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풍폭우(狂風暴雨) - 3부 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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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장 볼륨을 높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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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가로수는 하나둘씩 젊음을 자랑하던 푸른빛을 던지고 마지막 색채를 뽐내고 있었다. 최후의 발악을 끝낸 나뭇잎들이 거리를 매울 무렵……. 수능을 한달정도 남긴 시점이었다. 월요일 오후 수업을 끝낸 후가 주만의 집 앞에 차를 세웠다. 주만의 어머니, 미정의 야릇한 시선을 눈치 채지도 못한 체 후는 주만의 방으로 들어갔다.
후가 과외를 하는 방식은 독특한 면이 있었다. 여느 과외선생들처럼 설명과 문제풀이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부가된 숙제 내용이 그러했다. 오늘도 주만은 그의 숙제를 검사받고 있었다.
“읽으라는 책은 다 읽어놨지? 빡빡이도 다 해뒀을 테고?”
“예, 싸부님!”
주만은 그를 싸부님 내지는 형이라 부르고 있었다. 후도 두 살 차이에 선생님이라 불리긴 뭣했기 때문에 주만의 호칭을 꺼리지 않았다.
“읽는 데 몇 시간 걸리디?”
“만화책은 권당 평균 30분 정도고, 소설은 한… 두 시간 반 정도 걸렸어요.”
“음 이제, 400페이지 분량을 두 시간 반이라……? 속도는 제대로 붙었구나. 그래 내용파악은 빨리 되든?”
“아직은 속도에 중점을 두다 보니깐 조금 힘들어요. 근데, 싸부! 진짜 이 방법이 먹힐까요? 성적이 오르긴 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데요?”
“이런 무식한 자식!!”
“딱~~!!”
후는 주만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가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고 담배를 물었다.
“아야~~!! 형 그만 때려요. 수능이 낼모렌데……. 머리 쓸 사람, 머리를 때리는 게 어딨어요? 그리고 그 무식하다는 말 좀 그만해요.”
“욘 석이 몇 대를 더 맞아야 정신을 차릴라나? 이놈아! 너같이 무식한 놈들에겐 몽둥이가 약이야. 더 맞아 볼래?”
“아니에요. 싸부~~!! 헤헤~~!!”
“형이 그랬지? 수능은 시간과의 싸움이라고? 빨리 푸는 놈이 장땡이야. 그래야 남는 시간동안 모르는 문제도 다시 한 번 훑어볼 수도 있고, 풀었던 문제도 확인할 수 있는 거야. 전에도 얘기했지만, 형이 소설을 읽으라는 것은 책에 관심을 주기 위해서고, 눈을 훈련시키기 위해서야. 속독능력을 키워주는 거지. 처음 빨리 읽는 것이 숙달되면, 남들이 한 번 읽을 동안 두세 번은 읽을 수 있게 돼. 그리고 더 시간이 지나면, 내용파악을 동시에 하게 되고 요점까지 찾을 수 있어. 남들이 밑줄 그은 부분이랑 관계된 지문 찾는 동안 넌 통째로 읽을 수 있는 거야. 이 무식한 자식아~~!!”
“따닥~~!!”
“아야~~!! 아이, 씨~~!! 말로 하지……. 그건 그렇고 만화책은 뭔가요?”
“그것도 눈의 훈련 중 일부야. 만화책이 뭘로 이루어져 있든? 그림이랑 대사지? 그걸 빨리 읽으려구 해봐. 아마 무슨 내용인지 알기 힘들 걸? 겨우 그림이랑 짜 맞춰서 이해하는 게 대부분일거야. 이것도 숙달되면 한 장 넘기는데 2~3초도 안 걸리게 되지.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니 속도를 따라올 녀석들이 니 동기 중엔 없다는 말이야. 이제 이해가 되냐, 이 돌대가리야?”
“삼국지는 그렇다 쳐도 영웅문, 녹정기는 뭡니까? 무협소설이잖아요?”
“이리 와봐.”
“왜요?”
“빡~~!”
“어른이 부르면 와야지 왜 그리 잔말이 많아? 엄살 그만 피고 일루와. 알았어, 안 때릴게. 그니깐 형이 준 소설이 맘에 안 든다는 거지? 무협지라서?”
“맘에 안 든다기보단, 그렇잖아요? 학생이 무협지를 본다는 거….”
“솔직히 얘기해봐! 읽어보니 재밌지?”
