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일기 - 3부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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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 아내의 일기(3)
11월 23일
당연히 있어야 할 생리가 없다. 지금까지는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늘 주기가 일정했다. 이상하다 싶어 약국에 들러 테스트 시약을 샀다.
처음엔 덤덤하던 것이 막상 화장실에 가려는 순간부터 오금이 저려 왔다. 운명이 결정되는 시험지도 아닌데, 채점 결과가 걱정돼 소화불량에 걸리곤 하는 수험생처럼 키트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오줌 몇 방울 떨어뜨린 후 5분 정도의 짧은 기다림이었지만, 내 생애에 이보다 시간의 흐름이 더딘 적이 없었다.
요즈막의 남편 태도가 예전과 달리 불안해 보여서일까? 딸 민아의 임신 여부를 확인할 때도 이렇듯 숨 막히지는 않았다.
키트가 놓여 있는 화장대 앞에 서서, 가슴에 두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아니, 애원했다. 교회 한 번 나간 적 없지만, 신의 은총을 목 놓아 갈구했다.
내 간절한 소망이 하늘에 닿았던 것일까? 두 줄의 선명한 띠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나는, 나는…… 임신이었다.
뱃속에 잉태한 생명, 이 아이는 우리 부부에게 있어 생활의 기폭제가 될 것이다. 삐걱거리던 우리 부부를 단단하게 묶어줄 새로운 이정표가 될 것이다.
감격에 겨운 나머지 일요일의 달콤한 게으름에 젖어 있는 남편을 깨웠다. 지난밤의 섹스가 격렬했던 탓인지 남편은 해가 중천에 뜨도록 잠에 취해 있었다.
반쯤 상체를 일으키던 남편을 와락 끌어안은 채, 나는 말없이 오열했다. 이 소식을, 삶의 전환점이 될 우리들의 2세가 자란다는 사실을, 당신 닮은 아들이면 좋겠다는 즐거운 바램을, 어떻게 표현해야 되는지 가슴 뭉클한 고민에 쌓여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행복한 상상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왜 그래? 무슨 일인데, 아침부터 지랄이야?]
소름끼치도록 냉랭한 남편의 반응은, 극한으로 치닫는 난타전의 예고편에 불과했다. 손바닥 뒤집듯 너무 간단하게 악몽이 재현돼, 남편이 던진 재떨이가 화장대의 거울을 깨트릴 때까지 나는 꿈이라고 착각했다.
[씨발 년이…… 하늘같은 남편이 일요일 날 잠 좀 자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배가 아파? 에이~ 좆같아서 정말! 잘 들어, 내일부터 회사 때려치울 거야. 아니, 벌써 사표 던졌으니까 그렇게 알아!]
[당신 그만해요, 제발! 무, 무섭단 말이에요! 제가 잘못했어요. 이렇게…… 이렇게 빌게요!]
나는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 남편의 광기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다. 그게 남편의 화를 더 달궜는지, 씩씩거리며 머리카락을 쥐고 흔들었다.
[이년 봐라! 아주 웃기는 짓만 골라하네. 뭘 잘못했는데……? 터진 아가리로 어디 지껄여 보시지!]
머리카락이 뽑혀 나가는 아픔보다 이유 없이 당하는 폭력의 서글픔에 치를 떨었다. 오한에 시달리듯 온몸이 저려와 마음대로 손끝하나 까닥하지 못했다.
[왜 말이 없어? 아하, 그렇지! 어제 밤에 보니까 주둥아리 대신 보지로 얘기하고 싶어 안달이 났더군! 지금도 보지가 근질거리나 본데, 속 시원히 뚫어주지! 좆과 보지의 대화라…… 하여튼 밝히는 년이라 재주가 좋긴 좋아!]
남편은 홈웨어로 입고 있던 내 원피스를 찢기 시작했다. 남편의 힘에 눌려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뱃속의 아이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는데, 팬티마저 너덜거리는 천 조각으로 변했다.
그나마 다행인건, 민아가 침실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약국에 가기 전, 남편의 늦잠을 위해 민아를 거실에 재워뒀다.
이불보에 쌓인 두 살배기 저 어린 것이 무엇을 안다고 광란의 현장을 눈 감아 주는지 고맙고, 대견했다. 추악한 몰골로 허우적대는 어른들의 잔인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나는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침대 끝에 기역자로 구부린 채 엎드려 있는 내 엉덩이 사이로 남편이 골반을 디밀었다. 물기 없는 내 음부에 남편의 물건이 억지로 길을 내기 시작했다.
