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X - 8부
본문
황부장, 직원 회식인가?”
“네, 저희 팀 단합대회입니다.”
“사적인 모임 때문에 온 것이니까 개의치 말아요.”
“옆에 계신 분은 엊그제 새로 오신 김박사님 이시죠?”
아는 체 하지 않을 수 없다. 가볍게 목례하고 서둘러 자리에 앉았지만 수많은 귀가 우리의 얘기에 쏠릴 생각을 하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황부장이야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인 만큼 오늘의 만남을 잊겠지만 다른 직원들은 회장의 사적 만남에 대한 상상의 날개를 펼칠 것이다. 더구나 명옥이가 근무했던 룸싸롱에 한두번 와본 사람이라면 그녀를 알아봤을테고 오늘의 모임이 평범한 것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있다.
“어쿠, 박사님. 오랜만이네요.”
“김사장, 장사 잘되는군요?”
“경기가 어려워서 손님이 많이 줄었습니다.”
“홀이 꽉 찼는데 경기 타령하면 쓰겠소?”
“욕심인가요? 암튼 경기를 타긴 합니다.”
주문할 필요도 없이 주방쪽으로 손가락을 네 개 벌려 보이며 주인은 소주병 하나를 꺼내왔다. 종업원은 주인이 걸터 앉은 자리에 눈치껏 밑반찬을 들이댄다. 얼추 안주거리가 되겠다 싶을 때 김사장은 잔이 넘칠 정도로 소주를 따라주며 내게 건냈다. 반가운 사람이다. 쭈꾸미 가게를 개업한 첫날 만났던 기억이 났다. 거만하면서도 어설픈 모습으로 카운터를 보던 사람이었다. 어느날 출근해 보니 이메일을 통해 해고통지를 받곤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는 대기업 부장출신이다. 쫒겨나기 전엔 상상도 못했던 물오징어를 뜯는일에 자신의 또 다른 인생을 걸고 사는 사람. 하지만 수많은 실직자 중에서 성공한 당당한 사례가 될법하다. 거만한 태도는 아직 남았지만 고객관리를 철저히 함으로써 많은 단골을 확보하며 골목에서 터를 잡았다는 얘기를 들을만 했다.
“박사님. 몇 달 전 고추가게 사장하고 한잔 했다는 소문 들었습니다.”
“그분이 워낙 고집스럽게 한잔 하자는 통에 그랬지요.”
“그렇지 않다던데요. 박사님이 인간적으로 잘 해줘서 감동 먹었다 하던걸요.”
“감동? 어이쿠 사람은 다 똑같지요. 장사한다고 사람이 아닙니까? 그 분이 워낙 열심히 살아가는걸 보면서 오히려 제가 감동 먹었는걸요.”
“저는 외롭단 생각이 많이 듭니다. 부장할 때만해는 제 앞에서 설설 기던 직원들도 참 많았는데 이 일하면서는 모두가 왕처럼 받들어야만 하니...”
“하하, 그럼 나중에 제가 김사장 한잔 대접할테니 어서 일 보세요.”
“그래줄랍니까? 저도 사람 대접 받게 신경 써주십시오.”
김사장은 예전에 누렸을 당당한 권위를 포기한 탓에 수많은 손님들을 얻었지만 자신이 살아왔던 많은 세월속에 축적된 셀러리맨에 대한 그리움을 지워 버리지 못한듯했다.
김사장과 얘기하는 사이에 쭈꾸미가 빨갛게 익어 있었다. 탁과장이 부지런히 오징어를 뒤적이는 사이에 명옥은 쌈을 싸서 부지런히 숙의 손에 쥐어 주고 있다. 한 두잔의 소주가 더 들어가면서 주변 사람들의 소음에 익숙해지더니 어느새 알아들을 수 없는 수많은 소리들 속에 우리의 일상도 빨려 들어가 버렸다. 등줄기에선 쭈꾸미의 매운 맛이 땀이 되어 흐르고 있다.
우리 일행은 황부장이 일어서기 전에 먼저 자리를 떴다. 무슨 얘기를 주고 받았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숙과 명옥이 술잔을 입에 대지 않은 몫까지 나와 탁이 마셔댄터라 두 사람의 얼굴이 달아 올랐다. 모처럼 무의미한 언어 속에 일상을 던졌던 신선함 보다 쭈꾸미 집을 나서며 골목에서 불어대던 바람이 신선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행님요. 이젠 어델가지예?”
“집에 가야지.”
“아따, 시끄라버서 한마디도 못했다 아인교.”
“뭐 할 얘기 있었니?”
“당연하지예. 행님 조용한데 가서 한잔만 더 합시더.”
“황교수님과 명옥이는 운전하려고 술 한잔도 못하고 있는데 어딜 또 가자고?”