“그건 사실이에요.”
“원래 일이건 공부건 재밌게 하는 거야. 그래야 능률이 오르지. 니게 읽으라고 준 책이 재미없어 봐. 니가 거들떠나 보겠어? 하기야 내가 겁을 쥐서 마지못해 읽을 수는 있겠지만, 형도 그걸 바라지는 않아. 그래봤자 금세 내용을 잊어먹으니까……. 형이 준 것들, 내용을 기억해봐. 무공이니 그런 것 말고, 당시의 정황을 보라구. 김용(金庸), 그 양반은 역사를 기반으로 글을 쓴단 말이야. 영웅문(英雄門)만 봐도 송원교체기부터 원명교체기까지 확실히 기억해둘 수 있지. 그리고 형이 알려준 만화들도 역사를 기반으로 한 것들 아니디? 넌 이놈아, 한꺼번에 수능 세 과목 준비하는 거야. 소설 한번 읽는 것만으로도 언어랑 외국어는 속독으로 카바가 되고, 수리2에서는 세계사 쪽은 어느 정도 거저먹고 들어가는 거야. 알겠냐?”
“아~~! 그런 거구나? 근데 싸부! 빡빡이는 그만 두면 안 될까요? 하구 나면 손가락이 다 아파요. 그리구, 주입식 교육이 나쁘다고 말이 많던데…….”
“따다닥~~!!”
“손을 안 대고 싶어도 니가 자꾸 세상 물정 모르고 까부니깐 이 싸부도 어쩔 수가 없구나. 잘 들어. 아무리 주입식 교육이니 뭐니 해도, 공부의 기본은 암기야. 이해하면 뭐하나? 내용이 기억 안 나면 말짱 도루묵이야. 암기 능력 극대화에 빡빡이 만한 게 없어. 눈으로 보고, 입으로 읽고, 손으로 적는다. 그중에 손이 가장 기억력에 좋다는 거 너도 경험했잖아? 그리고 그냥 빡빡이냐? 나름대로 기억하기 쉬운 방법을 써서 적으라고 했지? 싸부님께서 다년간의 피땀 흘린 노하우를 가르쳐 주시는데……. 인석이 자꾸 개기길 개겨?”
“아이구~~! 수능 두 번 치신 것도 자랑이십니다.”
“근데 이 자식이~~.”
후가 다시 손을 들자 주만이 급하게 어머니를 찾는다.
“엄마~~!!”
거실에 있던, 미정이 방으로 들어왔다. 후는 그녀를 아랑곳 않고, 주만의 머리를 계속 쥐어박았다. 그는 잠시 미정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머니 오셨어요? 이놈이 아직 정신을 못 차려서요. 저희 목마른데 마실 거 좀 주세요.”
미정은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흰색 반팔티에 청바지를 입고 다니는 후의 팔뚝과 탄탄한 허벅지를 주시하며 대답했다.
“선생님. 손 아프시겠다. 제가 몽둥이라도 가져다 드릴까요?”
“엄마~~!! 엄만 누구 편이야~~? 난 주워온 게 틀림없어. 커흑~~!!”
“이눔 자식이 못하는 소리가 없네?”
“빡~~!!”
“크으~~!! 이런 사이비 교사 같으니라고……. 아이구, 아야~~!!”
“하하하…….”
“호호호……. 아차, 내 정신 좀 봐.”
미정이 주방으로 달려가 음료수를 내오는 동안, 후는 주만에게 로그함수를 풀게 하고 창가에 기대어 담배를 폈다. 지금은 후의 방침을 열심히 따라주는 주만이었지만, 처음 봤을 때의 주만은 무슨 반항심에선지 공부보다는 쌈박질과 컴퓨터에 빠져 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석차는 중상위권 이상이었고, 그중에서도 수학은 상당한 실력이었다. 후는 말을 듣지 않는 주만에게 일대일 맞짱을 제의했었다. 주만도 주먹질에는 자신이 있었고, 자신이 지면 귀찮게 하지 않겠다는 후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후가 학창시절 맞고 다닌 학생이라는 것을 그의 친구들은 다 안다. 그런 그가 주만을 이길 수 있었던 건, 동생에게 질 수 없다는 그의 자존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결국 제대로 들어간 럭키 펀치 한 방에 주만의 턱이 돌아가며 기절을 해버렸다. 그것을 알리 없는 주만은 그의 힘에 승복(承服)했다. 그러나 주만이 후를 따르는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주만을 패 준 후가 주만을 설득했기 때문이다. 후는 주만의 고민을 들어주었고, 주만 스스로 해결책을 찾게 하는 방식을 썼었다. 그의 관심어린 시선에 주만도 벽을 허물었고, 그를 친형처럼 따르게 되었다.