뻑뻑한 아랫도리에 용케 자리를 잡은 남편은 곧장 허리를 움직였다. 가슴을 움켜쥔 손길도 거칠었지만, 무엇보다 원을 그리듯 휘저으며 자궁까지 밀려들어온 남편의 성기가 앙다문 내 입을 열게 했다.
[아파! 여보. 제발…… 제발, 너무 깊어요.]
[어제는 힘껏 박아달라고 창녀처럼 요분질 하더니만, 이제 와서 아프니까 살살하라고……?]
아픈 건 어떻게든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태아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이제 막 자궁 속에 착상한 태아는 스스로를 보호할 방어막이 없다.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태아에겐 치명적이다.
[여보…… 저는 괜찮아요! 하지만, 하지만……]
[괜찮다니 잘 됐네. 화냥년이 뭔 변명이 그리 많아? 좆질하는데 방해되니까 닥쳐!]
시도 때도 없이 행해지는 정체불명의 악행! 그것이 남편의 의도였건, 아니었건 간에 나는 남편의 착한 심성에 마지막 기대를 걸었다.
[아기, 우리 아기가……]
[민아가 왜?]
[민아가 아니라, 뱃속에 있는 우리 아이를 위해서……]
[뭐,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
거세게 압박하던 남편은 거짓말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평정을 잃은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음을 쪼그라드는 남편의 성기가 대신 들려주었다.
[저, 임신했어요! 조금 전에 약국에 들렀다가 테스트 시약을 샀어요. 그래서…… 그래서 곤히 자고 있던 당신을 깨웠어요. 당신이 기뻐하리라, 축복해주리라 믿었어요.]
남편의 광폭한 만행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더니 말릴 틈도 없이 집을 뛰쳐나갔다.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새벽이 되도록 연락조차 되질 않는다.
옷도 부실하게 입었는데, 찬 이슬 맞으며 길거리를 방황하면 어떡하나 싶어 애꿎은 베란다만 기웃거린다.
11월 25일
정말로 남편은 사표를 썼나 보다. 어제 아침, 부스스한 얼굴로 들어와서는 지금까지 서재에서 꼼짝도 않는다. 간단히 반찬을 준비해 문을 두드려도 묵묵부답이다. 가끔씩 화장실을 이용할 때가 아니라면 문 밖 출입조차 없다.
다시 기다려야 하나? 남편의 극단적인 변화가 눈 녹듯이 사라지기를 하염없이 기다려야 되나?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노력해도 남편을 이해할 수 없는데, 누구와 상의해야 될지 난감하다.
진수 씨라면 뭔가 짚이는 게 있을 것 같지만, 묵은 얘기까지 꺼내는 남편이고 보면 먼저 연락하기가 겁난다.
가슴에 돌덩이가 내려앉았는지 한 걸음 움직이기가 천근만근이다. 민아 먹이고, 재우고, 귀저기 갈아주는 것을 제외하면 나 또한 하루 종일 웅크리고 있었을 따름이다.
사람들은 이러다 미치게 되는 걸까? 미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은 혼돈의 시간!
언제쯤 모든 것이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과연 그 날이 오기는 할까? 뱃속의 아이는 신의 선물일까, 아니면 신의 저주일까? 풀리지 않는 이 수수께끼의 정답을 찾기 위해 서재를 두드리고 또 두드렸다.
11월 27일
이틀을 굶어서일까? 남편의 안색에 핏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창백하다 못해 처참할 지경이었다. 영혼마저 탈색된 듯 도무지 읽히지 않는 표정으로 다가오더니 내 팔을 낚아챘다.
[가자!]
나는 팔을 뿌리치며 남편의 바지가랑이에 매달렸다.
[여보, 정신 차려요. 난데없이 가자니…… 가긴 어딜 가요? 그러지 말고 나랑 병원에 가서 진찰부터 받아 봐요. 당신, 중병 걸린 환자 같아요. 위태로워 견딜 수가 없어요.]
[그래, 병원에 가자! 가서 지우는 거야.]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가 남편의 단호한 의지에 힘을 싣고 있었다. 손만 대면 툭 쓰러질 듯 병색이 완연한데, 남편의 어디에 그런 악력이 숨어 있었는지 나는 질질 끌려갔다.
[안 가! 아니, 못 가! 당신 정말 왜 이래요? 미치려면 혼자 곱게 미치지 이게 무슨 행패야?]
그것은 발악이었다. 거칠게 대드는 내 목소리가 예상외로 컸던지, 남편이 움찔하며 한 발 물러섰다.
