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풍폭우(狂風暴雨) - 5부 12장
본문
제 5 장 젊은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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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이 대답했다.
“순영이가 여기 있다고 얘기 해줬어.”
“순영이가?”
“그래. 순영이가 우릴 불렀어.”
“우리?”
“그래! 우리!”
후는 순진의 대답을 들으며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순영이가 어떻게……?”
“걔도 여자야!”
“순영이가… 어디… 까지 알고 있어……?”
“거의 다…….”
“거의 다가… 어디까지야?”
“니가 다친 것까지…….”
“집에서는……?”
“아직 모르셔.”
그녀들은 번갈아가며 대답을 했다. 그들의 대화는 짤막했지만, 그간의 모든 사정을 담고 있었다. 후는 잠시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도 방학이 끝나기 전에 그녀들을 한 번은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는 아니었다. 그가 원하던 만남은 친구로서의 다짐을 받기 위한 것이었지, 아직까지 마음의 정리가 되지 않은 - 모든 것이 들통 난 상태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궁지에 몰린 그는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곧 자리로 돌아올 제자들을 생각하며,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대화의 주도권을 잡아야함을 알았다.
“그래. 차라리 잘 됐다. 나도 너희들 집에다가는 어떻게 설명할까 고민했었는데……. 오늘 찾아온 이유는 뭐야? 너희도 이유가 있어서 여기 온 걸 거 아냐?”
“독한 척 하지 마! 오랜만에 봤는데 부드럽게 못 대해줘?”
“독한 척 하는 거 아냐! 있는 그대로 대할 뿐이야! 애들 온다. 이따 얘기해.”
시스터즈가 뒤를 돌아보니 블루스 타임이라 아이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는 어느 정도 주도권을 뺏은 상태로 대화를 중단할 수 있음을 다행으로 여겼다.
“언니 왔어?”
“누나가 여긴 왜 왔어?”
“민철이 너 감시하러 왔다. 어쩔래?”
순영이 나머지들에게 순진과 순정을 소개해줬다. 후와 시스터즈의 관계를 아는 그녀는, 시스터즈와 가족관계에 있다는 사실과 후의 학교 친구라는 사실만을 이야기했다. 이후의 술자리는 소연에서의 그것을 보는 것 같았다. 후는 소연에서 하듯이 그녀들을 대했고, 시스터즈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현장에서 가닥이 잡힌 후의 걸쭉한 농담은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기 충분했고, 한 병의 양주와 열 병의 맥주가 더 비워진 분위기는 극에 달했다. 다만 순영만이 그 상황이 사상누각(砂上樓閣)처럼 보일 뿐이었지만, 그녀도 셋의 딴청에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두 시간 정도를 더 떠들고 마신 그들은 다음을 기약하며 그곳을 나섰다. 택시를 타러 가는 길에 순진이 동생에게 말을 꺼냈다.
“순영아! 니가 알아서 집에다 잘 얘기해줘. 순정이 네에 가서 잔다고……. 그리고 오늘 나 만난 적 없는 거다?”
“알았어. 걱정 붙들어 매셔.”
“철아! 너도 오늘 나 만난 적 없다. 집에 가선 입 꾹 다물고 있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순정의 말에 민철이 궁금한 듯 말을 꺼낸다.
“누나 어디 가? 나랑 같이 가는 게 아니고? 형! 무슨 일 있어요?”
민철이 동시에 두 사람에게 물어오자 후가 대답했다.
“응, 동아리 일이야. 다음 주에 졸업하는 선배들 환송식이 있거든. 그리고 너희들 셋이서 순영이부터 바래다주고 들어가. 주진이야 주만이가 있다지만, 순영이는 혼자가야 될 거잖아. 자 이거 택시비하구……. 이 정도면 충분할 거야.”