후도 막상 녀석이 잘 따라오자 자신보다 머리가 좋은 이 녀석을 가르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그는 자신이 재수할 때 농땡이 치던 방식을 기억해내었다. 당시 그는 수업시간에도 무협지만 읽을 정도로 매니아였다. 주말은 독서실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만화방에서 1박2일간 만화책만 봤던 경험이 수능 때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 매 시간마다 답안지를 확인 하고도 30분 이상의 시간이 남은 그는 현역시절보다 20점이나 점수가 올랐다. 당시는 수능이 200점 만점이었던 시절이었으니 그의 주변은 왈칵 뒤집어졌었다. 지방대도 갈까 말까하던 녀석이 서울로 유학을 오게 된 것이다. 그는 그때의 기억을 토대로 앞서의 지도법을 개발해 냈고, 그것을 주만에게 실험적으로 써보았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후가 주만과의 기억을 떠올리며 피운 담배가 꺼질 무렵, 그 집 막내인 주진이 학원에서 돌아왔다. 연예인이 되는 것이 꿈인 주진은 예고를 다니고 있었다. 167의 작지 않은 키에 귀여운 얼굴과 그에 어울리지 않게 불룩한 앞가슴을 가지고 있는 주만이네의 보물이었다. 정규수업이 끝나면 연기학원과 재즈스쿨을 다니는 그녀에게 후가 가르치는 것은 주로 문제를 통박으로 찍는 방식이었다. 물론 그녀의 부모님은 그것을 모른다. 다만, 후가 그녀를 가르치고부터는 성적이 올랐기에 좋아할 따름이었다.
후도 이 아가씨에게 통박을 가르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도 그녀를 처음 대했을 때 이쁜 여고생으로만 보았으나, 머리가 그렇게 나쁜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주진의 말로는 초등학교 때부터 연예인이 되고자 했기 때문에 공부랑은 담을 쌓은 지가 오래되었다고 했다. 그나마 중학교 때까지는 부모님 성화에 책을 보긴 했으나 고등학교에 들어서고는 아예 포기를 해버렸단다. 그는 주진을 만난 첫 주는 주진과 이야기를 하며 그녀에 대해 파악했고, 그를 토대로 그녀에게 어울리는 방식을 모색했다. 5지선다형이라 1번만 찍어도 80점은 나오게 되어있는 수능에서 6, 70점대를 맴도는 그녀를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200점 이상은 되어야 안정권인 연극영화과에 집어넣기는 무리였다. 후는 생각을 바꿨다.
후는 나름대로의 통박에 관한 철학이 있었다. 재수의 구렁텅이에서 그의 숨통을 트여주는데 그것이 어느 정도 기여했던 것이라, 그의 통박철학은 적당한 체계가 있었고, 여러 가지 응용법이 있었다. 그가 문제를 찍는 방식은 남들과 달랐다. 우선 오답을 골라내는 것이 필요했다. 확실한 오답을 재껴두고 나면, 20%의 확률이 25%, 33.3%, 50%로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누구나가 아는 간단한 논리지만, 정작 사용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리고 정말 난감한 문제에 봉착했을 때에는 지문에 사용된 조사(助詞)를 이용해 오답을 가려냈고, 계산 문제에서도 그만의 방식으로 오답을 추려냈으므로 확률은 더욱 높아졌다.
그는 그것을 주진에게 가르쳐 주었다. 주진에게도 자신에게 공부를 강요하지 않는 이 삭아 보이는 선생님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재밌는 이야기처럼 찍는 방법을 가르치는 그의 지도는 그녀에게도 이해가 쉬웠다. 그녀가 후의 철학을 배우고서 처음 가져온 성적표는 놀라운 것이었다. 후는 그녀가 재미있어 하는 틈을 타 통박을 위해서 약간의 사전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귀띔해 주었다. 주진은 연극영화과의 꿈이 현실로 다가올 것만 같아 그가 던진 미끼를 덥석 물고야 말았다. 그렇다고 해서 후는 많은 것을 가르치려 들지 않았다. 그녀도 주만처럼 소설을 읽게 했다. 그가 가져다 준 책은 주진의 감정이 풍부해질 수 있는, 하이틴 소설이나 멜로물 등이었다. 수학은 인수분해까지만 가르쳤다. 어려운 함수부분을 가르치느니 그 시간동안 다른 암기과목을 가르치는 게 유리하다는 그의 판단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재즈스쿨에서 운동할 때 들을 수 있는 빠른 팝송 테이프를, 심심하면 가사나 외우라는 말과 함께 주었다. 주진의 성적은 두 달도 안 되어 50점이나 올랐다.
