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X - 4부
본문
소나기 구름이 가득 모여들었다. 예측하지 못한 장대비로 술자리를 끝내고 나오던 사람들에게는 대 혼란이 벌어졌지만 두 사람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기대하지 않았던 장대비 세례를 온 몸으로 받아 들이고 있다.
"봐요. 제 소원이 이뤄졌죠?"
"하늘도 감동했나?"
"당신을 처음 만난 것이 운명이라면 오늘 같은 날도 흠뻑 소나기가 뿌려줘야 정말 운명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운명이라고 믿게되면 당신에게 닥칠 고통쯤은 이겨낼 수 있는것이지?"
"그래요. 하늘 조차 우리의 바램을 들어줬는데..."
"신기해. 하늘이 하는 일은."
여름철 소나기는 아무도 예측 할 수 없다. 무더위로 하루종일 증발한 수증기가 밤이 되면서 응결하여 갑작스럽게 소나기를 뿌릴 수 있다. 다만 숙이 소망한대로 원하는 시간에 맞춰 비를 뿌릴 확률이 높지 않을 뿐이다. 이처럼 작은 자연현상 조차도 사랑의 힘이라 믿어 버리는 숙의 태도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처음 만난 날처럼 세상이 온통 물바다가 되버리면 어쩌나 하는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쏟아지는 빗줄기를 흠뻑 맞으며 갓길에 세워놓았던 차 문을 열었다. 옷 줄기를 따라 빗물이 흘러내렸지만 시트에 몸을 실었다. 쉴새 없이 와이퍼가 작동했지만 앞을 분간하기도 어렵다. 나는 장대비가 쏟아지는 도로를 미끄러지듯 달려나가고 있다.
비를 기다리던 간절한 마음도 한남대교를 건너 강북도로에 진입할 때쯤엔 강물이 넘칠 정도의 집중호우로 변해 버린 빗줄기 때문에 다소 걱정이 앞섰다.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는 비를 피해 잠시 도로 우측의 비상차량 대비지역에 차를 세웠다. 맑은 날씨 탓에 비상용 우산도 없었지만 쏟아지는 빗줄기를 느껴보고 싶어하는 숙을 위해 한강변을 내려다 보았다. 아직 강북의 팔당댐이 수위 조절을 위해 수문을 열지 않았지만 한강의 지류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수량 때문에 유속이 빨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담배를 피우고 싶다. 주머니 속의 담배는 비에 젖어 풀어질대로 풀어졌을 것이다. 숙의 차 트렁크를 열자 아직 개봉되지 않은 담배갑이 보였다. 숙의 허락을 받지도 않고 한 개피를 꺼내 들었다. 빗물 때문에 창문을 조금만 열었지만 도너츠처럼 원을 그리던 연기는 좁은 틈을 찾아 뭉개뭉개 잘도 빠져나간다. 숙은 그 날처럼 맞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다만 경외로운 눈으로 빗줄기를 응시하며 잠시 명상에 빠진 듯 했다.
"한 대 피울래?"
"그날도 비 젖은 까치 담배를 피우려 했었죠?
담배를 피우는 여자라는 것을 알고 놀랐어요?"
"아냐, 담배가 몸에 해롭다는 것이지 남자만의 전유물은 아니었으니까."
"당신을 알고부터 담배를 끊었어요."
"그랬어? 어쩐지 맞담배를 피운 기억이 없더라."
"당신 앞에서 담배를 피워 문다는 것 자체가 상상할 수 없었어요."
"난 그렇게 꽉 막힌 사람이 아닌데?"
"처음엔 내가 당신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했었죠. 그날 나는 차를 갖고 있었고, 당신은 내 차를 빌려 타는 입장이었으니까요. 당신 담배는 빗물에 흠뻑 젖었고 내 담배는 아직 개봉도 안된 새 것이었죠. 당신이 곤혹스러워하며 담배 한 대를 빌려 달라고 할때 나는 많은 것을 이미 갖고 있는 상태였으니까요."
"지금도 당신은 많은 면에서 나보다 월등해."
"경제적이라든지 눈에 보이는 것들은 당연히 앞서겠죠. 하지만 모든 것을 다 걸어도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과 비교할 순 없어요. 어느날 담배가 전혀 생소하다는 걸 느꼈죠. 몇 년간 인이 베기도록 피워대던 담배가 싫어졌어요. 지식인의 권위라고 생각했던 담배가 싫어 진 것에 대해 의외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죠. 하지만 난 알아요. 당신이 비록 권위적이지는 않게 나를 대하지만 내 마음은 자꾸 나를 여자답게 변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담배 한 개피 가지고 너무 철학적 사색을 한 것 아냐?"