“확, 드라이브 합시더. 이 동넨 발에 치이는게 아는 사람뿐 아닙니꺼.”
명옥은 드라이브를 하자는 소리에 귀가 쫑긋해지며 표정이 밝아졌다. 숙은 잠시 생각을 하는 사이에 탁과장은 재차 드라이브를 하자며 졸라댄다. 어린 아이같이 보챌때가 귀엽다.
“좋아. 우리 집에 가자. 여자라고 술 한잔 못하란 법 있어?”
“어머, 교수님 댁에 초대하는 거에요?”
“그래. 명옥아, 강북강변으로 쭉 가다가 양평쪽으로 가는 길 나오면 쭈욱 가면 되거든. 그 길이 끝나면 우리 집인데 드라이브 코스로도 좋지만 우리 집에서 밤새도록 술 잔을 기울여 보자.”
“저는 그쪽 길 잘 몰라요.”
“그래? 그럼 김박사님이 명옥이 차를 타고, 탁과장님은 내 차를 타세요. 박사님이 우리 집을 아니까 혹시라도 뒤따라오다 잃어버리면 도와 줄꺼야.”
“어머, 박사님이랑 타고 오라고요?”
명옥의 얼굴이 순간 붉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탁과장이 숙의 차에 올라타고 출발하자마자 나는 명옥의 조수석에 앉아 숙의 차 꽁무니를 쫒아 가기 시작했다.
수 많은 가로등이 불빛을 쏟아내고 있었지만 창틈으로 보이는 강변은 늦장마 덕분에 넘실대는 강물로 바다처럼 보였다.
“아저씨, 그동안 죄송했어요.”
“오히려 내가 미안했다.”
“탁 오빠한테 못할 짓을 한것도 알아요.”
“사랑이란 우연히 오는 것이란다. 너의 두사람을 원위치 시켜보려고 많은 노력을 했지만 결국은 두 사람이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 발전했지않느냐. 가정을 이룬 사람이 또 다른 사랑을 찾으면 파국이 온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너를 맡긴 것이 원인이었어. 하지만 탁이가 워낙 강한 의지로 너를 택한다니 어쩌면 너의 운명인가 싶어 이젠 말리지 않는단다.”
“제 가슴속엔 아저씨만 있었어요. 죽어도 변치 않겠다고 수없이 다짐했었는데 어느날 오빠의 여자가 되어 있었지요. 사랑 때문인지 천성 때문인지 저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 스러웠어요.”
“너는 당당하게 사랑을 찾을 권리가 있단다. 탁이 놈이 분별없이 너를 혼란 속에 밀어 넣지만 않았다면 또 다른 사랑을 찾을 수 있었겠지. 이젠 두 사람의 의지가 명확하니 흔들리지 말도록 해라.”
“아저씨를 처음 만났을 때 아저씨의 여자가 됐더라면 지금처럼 혼란스럽지 않았을꺼에요. 저의 삶을 바로잡아주고 희망과 용기를 주셨던 분의 가슴에 못을 박을 일도 없었겠죠.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뒀다면 수없이 제 몸을 스쳐간 또 하나의 헤프닝에 불과했을테니까요. 하지만 이젠 제가 택한 사랑을 놓치지 않을꺼에요. 탁 오빠는 이젠 제 사랑이니까요.”
창문을 통해 강물을 바라봤다. 넘실거리던 물결은 상류로 올라갈수록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명옥을 처음 만났던 날. 사람들 앞에서 발가벗겨진 채 안주를 올려놓던 식탁이 되어 있었다. 더 많은 사람들은 그녀의 존재를 그져 하룻밤 불장난을 위해 선택했을 뿐이다. 정신과 육체가 황폐해진 그녀를 위해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단지 그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성적유희를 갖도록 배려했을 뿐이었다. 그녀의 매끄럽던 나신이 코 끝에 와 닿았다. 기억의 편린들은 어렵지 않게 나의 후각에 환상처럼 다가왔다. 굴곡있는 몸매와 도톰한 젖가슴이 손 안에 잡히는 듯했다. 따뜻하며 부드러운 입술이 목줄기를 타고 들었다. 지금이라면 목메어 매달리던 명옥을 뿌리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때 명옥을 가볍게 밀쳐낸 일 하나만으로 그녀의 인생은 완전히 반전된 것이다. 창가에 얼굴을 바짝 내밀고 피우던 담배 꽁초가 손 끝까지 타들어왔다. 뜨겁다. 화들짝 정신을 수습하곤 앞차를 찾아보니 이미 숙의 차는 멀지감치 사라지고 있었다. 핸드폰을 들어 탁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탁과장, 적당한 공간이 나오면 차 좀 멈춰. 강물 좀 구경하고 싶거든.”
“알았어예. 그렇잖아도 교수님이 전화 때리라카던데예.”
