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스 - 1부 2장
본문
양수와 채영 일행은 민아의 오빠(?)에게 향하는 길이었다. 갑작스러운 보호자의 등장에 양수는 순간 당황했지만 그다지 걱정하지는 않았다. 양수는 민아의 오빠(?)의 정체를 내심 이 세 미인의 운전기사이거나 짐꾼쯤으로 여겼다. 이정도 미인의 남자친구라면 이들 셋이 노는 데 같이 어울리거나 최소한 근처에서 지켜보는 것이 정상이었기 때문이다.
“언니.” 수영장 반대편을 보고 민아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멀리서 민아의 손짓에 답하는 여자에게 양수와 제민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본 여자의 모습은 채영 일행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 주었다. 긴 생머리를 틀어 올린 여자의 모습은 섹시하면서도 청순했고 청순하면서도 귀여웠다. 여자는 얇은 매트 위에서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책을 읽고 있었다. 그리고 여자의 늘씬한 다리를 덮은 비치 타월 위로 남자가 여자의 무릎을 벤 채 잠들어 있었다. 얼굴을 여자의 품 안으로 하고 있어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그다지 크지 않은 키에 평범한 체격이었다. 여자는 마치 고양이를 쓰다듬듯 남자의 머리카락을 편안하게 어루만지고 있었고 여자의 행동 하나하나는 기품이 어린 듯 한 고고한 모습이었다. 여자는 약간은 의아한 모습으로 양수와 채영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민아가 다시 반갑게 인사하려 하자 여자는 급하게 입을 귓가에 대 보였다. 그러자‘아차’하며 민아가 남자를 가리키고는 두 손을 볼에 대 보였다. 아마도 잠들었냐는 뜻인 것 같았다.
“(속삭이며) 오빠 자요, 지민 언니?” “그래, 지금 막 잠들었어. 그러니까 조용히 해.”
“그런데, 더 놀지 뭐 하러 왔어? 여기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여자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아, 저 그게” 민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리가 풀에서 놀다가 이 분들하고 우연히 어울렸는데 잠시 쉴 겸 바에 가서 한 잔 하려고.” “풀에서 저 분 들하고 같이 어울렸다고?” 여자의 의심스러운 눈초리가 채영에게 향하자 채영이 당황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아냐 언니. 이번엔 내가 그런 게 아니라 진짜 우연이야 우연.” “우연?”“그래 우리끼리 놀다가 우연히 민아가 넘어진 걸 저 분이 일으켜 주시려다가.”
지민의 눈초리에 채영이 당황한 듯 변명하자 보다 못한 양수가 앞으로 나섰다. “저기,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저흰 그렇게 이상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채영씨 말씀대로 정말 우연히 어울리게 된 거구요. 뭔가 의도가 있었다거나.” “아뇨 그렇게 들렸다면 죄송합니다. 두 분을 오해한 건 아니고 저 녀석한테 워낙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서.” 지민이 정중하게 사과했다.
“오빠가 싫어하겠죠 언니?” 소희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아니 뭐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바로 요 앞에 가는 건데. 그리고 내가 뭘 어쨋다구 그래 언니는?”
“(미소 지으며) 조용히 해, 주인님 깨겠다. 그리고 이제까지 니가 일으킨 사건들을 몰라서 하는 소리야?” “내가 뭘! 내 미모에 남자들이 반한 거지 내가 남자를 유혹했나?”
채영이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리자 소영과 민아의 웃음이 터졌다. 지민도 웃으며 여자들을 만류했다. “조용히 해, 오빠 깨겠다니까.”“이미 깼어, 저 목소리에 누가 계속 자겠어.”
남자의 목소리에 지민을 포함한 여자들이 모두 반색하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지민의 무릎에서 몸을 일으킨 남자는 눈이 부신 듯 눈살을 찌뿌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남자는 아이처럼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런 남자의 뒷목을 지민이 부드럽게 안마해주었다.
한참이나 지민의 손길을 즐기던 남자가 채영 일행을 바라보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소희가 얼른 남자의 손을 잡고 힘껏 당겼다. 소희의 힘에 일어난 남자는 잠시 휘청하는 듯 하더니 소희의 어깨에 축 처진 몸을 기대었다. 소희는 웃으며 남자를 안아주자 남자는 긴 머리가 찰랑거리는 소희의 어깨에 칭얼거리듯 얼굴을 부벼 댔고 소희는 남자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한참이나 소희의 체취를 즐기던 남자가 고개를 들자 채영이 기다렸다는 듯 남자의 허리를 감쌌다. 남자의 손길이 채영의 볼을 스치고 내려오다 풍만한 가슴에서 머물렀다. 남자가 장난스럽게 채영의 비키니 탑을 들춰 보자 채영은 몸을 앞으로 기울여 남자가 잘 볼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채영과 장난을 치는 남자의 등을 민아가 톡톡 쳤다. 남자가 뒤돌아보니 민아가 볼에 바람을 잔뜩 불어넣은 채로 남자를 흘겨 보았다. 아마도 자신을 봐 주지 않는 다는 무언의 항의 같았다.
남자는 귀엽다는 듯 민아의 볼을 손가락으로 찌르더니 민아의 허리를 끌어 당겼다. “꺄~”비명을 지르며 민아가 남자에게 끌려 갔고 민아와 채영은 경쟁적으로 남자의 품을 파고 들었다.
