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야설

프로젝트 X - 7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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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건너 자주 가던 생맥주집에 세 사람이 초저녁부터 앉아 있기는 처음이었다. 송사장은 기존 상품에 대한 인지도가 약간 상승하여 딜러와 바이어들이 소량이나마 주문을 해 주는 덕에 자금난이 다소 해소됐다고 연신 고마워했다. 어느정도 회사가 본괘도에 오른 마당에 탁과장이 맡게된 올챙이 프로젝트마저 성공한다면 신흥재벌 반열에 올라설 수 있게 될 것 같다며 평소의 과묵하고 신중한 사람 답지 않게 입에 거품을 물고 좋아한다.




"사장님, 올챙이 프로젝트는 로봇프로젝트의 일부분만 상용화한 모델이지만 아직 시장에 내 놓기에는 시기 상조입니다."




"왜? 아이디어가 좋잖아. 획기적인 제품이 될 것 같아 요즘은 꿈속에서도 날아갈 것 같던데."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 상품이라 하더라도 소비자의 구매 충동과 연결되지 않는 경우에는 쓰레기 통에 들어가게 되죠. 더구나 올챙이 프로젝트에서 만들어질 제품은 시장환경을 볼 때 적어도 몇 년 정도 앞선 제품이라서 소비자에게 어필하려면 막대한 광고비가 지출되야 합니다. 회사의 자금사정이 썩 좋지 않은 이때에 무리하게 소비자를 선도하여 제품을 팔 수 있는 여력이 없잖습니까."




"그럼 어떻하면 될까?"




"제품의 독창성이나 신기술성이 앞선 것은 확실합니다. 만약 대기업이었다면 이번 제품을 시장에 내 놓으면서 소비자의 문화를 한단계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겠지요. 하지만 자금 여력이 없는 상태에서 좋은 제품을 소비자에게 선보인다면 극소수의 몇사람들만 혜택을 보게 될 뿐입니다.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데 걸리는 시간이 몇 년은 걸리겠죠. 그러니까 이 제품에 대한 기대를 너무 크게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는 대박이 될 것으로 믿었는데 김박사 말을 들어보니 투자비도 못 걸질 위험이 있군."




"몇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이 제품을 대기업에 납품하고 그 기업체가 소비시장을 리드해 나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제품을 대기업에게 이윤을 넘기면서까지 팔고 싶지 않은데 다른 방법은 뭐가 있지?"




"경쟁회사에게 제품에 대한 정보를 흘리는 것입니다. 지금도 남의 제품 비밀을 빼내려고 혈안이 되어 날뛰는 그런 기업체에게 업무제휴라든지 설계제휴 또는 제품생산 공조라는 명목으로 여러 가지 정보를 흘리세요. 그러면 그들은 제휴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제품 정보를 빼가려고 여러 방면으로 접근을 시도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제품 복사만 되는 것 아닌가?"




"바로 그것입니다. 어차피 사장님 힘으로는 소비자 시장을 선도할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까 올챙이 프로젝트의 최종 산출물에 대한 정보를 여러 경쟁업체에게 흘려주면 그들은 작은 실마리를 통해 제품의 우수성을 알게 될테고 협력보다는 복사하는 방법을 택하겠죠. 제품을 복사했다 싶으면 너도 나도 소규모의 광고를 때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적어도 열군데 이상의 경쟁업체들이 우후죽순 식으로 제품 경쟁을 시작하면 새로운 아이디어 상품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이 조금은 생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돈으로 광고하지 말고 경쟁업체에게 제품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경쟁 관계를 만들라는 얘기지?"




"눈치를 살피며 자기들 끼리 경쟁하듯 복사품을 만들게 되면 영세한 자본을 투자해서 조금씩 광고를 내기 시작할테고 그런 광고를 자주 접한 소비자들의 눈에 가끔씩 들어오게 되는 셈이죠."




"경쟁업체들이 시장 점유를 다 해 버리면 어떻하고?"




"그럴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열군데 이상의 업체들이 난립할 때 까지 뒷짐만 지고 지켜보시면 됩니다. 원래의 개발회사가 힘이 부쳐서 복사품 제조업체를 제재하지 않는다 싶으면 그들은 사력을 다해 소비자 시장을 공략할 것입니다. 때가 됐다 싶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광고비를 쓴다 싶은 규모의 자금으로 변호사를 선임 하시면 됩니다. 어차피 복제품들은 사장님의 제품보다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이 입이 째져라 하며 돈좀 번 것을 자랑할 때 쯤에 가서 변호사를 통해 그들의 수익금을 빗자루로 쓸어 담기만 하면 됩니다."




"그 사람들이 권리를 피해가지 않을까?"




"피해가겠죠. 하지만 특허권 소송을 벌이게 되면 사장님의 회사 이미지는 몇백배 아니 몇만배 상승할 것입니다. 실력있는 회사가 자금란에 허덕이던 끝에 제품을 뺏겼다는 여론이 생기기만 하면 사장님이 어떤 제품을 만들어 내더라도 신기술보유 기업이 생산한 제품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성공이 보장될테니까요."




