게 끝 모를 사랑이 샘솟았다.
이렇게 예쁜 아내를, 나의 천사를 두고 떠나야 한다니…… 신이 있다면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해서라도 내 목숨을 연장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나…… 구걸한다고, 애원하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세상은 내가 없어도 무사하게 잘 굴러가니까!
순간, 내 남성이 비참할 정도로 조그맣게 쪼그라들었다. 아내의 질 속에서 힘없이 미끄러져 나왔다. 아내가 의아하다는 눈초리로 말을 걸었다.
[여보, 조금만 더…… 당신도, 나도 아직 느끼지 못했잖아요. 다시 한 번 해봐요, 우리!]
아내가 몸을 일으켜 풀 죽은 내 아랫도리를 입에 넣었다. 생리 기간이 아니라면 절대 하지 않는 오럴이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기력을 상실한 내 아랫도리는 더 이상 부풀지 않았다.
똥 누다 만 것처럼 개운하지 못한 채 잠자리에 들었다. 아내가 조심스럽게, 극도로 긴장하며 말을 건넸다.
[여보,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신혼 초에 몇 번 언급하다 지지부진하게 마무리된 바로 그 얘기였다.
[오해……하지 말고 들었으면 해요. 며칠 사이 당신 얼굴이 쇠약해 보였어요. 생전 안 하던 잠꼬대도 하고…… 그래서 말이에요, 보약이라도 한 재 지으면 어떨까요?]
[………]
[부부 관계를 못해서가 아니라…… 제 맘 알죠? 당신에게 충분히 만족해요! 때론 넘치는 걸요! 다만, 요즘 너무 지쳐보여서……]
어찌 아내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지아비를 향한 아녀자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어찌 곡해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대답을 미룬 채 등을 돌려야 했다. 토라진 듯 보였을, 음식 투정하는 어린 아이로 비춰졌을, 그런 나를 아내가 살며시 끌어안았다.
[아니에요, 여보! 미안해요!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 당신 이렇게 건강한데, 제가 그만 실없는 소리를 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나는 새우처럼 몸을 웅크린 모습 그대로 복받치는 설움을 삼키고 또 삼켰다. 가슴 한 쪽이 뻥 뚫린 듯 격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다.
9월 28일
숨길 수 있는 한 아내에겐 비밀로 해야겠다. 하루라도 빨리 알수록 아내의 고통만 더해질 뿐이다. 악착같이 회사도 다닐 것이다. 몸이 허락하는 그날까지 한 푼이라도 더 벌어놔야 한다.
그렇게, 그렇게 주변 정리를 해나갈 것이다.
아내가 정을 뗄 수 있도록, 내 죽음을 안타까워하지 않도록, 몹쓸 남편으로 기억되도록 남은 생의 조각을 엮어나가자고 다짐했다. 그 길만이 스물아홉 아내의 창창한 미래를 위해 최선이리라! 나와 관계된 모든 것들에 몸서리를 치면서 아내가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가리지 않으리라.
조금 유치하지만, 낯선 여자의 향수나 립스틱 자국을 묻혀서 귀가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그러다 한두 번 팬티도 거꾸로 입는다면 나는 정조 따윈 안중에도 없는 바람난 남편이 된다.
그래, 폭력도 빼놓을 수 없다. 알코올 몇 방울 찍어 바르는 것이야 매일 한다손 치더라도, 적어도 이틀에 한번쯤은 진짜로 술을 마셔야 한다. 정말로 손찌검을 하자면 제정신이 아니고선 불가능하다. 기왕 개차반이 되려면 확실하게 해야 한다. 어설프게 흉내만 내다보면 동정심만 키우기 마련이다.
내가 없는 빈 자리를 누군가 채울 때까지, 아내의 행복이 더 이상 흔들리지 않을 때까지, 그 때까지 나는 죄인으로 남아야 한다. 이대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죽는다면 아내는, 조선시대 열녀 같은 못난 아내는, 재혼을 결심하는데 몇 년이 걸릴지 짐작할 수 없다. 아니, 따라서 죽지는 않겠지만, 재혼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민아의 백일잔치를 하던 날, 아내가 했던 말이 지금까지 폐부를 콕콕 찌른다.
[우리 다음에는 꼭 아들 낳아요! 제가 먼저 죽으면 당신에겐 딸 민아가 있잖아요. 그런데 만일 당신이 먼저 눈을 감으면 어떡해요? 제겐 당신의 분신, 아들이 없잖아요. 아들, 딸을 편 가르자는 게 아니라, 공평하게 둘을 낳아서 서로의 분신처럼 아끼고 사랑하자는 뜻이에요. 음~ 한 날 한 시에 눈을 감는다면 더 바랄 게 없지만……]
노인네 같은 말만 골라 한다고 타박했건만, 아내는 그 후로도 자신의 견해를 굽히지 않았다. 아내가 아들을 원하는 건, 대를 잊기 위한 남아선호사상이 아니라 또 다른 나를 세상에 남겨두기 위해서다.
아내의 말에 감염된 것일까? 나 역시 민아를 통해 아내를 발견해 왔음을 고백한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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