숙의 차가 팔당 수문이 바라다 보이는 작은 공간에 멈추고 명옥의 차도 그 옆에 멈추었다. 네 사람은 가까이에서 억수로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를 보며 연신 감탄을 멈추지 않았다.
“내 어릴 때 꿈은 로봇트가 아니었어.”
“먼데예?”
“세상이 온통 물에 덮히는 꿈을 꾸곤 했지.”
“우와, 억수로 겁나는 꿈이네예. 수재민 만들어서 머할라꼬예?”
“몰라. 사람들이 물 때문에 피해를 입는다는 생각은 못했으니까. 멀리서 뚝을 때리는 거대한 산을 보고 싶었지. 성난 파도가 자꾸 가까이 다가서면 죽어라도 뛰어 도망가는 것이 내 꿈이었으니까.”
“아저씨, 참 별난 꿈을 꾸셨네.”
“세상이 온통 물로 가득 차면 높고 낮은 산들도 없어질테고, 힘쎄고 약한 사람도 없어질테고 잘사는 사람 못사는 사람도 없어질테니까. 난 모든 것이 평등한 세상을 꿈꿔왔나봐.”
“그런 세상은 없어요. 자기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며 살다보면 높은 사람 낮은 사람, 잘사는 사람 못사는 사람이 생기게 마련이죠. 기회는 균등하게 하되 능력은 차별화하는 것이 옳다고 보니까요.”
“모두 맞는 말이지. 다만 어릴 때 꿈이 그랬다는 것이야. 세상이 모두 물에 잠기면 살아남은 돼지 몇 마리, 송아지들, 힘껏 산꼭데기로 피해낸 몇 사람들만으로 이 세상을 다시 만들고 싶었던 것이야.”
“행님요. 세상을 밝게 보는 줄 알았더니만 그게 아니네예.”
“하하,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어릴 적 소망이 잘못일까?”
“불가능한 생각을 아직까지 하면 뭘하노?”
“그래. 내가 꿈꾸던 세상은 절대로 오지 않을꺼야. 꿈도 바꿔야겠지. 인류의 행복을 위해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로봇을 만들자며 수많은 밤을 세우는 미친 과학자의 길에만 충실하면 되겠지.”
“아뇨. 그런 세상은 올꺼에요. 반드시 세상이 뒤집혀야만 오는 것은 아니에요.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기준을 갖을 수 있도록 더 많은 사람들의 교육에 힘쓰면 언젠가는 불투명하고 고집스러운 사람들의 세상은 쇠퇴하고 투명하고 합리적인 사람들의 세상으로 바뀔테니까요.”
“가망성 없어. 적어도 내가 로봇을 설계하며 제일 힘들었던 부분은 스스로 생각하는 영역이었거든. 생각이란 주관적인 것이야. 주관은 자신으로부터 출발하지. 그 출발점은 경험으로부터 존재하고. 지금의 모순된 현상들로부터 경험된 주관이 생성될 때 미래에는 조금 더 나아지겠지 하는 기대를 절대 할 수 없는 것이야. 내가 만들어야 하는 것은 순결하고 지순한 이성을 지닌 헤더인데 그것이 로봇의 인류 공헌 여부를 결정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주게되겠지. 하지만 모순된 생각 자체과 이기심으로 똘똘 뭉쳐있는 내 손에서 그런 순수한 이성의 결정체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사실이 암담할 뿐이야.”
“사람의 이성은 결함을 자체적으로 보정할 능력이 있잖아요. 로봇의 머리를 설계할 때도 경험보다 더 많은 경험으로 부족한 부분을 보정할 수 있을꺼에요.”
“인간처럼 복잡하지 않고 사악하지도 않은 로봇의 머리를 만들려면 내 스스로가 순결해야하는데 정말 가능할까?”
“모든 기준은 영원불변이 아니에요. 그냥 그 시대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울타리를 기준으로 보면 일탈로 보일 뿐이죠. 이 세상의 진리는 자연현상을 빼면 모두 상대적일 뿐이죠.”
“맞아요. 행님. 거 머시냐. 사우디에선 일부다처제가 인정되잖아요. 우리 시각으로 보면 이상해 보이겠지만 그 사람들 눈에는 부러움이라니까예.”
“짜식. 아무데나 갖다 붙이네.”
일행은 다시 차를 몰았다. 밤이 깊어가면서 뜨거운 공기도 어느 정도 식었는지 달리는 차창 틈으로 시원한 바람이 들어온다. 명옥의 차를 인도하기 위해 숙은 속도를 줄이며 조금 앞섰을 뿐이지만 사람의 형태를 알아보긴 어려운 밤이다. 수동기어를 넣던 명옥의 손이 내 무릎위에 얹어졌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진다. 꿍꽝거리는 설레임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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