"자네 말을 들어보니 좋은 전략이군."




"어차피 자다 깨고 나면 신기술입니다. 눈 깜박일 사이에 수없이 많은 제품들이 쏟아져 나오는 세상입니다. 독창성과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소비자의 마음속엔 초코파이 한 개, 껌 한톨만 기억될 뿐입니다. 그런 세상에 살면서 우리가 보유한 기술이 비록 우주 최고라고 치더라도 소비자가 선택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 없는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김박사님은 올챙이 프로젝트의 미래에 대해서도 이미 생각하고 계셨군요?"




탁과장은 송사장 앞에서는 사투리를 절제하며 호칭을 또박또박 붙이고 있지만 여느 자리였다면 몇마디 거들며 시끌한 장터의 난장판을 몇차례 연출했을 것이다.




"올챙이 프로젝트의 미래가 아니라 힘없는 기업이 만든 모든 신제품의 공통된 모습이지."




"그럼 우리회사의 초코파이는 올챙이가 될 수 있으려면 어떻해야 하죠?"




"어려운 질문이야. 기업이 생산한 수많은 제품들 중에 단 한 개라도 소비자의 머릿속에 남게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대박이지. 어떻게든 소비자의 연상속에 떠나지 않을 제품을 만들어 내느냐는 기술자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기획자의 손에 달려 있다고 봐."




"기술이 우선되야 영업이 되는 것 아닙니까?"




"우열이 없지. 기술이 없는 제품이라도 우수한 영업사원은 소비자에게 팔 수 있어. 하지만 나쁜 기억속에 자리 잡겠지. 영업의 최우선 가치는 제품의 사이클이 짧아서 동일 소비자가 반복적으로 동일 제품을 찾도록 하는 것인데 올챙이 프로젝트의 산출물은 내용년수가 너무 길어서 영업사원이 선호하지 않는 제품군이라고 봐야하지. 한번 팔린 제품을 다시 구매할 가능성이 적은 대신 에프터서비스를 요구할 가능성은 높아지기 때문에 제품에 대한 신뢰성을 확보하지 못한 영업사원은 절대로 그런 제품을 시장에 내기를 꺼리게 될꺼야. 그러니까 탁과장 말대로 기술과 내구성에 대한 신뢰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올챙이 프로젝트의 산출물을 판매하려는 자발적인 영업은 기대할 수 없네."




"제가 할 일은 신뢰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드는 것이군요?"




"김박사, 탁과장,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 느끼는 바가 크네. 여태까지는 남이 만든 제품 중에서 시장 반응이 좋은 제품만 골라 되팔아 버리는 회사였다면 이제부터는 내 제품을 다른 사람의 선택에 의해 팔리게 하는 제조회사로써 변화한 것이니 내가 생각하고 정리하고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아졌다는 것을 느끼겠네."




"그렇습니다. 사장님. 지금까지의 영업기획과는 조금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김박사. 자네가 자주 들러 조언해 줄 수 없겠나?"




"찾아 뵙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회사 일에 간섭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정말 판단이 어려운 일에 봉착하면 김박사의 도움을 청하겠네."




잔이 몇차례 돌았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술자리를 피하는 송사장의 평소 버릇대로 호프집에서의 술값을 먼저 계산하더니 자리를 떠난다. 탁과장과 나는 송사장이 먼저 일어나기만을 기다렸으므로 속으로 반기는 마음이 더 컸다.




"행님요. 자리 옮기니 시원합니꺼?"




"응,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주더라."




"거 말고예. 내 안보니 속 시원하냐구예."




"섭하지. 내 그림자 였잖아. 그림자 없는 사람은 귀신 아니더냐? 너 없는 나는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더구만."




"말씀만으로도 고마워예. 행님없이 회의 주관하다 식은 땀나 죽는줄 알았심더."




"자꾸 해 보면 늘어. 힘든 모습 보이지 말고 회의에 앞서 미리 준비를 하면 될꺼야."




"아는게 있어야 준빌하지예. 난 헛깨빈기라."




"그렇지 않아. 올챙이 프로젝트는 완성단계니까. 네가 인화에만 신경쓰면 제품 생산에는 문제 없을꺼야. 다만 송사장께서 성급하게 이익을 환원하려고 무리수를 둘까봐서 내가 미리 얘기한 것 뿐이야. 너는 내가 한 말을 잘 귀담아 듣고 인내하면서 여러 가지 방안을 검토하기만 하면 된다."




"행님말대로라면 쬐그만 회산 아무리 좋은 물건 만들어놔도 팔 수 없단 것이잖아예."




"현실이다. 시대에 앞선 제품을 만드는 것은 항상 중소기업이만 돈을 버는 것은 또 항상 대기업이란다. 올챙이가 포장되서 시장에 나오면 소비자는 외면할 테지만 경쟁업체는 너도 나도 복사를 해 댈꺼다. 그때를 대비하는 것이 너의 업무 중 하나라는 것을 잊어선 안돼."