꾹꾹 눌러두었던 가슴속 응어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전생에 내가 무슨 업보를 졌다고,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원수처럼 구는 거야? 도대체, 도대체 당신이 뭔데……]
텅 빈 시선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남편이 털썩 주저앉았다. 모래성이 무너지듯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그리고는 내 손을 꽉 쥐고 애원했다.
[이렇게, 이렇게 빌게! 절대 태어나선 안 될 생명이야. 마지막…… 마지막 소원이야.]
내 품에 안긴 채 남편은 오열을 터뜨렸다. 왜 남편이 이럴 수밖에 없는지, 미친 듯이 절규하며 낙태를 강권하는지…… 까닭모를 연민이 북받쳐 올라, 하염없이 남편의 등만 어루만졌다.
11월 30일
죽기로 작정했을까? 그저께 오후부터 눈만 뜨면 술을 찾는 남편을 피해, 날이 밝자마자 민아를 친정에 맡겼다. 나 역시 며칠 신세질 생각까지 했지만, 저녁 무렵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렸다.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남편이 마음 놓고 기댈 언덕으로 나 하나쯤은 있어도 괜찮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게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차라리 친정에서 며칠 지내는 편이 현명했으리라, 뒤늦게 후회했다.
소파에 웅크려 자고 있던 남편이 내가 들어온 기척을 느꼈는지 벌떡 일어났다. 이글거리는 남편의 눈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순간 어찌나 놀랐는지 콩닥콩닥 뛰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나는 급히 욕실로 몸을 숨겼다.
어디에 전화를 거는지 남편의 거친 육성이 파편처럼 떠다녔다.
[씨발…… 오라면 올 것…… 너 이 새끼…… 약속했…… 부탁……]
문에 기댄 채 귀를 막고 있던 터라 어렴풋이 몇 마디만 들려왔다. 전화를 끊었는지 남편이 욕실 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문 열어! 이 썅년아…… 어떤 더러운 놈과 붙어서 만든 씨앗인지 몰라도 절대 용납 못해! 안 열면 부셔버릴 거야.]
지옥이 따로 없었다. 쿵쾅거리는 파열음이 강도를 더해가고, 열쇠를 맞추고 있는지 달그락거리며 손잡이 돌아가는 소리가 청신경을 난타했다.
옥신각신 밀고 당기는 사이, 문짝이 너덜너덜하게 떨어져나갔다. 지난 두어 달 동안 아파트 주민들도 면역이 됐는지, 엄청난 소란에도 불구하고 복도는 잠잠했다.
곧 이어 남편의 신체 각 부위가 내 몸을 지근지근 밟기 시작했다. 쥐며느리처럼 몸을 말아 남편의 발길질을 흡수했다. 죽어도 아이만큼은 살려야 한다는, 본능적인 모성애가 없었다면 나는 그 순간 정신을 놓았을지 모른다.
필사적으로 문 밖을 향해 기어갔다. 손짓 발짓으로 남편을 밀쳐내고, 어찌어찌 정신을 차려보니 아파트 정문의 놀이터였다. 입가에 핏자국을 묻힌 채, 맨발의 미친 여인이 찢어진 옷을 입고서 놀이터 모래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나마 정신이 돌아온 건 누군가 상의를 벗어 가로등에 노출된 비참한 내 육신을 감쌌기 때문이다. 고맙다는 눈인사라도 전할 겸 고개를 드는데,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어딘가 본 듯한, 익숙한 얼굴이었다.
스멀스멀 감기는 눈동자가 내 의식을 앗아갔다. 결국 감사의 인사도 생략한 채 나는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었다.
참을 수 없는 갈증이 다시금 내 의식을 명료하게 자극했다. 낮은 촉수의 불빛이 붉게 작렬하고, 나는 머리맡의 물병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여기가 어디인지, 어떻게 물병을 찾았는지, 침대 끝에 기대 머리카락만 보인 채 잠들어 있는 낯선 이는 누구인지, 고장 난 레이더가 방안을 훑기 시작했다.
흐릿하던 망막에 점차 또렷한 윤곽이 새겨졌다. 나는 턱까지 이불을 당겨 누워있었다. 흠칫 놀라 아래를 더듬어 보니, 속옷 차림이었다.
이불을 말아 어느 정도 몸을 가린 후, 조용히 일어섰다. 이유야 어쨌든 그대로 있을 순 없었다. 옷부터 찾을 요량으로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침대 밑으로 내려서는 순간, 나는 중심을 잃고 말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발 딛고 서 있을 힘조차 없었다. 쿵 하는 둔탁한 소음이 방 안 가득 울려 퍼졌다.