후는 미리 시스터즈와 이야기된 거짓말을 하고는 지갑 속에서 돈을 꺼내 주만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택시에 오르는 녀석들에게 마지막으로 주의를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니들! 이따 집에다 확인 전화할 테니까 행여나 딴 데로 샐 생각하지 마! 알았어?”
후는 제자들을 태운 택시가 사라지자 시스터즈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을 꺼냈다.
“자~! 어디로 갈까?”
“방으로 가!”
“나도 거기가 좋겠어.”
후가 생각하기엔 그의 옥탑방은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그의 방은 순진에게는 아픈 기억의 장소일 것이고, 순정에게도 질투심을 유발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곧바로 그 생각을 그녀들에게 전했다. 하지만, 그녀들의 대답은 의외였다.
“순진이랑 너 때문에 힘들었던 시절보다는 그 방에서 같이 보낸 일주일이 그래도 나았어.”
“그래, 거기 가면 세피아도 있잖아. 어차피 둘 다 섞였으니 본전이나 매한가지야.”
그는 아무래도 좁은 방안에서 이야기하기에는 찜찜함이 있어 마지막 카드를 꺼내들었다.
“내가 저번에 너희보고 그 방에 찾아오지 말라고 했던 것은 기억 안 나?”
“그렇게 말한다면 넌 더 할 말이 없지. 상황이야 어찌됐건 너랑 우리랑은 헤어진 상황인데 우리가 꼭 니 말을 들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순정아 그건 아닌 것 같아. 후가 너한테 부탁하나 들어준 댔잖아? 그거 쓰면 되잖아?”
“그 수가 있었네?”
그녀들도 비장의 한 수로 후에게 대응했다. 하지만, 후도 할 말이 남아있었다.
“내가 얘기했잖아? 우리 관계에 대한 부탁은 안 된다고……. 네 부탁은 아무리 잘 봐줘도 한계를 넘은 것 같아.”
후의 말에 순진이 다시 맞받아친다.
“그거 너무 주관적이라 생각지 않아? 이야기 장소 정하는 게 그거랑 무슨 상관이야?”
“그래! 그리구 난 아직까지 부탁한다고 말한 적 없어. 생각해보니까 저번엔 니 맘대로 했잖아? 그러니까 이번엔 우리 맘대로 할래.”
“무슨 말이야? 방금 부탁한다고…….”
당황해하는 그의 말을 순진이 끊고 부연 설명을 한다.
“순정이가 언제 부탁한다고 했어? 그런 수가 있다고만 했지. 그러구 보니까 저번에 내 부탁 때문에 울아빠랑 일하는 거라고 했지? 나도 그때 부탁한다는 말한 적 없잖아? 그러니까 내 부탁도 하나 들어줘야 공평하지, 안 그래?”
“맞아! 우리한테 그 놈의 공평을 지키시던 분이신데 당연히 들어주시겠지……?”
시스터즈는 둘이서 북 치고 장구 치며 모든 것을 결정해버렸다. 후는 그냥 처음부터 그러자고 할 것을 잘못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처음부터 확 휘어잡고 대화를 시작했어야 옳았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본전도 못 건진 지금 더 이상 끌어봤자 자신만 손해일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그는 자취방으로 향하는 택시를 잡을 수밖에 없었고, 뒷자리에 앉은 그녀들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집 앞에 도착한 그가 그녀들에게 물었다.
“술 더 마실 거야?”
“난 방금 거로도 충분해! 순정이, 넌?”
“나도 됐어.”
“그럼 나만 마시면 되겠네?”
그의 이야기에 시스터즈는 입을 모아 고함친다.
“그만 마셔~~!!”
고함을 지른 순진이 다시 그에게 말했다.
“우리 저번처럼 니가 술 마시고 얘기한 것은 안 듣기로 했어. 그러니 오늘은 그만 마셔. 지금도 안 마신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난번보단 낫다고 생각해서 하는 얘기야.”
그 말을 뱉은 순진은 먼저 올라간 순정의 뒤를 따랐다.