"알았어예. 난 제품만 나오면 노다지로 바뀔 꿈을 꾸고 살았는데 행님말 들으니 맥빠짐더."




"대비하면 노다지고 방심하면 쓰레기라는 걸 얘기하는 거야."




"행님요. 그나저나 황교수님 곁에 딱 붙어 살게됐으니 좋겠네예."




"실없는 소리 말아. 난 일 때문에 옮긴것이지 사랑 때문에 옮긴게 아니잖니."




"그래두예. 돈 많고 명짧은 여자 하나 챙긴거 아님니꺼."




"누가 명짧데?"




"우히히, 하는 얘긴기라."




"명옥이는 잘 지내니?"




"우리 얼라요? 갠 잘있음더."




"미용학원 다니겠다 했었는데 다니긴 하니?"




"그라믄예. 고놈 딱 뿌러집니더. 행님한테 구사리 몇 번 먹더니만 이 악물고 학원 다녀예."




"생각이 깊은 얘구나. 너도 명옥일 챙길거면 마음 상하지 않게 잘 해주고 아니면 후딱 시집 보낼 궁리나 해라."




"행님요. 지난번 말했잖아예. 전 명옥이랑 살림 차릴끼라."




"제수씨는 어쩌고? 아이들은?"




"갈라설라구예. 명옥이년도 아이들 키울 자신 있다고 벼르던데예."




"말하고 행동이 다를 수 있잖아. 아직 닥치지 않은 일이라서 자신감을 보이는 것일테니까 서뿔리 결정하는 일은 없도록 해라."




"행님요. 제 나이가 서른다섯임더. 제 일은 알아서 할 나이라고예."




탁은 명옥의 얘기만 나오면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탁과장이 부럽다. 자신의 의지를 명확히 밝히고 실천하려고 애쓰는 모습 속에서 비록 남들이 우려하는 나쁜 결과에 도달하더라도 결코 후회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오히려 두 여자를 동시에 소유하고 싶어하며 어떤 희생도 감수하지 않으려는 나의 이중성이 가증 스러워 숙연할 뿐이다.




"어디야?"




숙에게 전화하려고 핸드폰을 열자마자 벨도 울리지 않은 상태에서 숙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길건너 호프집이야. 탁과장이랑 함께 있어."




"금방 갈게. 술 많이 마셨어?"




"응, 송사장도 함께 있었는데 먼저 갔어. 난 다섯잔째 마셨구."




"혀가 꼬부라졌겠네."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탁은 소음 속에서도 전화 목소리를 듣기 위해 잔뜩 찡그린 얼굴을 짓다가 이내 눈치채고 고개를 들었다.




"행님요. 황교수님?"




"어. 그래."




"이리루 온데?"




"응. 한잔만 더하고 일어서자."




"명옥이두 끝날 시간인데 오라구 할까예?"




"근처에 있니?"




"저쪽 사거리 낡은 건물있잖아예. 거기 사층 학원엘 다닌다네예."




"니가 일하나 노나 지켜보고 있었구나?"




"갸가 여간 맹랑해야지예."




숙이 합석하고 조금 후에 명옥이도 합석하니 모처럼 네 명이 함께 자리에 앉았다. 먼 곳까지 운전을 해야 하는 숙을 제외하곤 더위를 이기려는 듯 시원한 맥주잔을 여러차례 비워 나갔다. 명옥도 낚시터에서 함께했던 황교수를 제법 따르며 분위기를 이끌어 나간다.




"김박사님, 저녁식사 안했으면 다른 곳으로 옮길래요?"




숙은 여러사람들 계속 술만 마셔댈 뿐이고 속이 비어있는 상태를 파악하곤 자리를 옮길 것을 제안했다. 우리는 다시 지하도를 건너 식당가 속으로 발길을 옮겼다. 식당가는 숙의 회사 근처에 있기 때문에 가급적 피하고 싶은 장소였지만 술기운 탓에 의식하지 못하고 우루루 자리를 옮기는 중이었다. 일행이 도착한 곳은 쭈꾸미로 유명한 집이었다. 숙을 의식하지 않고 지낼 때는 직원들과 발길을 자주 하던 곳이었지만 어느날 부턴가 이 집에 와본 기억이 가물거릴 정도로 발걸음을 끊었었다. 뚱뚱한 주인은 주방 끝자랑에서 쉴틈없이 오징어 껍질을 벗겨내고 있었다. 얼큰한 고추장으로 범벅이 된 오징어가 익어가는 소리, 술잔이 부딪히는 소리, 매운 탓에 더위를 떨쳐 버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 곳에 있었다.




"어, 회장님."




일행 중에 몇 사람이 황급히 일어서며 숙을 맞이하곤 자리를 권했다. 부장급 정도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숙을 알아본 것이다. 어쩌면 그 사람들은 나를 익히 알아봤겠지만 나는 아직 낯설어 그 사람들이 누군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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