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풍폭우(狂風暴雨) - 1부 7장
본문
제 1 장 첫사랑
- 7 -
그들은 아침을 먹고 잠깐 해수욕을 즐겼다. 하지만 서울까지 가야하는 순진 때문에 오전에 해수욕장에서 나섰다. 포항 터미널에 도착해 버스시간표를 보니 서울까지 바로 가는 버스가 있었지만 2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후도 짐까지 들고 서울까지 가기는 그랬기 때문에 우선 대구에 들려야했다. 동대구 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대구역으로 향했다. 순진의 표를 끊고 대합실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둘의 마음은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후는 피곤한 순진을 혼자 보내기 싫었고, 순진도 내심 그가 함께 서울로 가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다. 개찰구가 열리자 순진이 혼자 배낭을 메고 돌아섰다. 후가 돌연 순진의 표를 뺏었다.
“순진아, 잠깐만 비아그라 구입방법기다려!”
후의 행동이 이상했지만 순진은 내심 기대가 되었기에 다시 대합실 의자에 앉아 그가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후는 매표소에 가서 순진의 표를 환불하고 다시 붙은 좌석으로 표 두개를 끊었다. 그의 배낭은 대합실 북쪽에 있는 사물함에 들어갔다. 텐트는 사물함이 맞는 크기가 없어서 대합실에 있는 사무실에 잠시 맡겨 두었다. 안 된다던 역무원 아저씨도 후가 내민 담배 두 갑에 슬쩍 텐트 가방을 받아 쥐었다. 시계를 보니 출발까지는 아직 5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후가 순진과 함께 배낭을 짊어지고 개찰구를 들어서려는데 열차가 6분정도 지연 되어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순진은 화장실을 다녀왔고, 후는 간식거리를 사왔다. 기차를 탄 그들은 잠시라도 함께 있게 된 기쁨을 만끽했다.
서울역에 도착하니 동자동 광장의 시계는 저녁 여덟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둘은 역사 북쪽에 있는 지하도를 지나 대우 빌딩 앞에서 택시를 타고 동대문 이대병원에서 내렸다. 그들은 창신동 골목시장을 지나 순진의 집 앞에 도착했다. 불청객이 없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을 찾았다. 순진은 후를 보내기가 싫었다. 후도 떨어지기 싫은 것은 매한가지다. 하지만 이제 후는 혼자 열차에 몸을 실어야한다. 입술은 뗀 순진은 포옹을 풀지 않은 체로 말했다.
“후야! 내일가면 안 돼?”
그 말을 한 순진은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후도 그러고 싶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응? 무슨 소리야? 나 잘 데도 없잖아.”
순진은 후가 자기를 오해할까 걱정도 되었지만, 다시 한번 용기를 냈다.
“그냥 오늘 하루만 더 너랑 있고 싶어.”
‘얘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후도 텐트 속에서보다 더 진행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내용은 여자친구를 걱정하고 아끼는 남자친구의 배려였다.
“부모님께 오늘 돌아온다고 했는데 지금 가도 새벽이나 되서 도착할 것 같단 말이야. 너도 집에다 그렇게 얘기하고 왔을 거 아냐? 안 들어가면 부모님께서 걱정하실 거야. 꾸중도 들을 테고.”
“그래서… 안 되는 거야? 나 정말 혼자 있기 싫은데…….”
“무슨 말이야? 순영이도 있구, 부모님도 집에 계실 것 아냐?”
순영이는 저번에 첫 키스하던 날 들킬 뻔 했던 순진이 동생이다.
“순영이는 보충수업 전이라 시골 외가에 놀러 가서 모레나 올 거야…, 부모님은 휴가 받아서 계원들이랑 대만에 일주일간 놀러 가셨어. 실은 나 놀러 가는 거 순영이한테만 얘기했어. 순영이한테도 친구들이랑 간다고 했기 때문에 너랑 간 건 아무도 몰라”
“그것도 그거지만 역에 두고 온 내 짐들이랑 텐트는 어떡해? 글구 아르바이트도 내일부터 간다고 했는데…….”
“실은 역에서 화장실 간다고 갔을 때 역무원 아저씨께 부탁 드려놨어. 일이 있어서 내일이나 찾으러 올 거 같으니 좀 챙겨 달라고…. 니가 한 것처럼 담배 세 갑 드리니깐 오케이 하시던데? 헤헤……. 그리구 아르바이트야 전화해서 얘기하면 되잖아. 내가 이렇게 까지 부탁하는데 안 돼? 응?”