"예전에 가장 가치있다고 생각했던 경제적 부와 교수로서의 명예 조차도 당신이 있음으로써 한낱 허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나의 나머지 인생과 나의 과거의 인생 조차도 당신을 위해서만 존재했었다는 믿음이 자꾸 강해져요."
"당신은 자존심이 강한 여자야. 나도 당신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고민하고 타협하기 시작한 것이지. 만약 당신이라는 존재를 그냥 스치는 여자라고만 생각했다면 내 인생은 그냥 평범 덩어리로 똘똘 뭉친 일반인과 다를 바 없었겠지. 하지만 당신의 존재가 돈이나 명예와 무관하게 정말 나의 일을 이해하고 사랑해 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과거에 존재했던 많은 일들이 허무한 몸부림이었다는 것을 깨닫았지. 내가 아직 운명적이라고 믿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지난날의 일들이 아직까지 내 발목을 확실히 붙들어 두고 있다는 것이야."
"모든 삶이 그렇죠. 과거와의 인연을 단절한 채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런 당신을 이해하기 때문에 내 가슴이 더 미어지는지도 몰라요."
"강을 따라 천천히 운전해 볼까?"
"그 날처럼 길이 모두 끊어졌으면 좋겠어요."
"이 정도의 빗줄기로 길이 끊어지려면 팔당 수문이 여덟 개는 열려야 열시간 후 쯤이나 이곳이 잠길텐데 댐 상류에 소나기가 오지 않았다면 그럴 가능성은 없어."
"알아요. 모든 것을 그 날처럼 재현할 수는 없겠죠. 우리의 새로운 출발을 위해 멋진 비가 뿌려진 것만으로도 만족하니까요."
부득이 이 길을 가야할 사람들이 아니라면 이렇게 날이 궃은 날은 차량 수가 줄어들기 마련이라서 강을 따라 비추는 가로등 빛으로는 비에 젖은 도로를 밝히는데 역부족이었다. 드문 차량들 때문에 상향등을 켜고 천천히 우리의 보금자리로 미끄러지듯 빗 속을 달리고 있다.
"내가 담배를 안피우는 진짜 이유를 알고 싶지 않아요?"
"사랑하는 사람과 맞담배 피울 용기가 없다며."
"아이를 갖고 싶어서에요."
"누가 키우려고?"
"내가 키우죠."
"불룩 나온 배로 강의하면 학생들이 미혼모라고 흉보지 않을까?"
"학교? 그만 두면 되죠?"
"회사는?"
"목구멍이 포도청일텐데 함부로 발설하겠어요?"
"정상적인 부부도 10프로는 아이없이 살아간데"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어요."
"희생이 너무 커."
"잃는 것 만큼 얻는 것도 있잖아요."
"얻는 것 보다 잃는게 더 많으니까 그렇지."
"뭘 잃죠?"
"명예. 평생을 바쳐 얻었던 교수의 명예를 잃는 것이 두렵지 않아?"
"이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당신을 얻었는데 교수가 뭔 대수에요?"
"하긴 미혼모 교수를 받아 들여선 안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지."
"배가 많이 불러 올 때 두어 달만 휴가 내면 학생들은 모를 수도 있어요."
"축복이 결여 되잖아."
"누가 누굴 축복 못한데요? 난 미국에서 당당하게 결혼할꺼에요. 그룹 사장단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당신의 아내가 될테니까."
"내 신상 정보를 알게 되면 놀라지 않을까?"
"놀라겠죠. 하지만 입을 함부로 놀리면 자리가 위태롭다는 것도 알텐니 신중해 지겠죠."
"권력을 이용한 만용이라고 생각할텐데."
"맞아요. 오너가 아니라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하지만 나는 오너에요. 부도덕한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세상엔 미혼모도 많은게 현실이죠."
"가정을 갖고 싶은거야 아이를 갖고 싶은거야?"
"나만의 가족을 갖고 싶은거에요."
"가정과 가족은 같은 것 아냐?"
"어떻게 보면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어요."
"어떤 차이가 있는데?"