시스터즈는 오랜만에 와보는 그의 방이 정겨운 듯 눈들이 반짝였다. 그녀들은 마치 자신의 집인 양 가지고 있던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가더니 침대를 차지하고 앉아버린다. 말없이 뒤따르던 후는 주방에서 음료수를 꺼내들고 방으로 갔다. 밝은 데서 보니 그녀들의 얼굴이 지난 한 달간 많이 야위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가슴이 아팠지만, 먼저 입을 열어야 했다.
“그래, 이제 너희들이 하자는 대로 됐어. 다른 거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내 궁금한 점부터 풀어줘. 순영이가 어떻게 알았어?”
“순진아 ! 얘가 아직 자기 처지를 잘 모르나봐?”
“그런 것 같지? 야~! 천 후! 니가 우리 두 사람에게 죄인이라는 거 너도 인정하지?”
“응……? 그래!”
후는 그녀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기에 그렇노라고 대답을 해주었다. 순진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죄인답게 행동해야지! 지난번에 니 행동이 죄인의 그것이었다고 생각해? 방귀뀐 놈이 성낸다고……. 딱 그 짝이잖아! 죄인 주제에 누가 맘대로 판단내리래? 아니 그런 것 뿐만 아니라도 민주주의 공화국에서 너 혼자 결정 내린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일은 우리 세 사람 사이에서 벌어졌으니 우리 셋의 의견을 종합해야하는 것 아냐?”
“그런 거라면 그날 내가 너희들에게 충분히 납득할 만큼 설명해줬잖아? 왜 아직도 부족해? 다시 설명할까? 내가 너희들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것 나도 잘 알아. 내가 너희를 떠나보내는 것은 너희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야. 너희도 날 사랑한다면 더 이상 날 나쁜 놈으로 만들지 말아줘.”
순정이 그의 말을 받았다. 둘은 미리 준비라도 한 듯 죽이 척척 맞았다.
“사랑하니까 떠나달라고? 무슨 유행가 가사 쓰니? 우리가 얘기했잖아? 우린 니가 나쁜 놈이라도 니 곁을 떠나기 싫다고……. 그리고 우린 미친년 소리 들을 각오도 돼있고, 그 뒤의 문제도 나름대로 해결책을 찾았어. 그건 외국 나가서 살면 돼. 나랑 진이는 영문과니까 생활하는데 그리 지장도 없을 것이고, 너도 2개 국어 정도는 어려운거 아니잖아? 거기서야 누가 우릴 욕하겠어? 안 그래? 행여나 가족들이 놀러오면 나머지 한쪽이 잠시 다른 데로 여행이나 가면 그만이잖아?”
후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길게 연기를 내뿜은 그가 이야기했다.
“너희들! 순영이 입 막을 자신 있어? 난 여자들을 못 믿겠어. 순영이를 못 믿겠다는 게 아니라 여자이기 때문에 못 믿겠다는 거야. 지금 너희 상황을 보고나니까 더 그래. 이 철없는 아가씨들아. 언니가 되어가지고 좀 있으면 고3이 되는 동생에게 그런 거나 말하고, 둘 다 부끄럽지도 않아? 나도 순영이가 어떻게 알았는지는 대충 짐작이 가. 그건 나 때문이겠지. 내가 그날 이후로 순영이 과외를 맡는다고 하는 게 아니었어. 현장 나가는 것도 그렇고……. 그 땐 나도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었고 충분히 감당할 자신이 있었는데 말이야. 어쨌든 순영이가 눈치가 빠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주의를 못한 까닭이었어. 그런 이후에는 우리 셋 다가 조심을 하지 못한 때문일 거야. 나도 잘한 게 없으니까 너희에게 뭐라고 말할 처지는 못 되지만, 너희도 너무했어. 순영이가 근래 들어 나한테 농담을 잘 안하는 것이 기억나. 내가 순영이보고 ‘처제’라고 안 부르고, 너희들이 매일같이 붙어 다니며 술이나 마셔대는 데 모른다면 순영이가 바보지. 그러니 호기심 많은 순영이 성격에 분명 꼬치꼬치 캐물었을 거고, 나머지는 너희들이 얘기했겠지……. 아니 순영이가 수험생이 아니라 하더라도 부끄러운 짓이야, 그건……. 난 방금도 순영이랑 민철이 얼굴, 쳐다보지도 못하겠던데……. 둘 다 정말…….