이미 순진에게는 부끄러움보다 애절함이 더 가득했다. 그가 이상한 여자로 오해하더라도 오늘만은 함께 있고 싶었다. 그녀의 유혹, 아니 도발은 후를 흔들고 있었다. 그러나 순진의 모습에 자신이 처음이 아니라는 느낌이 드는 것은 후도 어쩔 수 없었다. 후는 기분이 나빠졌다. 순진에게서 정나미가 떨어지려 했지만, 그런 의심보다는 본능이 우선시 되고 말았다. 순진이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잡아끌자 후도 발걸음을 옮기고야 말았다. 집에는 전화로 친구들이랑 하루 쯤 더 놀다 간다고 거짓말을 했다.
순진이네 집은 한옥이었는데 예전에 텔레비전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의 대발이네 집처럼 생겼다. ‘ㄱ’자형의 집이었는데 대청을 사이에 두고 안방과 건넌방이 있었고, 건넌방에 연결된 부엌, 그리고 부엌 옆에 사랑방이 있었다. 대문 오른쪽에 붙은 창문이 사랑방 창문이었다. 마당에는 그녀의 어머니가 기르시는 화분이 가득했고, 그 한쪽에 화장실과 욕실이 있었다. 부모님은 안방을 쓰시고, 순진과 동생 순영은 어릴 때까진 건넌방을 함께 쓰다가 순진이 고등학생이 되면서 사랑방을 혼자 쓰게 되었다 했다.
순진이 늦은 저녁을 차려준다며 부엌에서 부산을 떨 무렵, 후는 순진의 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여자가 혼자 사는 방엔 처음 들어와서인지 가슴이 떨렸다. 애기 살결 냄새 같은 좋은 냄새가 났다. 두 평 반 정도 되는 방에는 침대와 화장대 - 이것도 순진이가 대학에 입학하자 선물 받은 것이라 했다 - 책상이 놓여 있었고, 한켠에 책장이 있었다. 책장 안에는 전공서적이며, 사전, 앨범 등이 놓여 있었다. 앨범을 꺼내서 첫 장을 넘기니 순진의 백일 사진과 돌 사진이 나왔다. 초등학교, 중학교 사진은 졸업식과 수학여행, 소풍 등이 전부였다. 여러 장을 넘기니 순진이의 고등학교 때 사진이 나왔다. 친구들이랑 학교에서 찍은 사진, 부모님과 찍은 사진 등이 나왔다. 여러 장을 넘기자 후의 눈을 잡아끄는 사진이 있었다. 순진이 어떤 남자와 팔짱을 끼고 있는 사진이었다. 다음 장을 넘기니 여름인지, 반바지에 티셔츠를 입고서 방금 그 남자에게 업혀 있는 사진이 나왔다. 사진의 배경에는 텐트까지 있었다. 거기까지 보자 더 이상 앨범을 넘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침부터의 순진의 모든 행동을 의심하던 그는 순진이 거짓말을 했다는 생각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분명 그가 처음이라고 했는데……. 분노랄까, 모멸감이랄까? 아니 그것보다 더 큰 것은 분명 질투였을 것이다. 앨범을 덮자 순진이가 들어선다.
“조금만 기다려. 밥하는 거 뜸만 들이면 돼. 앨범 보고 있었구나. 일루 줘봐. 내가 설명 해줄게.”
“……”
순진이는 앨범을 펴 들고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건 초등학교 소풍 때 찍은 거야. 이건 졸업식이고, 이건……”
계속해서 순진이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의 기분은 눈치 채지 못하고 그에게 사진을 보여주는 게 즐거운지 순진의 얼굴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후는 대답 한마디 하지 않았다. 드디어 그 남자와의 사진이 나왔다. 순진이가 시계를 보더니 부엌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순진이가 상을 들고 왔지만, 후는 그 남자가 누굴까 하는 생각에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먹었다. 상을 물리고 나자 순진이 다시 앨범을 꺼내든다. 성질 급한 그로서는 그때까지 안 물어보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러나 결국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그가 넌지시 물어본다.
“저…여기 이 남자는 누구야?”
“응 우리 오빠야. 잘 생겼지?”
“오빠가 있단 말은 못 들어봤는데?”
“내가 얘길 안 했나보구나?”