"가정이란 가족이 함께 생활하는, 사회의 가장 작은 집단을 말하는 것이고 가족이란 혈연과 혼인 관계 등으로 한집안을 이룬 사람들의 집단을 말하는 것이죠."
"내겐 비슷하게 들리는데 그걸 구분해 내는 걸 보면 교수 답네."
"가족이 모여 가정을 이루고, 가정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사회가 국가를 이루는 것이죠. 가족이란 작은 단위의 울타리를 가진 사람은 사회라는 울타리와 힘겨누기를 할 때 목숨을 걸고라도 가족을 지켜내는거에요. 나는 그렇게 혼신을 다해 지켜내야할 가족을 갖고 싶어요."
"하긴 매일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들이나 강도 때문에 다친 사람들에 관한 사건사고로 얼룩진 사회에서도 내 가족이 당사자가 아니라면 안도감으로 무신경할 때가 많지. 만약 그들이 내 가족이라면 땅을 치고 통곡할 일이지만 말이야."
"내게도 부모에 의해 형성된 가족과 가정이 있지만 당신을 중심으로 가족과 가정을 만들고 싶은 것이 저의 작은 소망이에요."
"쉽게 말하면 나랑 결혼해서 애 낳고 살자는 얘기잖아."
"맞아요. 당신과의 사이에 놓인 장애물을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 미워요."
"조급하게 굴지 말자고 그랬잖아. 응?"
"알어요. 언젠가는 그런 날에 대한 약속만 된다면 지금의 슬픔은 참아낼 수 있어요."
"가족, 가정, 사회, 국가. 당신 때문에 새삼스럽게 사회학을 공부해야겠는걸?"
"농담말아요. 당신은 저에게 사랑이라는 것을 깨우쳐준 사람이잖아요. 정신적 사랑만으로 당신을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랬었지만 육체적 사랑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도 알게됐어요. 사랑은 가족을 이루고 가정을 이룬다는 것도 모두 당신 때문에 알게된 새로운 사실이죠."
"그래, 가정의 책임과 사회의 책임, 국가적 책임이 소홀해 지는 이 때에 당신의 말을 듣고 보니 새삼 느껴지는게 많아."
"저에게도 책임져야할 가족과 가정을 가질 권리는 있는거죠?"
"그래, 세상 사람들은 그 책임을 모면해 보려고 발버둥 치는 마당에 당신이라는 사람은 그 책임을 떠 안으려고 애쓰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지."
"무책임한 사람들이 참 많은 세상이죠. 강물에 빠져 죽는 사람.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는 사람. 농약을 먹고 죽는 사람들 말이에요. 자신만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모든 책임과 의무가 소멸한다고 믿는 무책임한 사람들이죠."
"개인만이 그런 것이 아니오. 국가 조차도 자기 책임을 다하지 않는 시국이니 사회 전체가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고 봐야지."
"너무 과장하지 말아요. 좁게 더 좁게 나만을 생각하며 결정한 일들이니까요."
"지금 당장엔 당신이라도 뽀족한 수가 없잖아."
"기다릴께요. 차근차근 내 계획을 실천할께요. 당장에는 몇일 쉬면서 당신을 차지할래요. 프로젝트이 자금계획을 짜 볼래요. 팀원이 구성되면 당신과 함께 미국에 가서 결혼식을 할래요. 아이도 가질래요."
"좋아. 형편이 되는데로 계획을 추진해 보자고."
숙은 자신의 가슴을 짖누르던 결혼과 아이에 대한 생각들이 공유됐다는 안도감에 스르르 눈이 감겨오는 것을 느꼈다.
"여보, 집에 가요. 오늘 밤은 당신을 위해 온 몸을 불사르고 싶어요."
"그래, 당신의 마음을 알았으니 홀가분하다. 노력할게."
차는 다시 빗속을 뚫고 쾌속하게 집으로 향하고 있다. 강물이 불어 세상을 온통 뒤엎는다 해도 우리의 사랑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본다.
정원에 차를 주차 시키자 깊은 잠에 빠졌던 세퍼트들이 부스스한 몸을 일으키며 꼬리치고 달려왔다. 비에 흠뻑 젖은 몸으로 그 놈의 머리를 쓰다듬어 본다. 숙은 뛰듯 달려 현관문을 열고 불을 밝힌다. 환한 전등불이 눈에 들어왔다. 오랜 고행을 마치고 돌아온 수행자처럼 아늑한 방안의 분위기가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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