후가 두 남매를 가르치다 보니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그는 주만에게 소설은 그만 읽어도 된다는 말과 함께 모 영어사에서 나온 영문판 ‘북경에서 온 편지’를 던져주었다.
“다음 주까지 읽어 놔. 내용 물어보고 모르면 알지?”
그는 주먹을 쥐어 보였다.
“싸부~~!! 이걸 언제 다 읽어요?”
“하루에 20쪽 정도만 읽으면 되는데, 어려워? 그럼 ‘안네의 일기’로 할까?”
안네의 일기( 이 책은 해석판만 300쪽이 넘는다. )를 아는 주만은 비굴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 싸부도~~!! 농담인거 아시믄서~!! 헤헤~~!!”
“그리고 주진아!”
“응, 오빠!”
그녀는 후에게 반말을 했다. 미정은 버릇없다고 나무랐지만, 후는 여동생이 없었기에 그녀의 반말이 듣기 좋았다. 그는 도서관에서 빌려온 ‘이야기로 풀어쓴 사자성어’라는 책을 들이밀었다.
“버스나 지하철 타고 다닐 때 읽어. 도움이 될 거야. 대신 기한은 보름이야!!”
“잉~~!! 학원 다니고 그럼, 시간 없는데…….”
그녀가 후의 팔에 매달렸다. 후도 가슴의 말랑한 감촉이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상대는 그가 가르치는 학생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이용해야함을 아는 선생님이다. 이윽고 그녀의 팔을 풀러낸 그에게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다정했다.
“대신 쌤이 가져다주는 거 다섯 권씩 읽을 때마다 놀이동산 데려가줄게.”
“오빠! 진짜지? 거짓말 아니지? 그럼 책 더 줘. 얼른 다섯 권 채울 거야.”
덩치만 컸지 주진은 아직 어린 애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주만의 아버지도 흐뭇한지 웃음을 지었다. 그가 막 인사를 하고 대문을 나와 그의 세피아로 걸어갈 때였다.
“선생님 잠깐만요.”
멀리서 미정이 손에 무언가를 뜰고 달려오고 있었다.
“어머니, 뭔데 이렇게 힘들게 들고 오세요. 주만이 시키시지…….”
“이거 받으세요. 보약이에요. 이번에 주만이 거 짓다가, 선생님이 요즘 들어 야위어 보이시길래 하나 더 지어온 거예요. 진맥도 안하고 지은 거라 몸에 맞을라나 모르겠네.”
“제가 뭐 하는 게 있다고 이런 걸 다 주십니까?”
“애들 성적 올려 주신 거 생각하면, 이보다 더한 것도 드려야 지요.”
후는 ‘더한 것’이라는 말을 할 때 그녀의 눈에 생긴 이채를 느꼈으나, 잘못 본 것이겠지 하고 그냥 넘어갔다. 보약이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었으나, 성의를 무시하긴 힘들다. 더군다나 요즘 세 여인을 상대하며 기력이 딸림을 느끼는 그에겐 가뭄에 단비 같은 것이었다.
“어쨌건, 지어오신거니 고맙게 잘 먹을게요. 대신 다음부터 이러지 마세요.”
“아유… 섭섭하게 그런 말이 어딨어요? 드시고 괜찮으면 말해요. 또 지어다 드릴 테니까요. 아니 다음에는 진맥까지 해서 짓는 건 어때요?”
“아닙니다. 이것도 과분한데요.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네. 조심해서 가세요.”
그녀는 그 말을 하며 후의 엉덩이를 톡톡 쳤다. 왠지 쓰다듬는 듯한 느낌에 후가 잠시 움찔거렸다. 그러나 그는 내색 않고, 차로 돌아가 시동을 걸었다. 그의 차가 골목을 돌아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서 후를 배웅한 그녀의 표정은 묘한 미소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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