그녀의 말에 의하면 오빠는 그녀랑 일곱 살 터울인데 군대를 제대하고 지금 미국에 유학을 가있는 중이라 했다. 후는 자신의 단순함에 실소했다. 그는 그녀에게 가족사항을 물어본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동생이랑 부모님과 함께 살기에 그게 가족 전부인 줄만 알았으니……. 괜히 그녀를 의심한 것 같아 미안했다. 고개를 숙인 체 말도 못하고 있으니 그녀도 그의 심정을 눈치챘다.
“어쩐지 밥 먹을 때도 말이 없는 게 이상하더라니… 울 오빠가 내 남자친구인 줄 알았어?”
“……”
“우리 후도 질투를 하네?”
“질투라니? 내가 처음이라는 게 거짓말인줄 알았어. 그래서 조금 화 난 것뿐이야!!”
“그래도 난 니가 더 멋있어. 쪼오~옥!!”
“얘가 왜 이래? 징그럽게……. 내가 애기냐? 볼에다 뽀뽀를 하게? 하려면 요기다 해죠.”
“응… 알았어. 눈 감아봐.”
잠시 진한 키스를 나눈 뒤 시계를 보니 열한시가 넘었다. 일찍부터 서울로 돌아온다고 설쳤더니 피곤했다. 같은 방에서 잔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게다가 순진이 쓰는 방이라서 그런지 후는 흥분을 감추기 어려웠다.
“후야, 먼저 씻어. 물 데워 놨어. 저기가 욕실이야.”
“아냐, 피곤할 텐데 니가 먼저 씻어.”
“그래두 손님인데 먼저 씻어. 수건은 안에 있어. 잠옷은 이따 가져다줄게.”
후는 욕실에 들어갔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찬물을 맞으니 정신이 바짝 들었다. 내심 오늘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하는 기대도 되었다.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가 나왔다. 샤워를 다하자 순진이 욕실 문을 두드렸다. 아마도 샤워하는 동안 밖에서 기다린 것 같았다. 그녀가 자신이 콧노래를 부른 걸 들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조금 부끄러웠다. 문을 열고 얼굴만 빼꼼이 들어내자 순진이 고개를 돌린 체 러닝과 반바지를 건네준다. 사이즈가 큰 것이 아버지 것인 것 같았다.
“들어가서 조금만 기다려. 곧 들어갈게.”
“으응…….”
후는 물기를 닦고 순진이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열대야는 아니었지만 더운 편이라 선풍기를 틀었다. 작은 TV가 보였다. 전원을 넣으니 아틀란타 올림픽 생중계를 하고 있었다. 다른 채널을 돌려 보았으나 마땅한 것이 없었다. TV를 끄고 보니 아래에 작은 오디오가 보이고, 그 옆에 CD랑 테이프가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찾아보니 후가 전에 준 - 외국의 락 그룹과 메탈리스트들의 명곡만을 모아 녹음한 - 테이프가 보였다. 케이스를 열어보니 내용물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옆에 있던 HOT 1집을 집어넣으려고 보니까 카세트 안에 그 테이프가 들어있었다. 재생을 누르자 "Bon Jovi"의 ‘Always" 중간 부분이 흘러 나왔다.
순진은 샤워를 하면서 텐트 속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그와 키스를 할 때마다 몸이 붕붕 뜨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었지만, 텐트 속의 일은 색달랐다. 온몸에 벌레가 기어가는 것처럼 이상하기도 했지만, 감전된 것처럼 짜릿하기도 했다. 자신도 모르게 숨도 가빠지고 팬티 속이 근질거리며 축축해진 데까지 기억이 나자 온몸이 화끈거리는 것 같다.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은 후의 다정함이었다. 자신의 숨소리에 놀라 걱정하던 그의 모습, 열차표를 다시 끊어와 함께 기차를 탄 기억들이 그녀를 행복하게 했다. 가슴 한 구석에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의 따스함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그녀 생전에 세 번이나 비누칠을 한 적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후가 일곱 번째 곡을 들을 무렵이었다.
“후야, 불 좀 꺼줄래?”
“응, 불은 왜?”
“암튼 좀 꺼줘.”
그는 일어나서 형광등을 끄고 다시 침대에 앉았다. 카세트에선 "Skidrow"의 “I Remember You"가 나오고 있었다. 그의 눈에 순진이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오는 게 보였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지 않아서인지 자세히는 안 보였지만 수건으로만 몸을 가리고 있는 것 같았다. 후의 몸은 처음 느끼는 긴장으로 굳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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