[성혜 씨! 괜찮아요?]
쓰러진 나보다 더 놀란 듯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진수 씨였다. 고약한 일이라도 당했으면 어쩌나 싶어 제멋대로 날뛰던 심장이 평온을 되찾았다.
[네! 괜찮아요. 그것보다 어떻게 된 거죠? 그리고 또 여기는 어디에요?]
대답 대신 진수 씨가 다가와 나를 부축했다. 침대 위로 앉힌 뒤, 이불을 여며주고는 불을 켰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동자에 환한 불빛이 따갑게 맺혔다. 찡그린 눈살을 펴자 군데군데 피로 얼룩진 진수 씨의 와이셔츠가 보였다.
[성혜 씨, 다친 곳은 어때요?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되겠어요?]
그때까지는 몰랐는데, 정작 그 말을 듣자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방망이로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욱신거렸다.
[놀이터에서 성혜 씨를 들쳐 업었는데, 가느다란 신음소리로 그러더군요. “병원…… 병원은 안 돼!” …… 제 오피스텔로 모시기까지 많이 망설였어요.]
모든 의문이 한꺼번에 풀렸다. 의식이 가물가물한 상태에서도 낙태 수술만은 거부했던 것이다.
[급한 대로 상처 난 부위를 소독했어요. 엉켜 붙은 피가 살갗에 닿을까봐 허락도 없이 옷을 벗겼는데, 무례했다면 죄송합니다.]
마치 큰 죄라도 저지른 양 고개 숙여 사과해 왔다. 나 역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알몸에 가까운 맨살을 드러낸 게 벌써 두 번째다.
더 이상 못난 꼴 보이기가 미안했다. 큼지막한 체육복 바지와 셔츠를 빌려 외양부터 갖추었다.
이제는 남편의 친구가 된 진수 씨…… 한 때 흉허물 없이 지내던 사이였지만, 결코 편한 상대로 남을 수 없는 관계!
그러나 염치불구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자존심이나 수치심을 앞세울 만큼 한가할 수 없었다.
[진수 씨! 지난 시절, 제가 믿고 의지했던 오빠로서, 남편과의 사랑에 결실을 맺어준 친구로서, 숨기지 말고 가르쳐줘요! 하나라도 보태거나 빼지 말고……]
왠지 진수 씨는 뭔가 알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 절박한 순간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놀이터에 있었다는 게 심증을 굳히게 했다. 우연치고는 타이밍이 너무 절묘했다.
[남편이 요즘 이상해요! 아니, 무섭게 변했어요. 술과 여자도 모자라 죽일 듯이 폭력을 휘두르고…… 반쯤 넋을 빼놓고 사는 사람처럼 멍하게 있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에요! 혹시, 남편에게 여자가 생겼나요? 그래서 이혼하자고 저러는 건가요?]
[………]
[직장에서 큰 사고라도 일으켰나요? 이도 저도 아니라면 정신적인 쇼크를 받게 된 커다란 사건이라도 있나요? 살림만 하던 여자가 뭘 알겠어요? 그렇지만, 진수 씨는 둘도 없는 친구잖아요. 분명, 분명히 제가 모르는 뭔가가 있죠?]
그러나 남편의 둘도 없는 친구는 끝내 침묵했다. 둘 사이에 무슨 밀약이라도 있었는지, 한 숨만 내쉴 뿐이었다. 한 시간 가까이 울먹이며 혼자서 떠들었고, 진수 씨는 간혹 얼굴을 감싸 쥐거나 방 안을 서성거렸다.
아무리 애원해도 진수 씨의 입에 채워진 자물쇠는 열리지 않았다. 남편의 비밀에 다가설 수 있는 열쇠는 어디에 있을까? 과연, 있기는 한 걸까?
친정에서 며칠 묵으며 방법을 찾아보는 것 외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친정 부모님께 뭐라고 둘러댈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오피스텔 입구까지 따라 나온 진수 씨가 택시를 잡으며 오랜 침묵을 깼다. 선문답 같은 아리송한 이야기가 나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동철이는…… 아마 떠날 거예요! 저도, 성혜 씨도, 세상 그 누구라도 동철이를 막지 못해요. 동철이가 곧 긴 여행을 떠난다는 것…… 제가 아는 건 이게 전부예요.]
여행, 여행이라니……? 어디로 간다는 것인지, 언제 돌아온다는 것인지……? 입 안에 맴도는 말을 질문하려는데, 어느 새 택시는 새벽 여명 속으로 질주했다. 도로 위에는 안개가 짙게 깔려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들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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