지금 와서 이런 얘기가 무슨 소용이야? 어쨌건 순영이가 알았으니 이제 우리 관계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어. 순영이가 아무리 입을 다물고 있는다 한들 어른들이 눈치 못 채실 것 같아? 그분들은 우리보다 몇 십 년을 더 사셨고, 우리를 길러주신 분들이야. 우리나 순영이가 약간의 빈틈만 보여도 아실 거라구. 너희도 저번에 우리 어머니 뵌 적 있지? 그 아줌마가 한 순간에 우리 관계 눈치 채신 거 기억 안 나? 물론 너희들의 제의를 들어보니 그건 나도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야. 그렇게 될 때까지 우리가 조심한다면 괜찮은 방법이기도 하고……. 그래, 그건 너희 둘 사이에서 나중의 일을 생각해두지 못한 것은 내 불찰이라고 해두자. 아마 내가 준비했더라면 다른 모두에게 비밀로 준비했을 테니 이런 결과는 나오지 않았을 지도 몰라. 그런데 너희가 몰랐던 것이 있어. 너희 방법을 실행하려면 순영이 입부터 막아야 하는데 거기서부터 벌써 문제가 있다는 거야. 이제 아무리 순영이를 잘 타이른다고 해도 그건 불가능하다고 봐. 순영이가 사내자식이었다 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그녀들에게 순영이 문제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순영이는 처음 셋의 관계를 알았을 때는 후를 욕했지만, 시스터즈의 눈물에 그녀들의 편이 되어주었고 그들과 정보를 공유했었다. 기실 외국에 나가서 산다는 것도 순영이 제의한 것이었기에 그녀들은 후의 지적과 같은 부분은 예상조차 못했다. 그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녀들의 눈에는 절망이라는 단어가 자리 잡고 있었다. 후는 그녀들에게 차마 마지막 일침을 가할 수가 없었다. 노련한 사냥꾼은 짐승을 몰아 잡을 때 도망갈 구멍을 놔둔다고 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짐승이 야수로 돌변해 사냥꾼을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후는 자신의 울타리 안을 불모지로 만들어 그녀들을 몰아냈다. 이제 내몰린 그녀들에게 스스로 돌아갈 기회를 주어야 함을 그가 깨닫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내가 하는 말이 이해됐다면 좋겠어. 나 씻고 올 게…….”
그가 그 다음을 이야기 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분명한 축객령이었다. 그가 다시 욕실에서 나오기 전에 자리를 뜨라는……. 그녀들은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떨어뜨렸다. 후는 그녀들의 눈물을 보기가 힘들었다. 방안의 조명을 끈 그는 방문과 현관문을 열어둔 채로 욕실로 들어갔다. 그는 샤워기의 찬물을 틀고 머리를 쳐 박았다. 찬물을 맞으니 머리가 조금 맑아진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타고 내려온 물에서 짠맛이 난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눈물이라고 여기진 않았다. 물에서 짠맛이 가실 무렵, 그는 이제 충분한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찬물을 오래 맞은 탓인지 그의 머리가 빠개지는 듯했다. 그가 몸을 닦은 후 욕실 문을 열어 고개를 내미니 열어둔 두 개의 문이 닫혀 있는 것이 보였다. 그의 입에선 아쉬운 한숨이 몰려 나왔다. 팬티만 입은 그가 방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사라졌어야할 두 여인이 옷을 벗은 채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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