남자를 대하는 여자들의 태도에 양수는 황당하기 그지 없었다. 채영을 제외하고는 양수, 제민과의 스킨십에 약간의 거리감을 보이던 여자들이 남자에게는 적극적으로 다가서는 모습이었다. 당황한 제민과는 달리 양수는 남자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일행 분이 있는 줄 모르고 실례를 했네요.” 양수의 말에 남자가 고개를 돌렸고 양수는 남자의 얼굴을 처음 바라볼 수 있었다. 여자라 해도 믿을 만큼 하얀 얼굴의 남자는 양수를 보고 해맑게 웃었다. 남자는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넘어갈 만큼 유약한 모습이었다.
양수는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남자에게 악수를 청했다. “신양숩니다.” “박응수라고 합니다.” 응수의 손을 힘 주어 잡은 양수는 속으로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양수에게 손을 잡힌 남자는 손이 아파 쩔쩔매는 모습이었다. 양수의 경험상 여자들은 매너 있으면서도 강한 남자의 모습에 본능적으로 끌리는 법이다.
“그런데, 제 대신 저 세 마리가 심심해하는 것을 달래주셨다고요?”응수의 말에 양수가 놀라 여자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여자들은 ‘마리’라는 표현을 듣지 못한 듯 자기들끼리 수다를 떠는 모습이었다. 저 정도의 미인들을 ‘마리’라는 표현으로 부른다? 역시 넌 이 여자들 친척 오빠거나 운전기사 따위에 불과해. 양수의 머리가 순간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우연히 어울리게 됐습니다. 불쾌하셨다면 사과 드리죠.” “아뇨 오히려 제가 감사 드려야죠. 양수씨가 아니었다면 저 셋이 지루하다고 절 괴롭혔을 테니까요.”
“맞아요, 오빠는 이런 데 와 봐야 맨날 지민언니 품에서 잠만 자요. 우리가 뭐 하는 지 신경도 안 쓰고.” 민아가 응수를 향하여 혀를 내밀며 투덜거렸다. 소희가 민아의 행동을 보고 안절부절못했지만 응수는 귀엽다는 듯 민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다들 바에 가서 뭐라도 마실 거라면서?” 응수가 지민을 향해 물었다.
“응! 같이 가요 오빠.”채영이 반색하며 응수에게 매달렸고 다른 여자들도 기대하는 표정으로 응수를 바라보았다. 지민이 어떻게 하겠느냐는 표정으로 응수를 바라보자 응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 까지는 50미터 남짓한 짧은 거리였지만 응수는 거의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걷고 있었다. 민아는 응수와 어깨동무 한 채 목을 조르듯이 끌고 가고 있었고 반대편에는 채영이 응수의 팔에 거의 매달리다시피 하며 걷고 있었다. 소희만이 지민과 이야기를 하면서 응수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도 소희는 민아가 흐트러뜨린 응수의 머리카락을 정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바에 도착하여 응수가 자리에 앉자 여자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수가 뚱한 표정으로 지민을 바라보자 “화장실”이라며 지민이 매혹적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 그런 줄 알았으면 저쪽에서 미리 갈 걸 그랬네요.” “아뇨(웃으며) 여자들은 많은 이유로 화장실에 가거든요.”
남자들만 남겨진 테이블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을 깨는 양수의 탐색전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응수씨도 저 분들하고 같이 어울리시지 왜 나와 계셨어요? 다들 지루해 하시던데.”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런가요. 신경 안 써도 알아서 잘 들 놀길래 좀 쉬고 있었는데.”
“저런 미인 분들이면 제가 아니어도 다른 늑대들이 가만 있지 않을 텐데, 불안하지 않으신가 보죠.”
“원래 이런 곳이 새로운 만남을 갖기 좋은 장소잖아요. 그리고 늑대면 잡아 먹히라고 하죠 뭐. 그런 경험 한번쯤 있는 것도 예방 주사 차원에서 좋지 않겠어요?”
응수의 말에 양수는 다시금 응수와 여자들과의 관계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확신을 가졌다. 일행 중 한 명이 자신의 애인이라면 우연히 만난 다른 남자 앞에서 저렇게 대책 없는 말을 할 리 없었다.
“참, 그러고 보니 우리 마실 거 주문해야죠.”응수가 갑자기 생각난 듯이 말했다.
“여자 분 들 오시면 시키는 게 좋지 않을까요? 뭘 드시고 싶어하는 지도 모르고 저희 마음대로……”
“상관 없어요. 시간 절약할 겸 그냥 하죠.”양수와 제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응수는 웨이터를 불렀다.
“먼저 시켜요. 양수씨. 뭐로 하실래요?” “아(당황하며) 전 하이네켄으로 하죠.” “네, 저도 그럼.”
양수와 제민이 당황하며 주문을 마치자 응수가 웃으며 웨이터에게 말했다. “음, 그럼 하이네켄 둘 하고 스크루 드라이버 약하게 한 잔, 그리고 피나 콜라다 하고 아이스 커피 블랙으로 한 잔, 그리고 미모사 되죠?”주문을 쏟아 내던 응수가 웨이터를 바라보았고 웨이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러스티네일 한 잔 주세요. 아 그리고 (웃으며) 아이스커피에는 얼음 많이 부탁해요.”
응수의 태도를 보고 양수는 오늘 작업이 어쩌면 의외로 빨리 끝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들은, 특히 채영이나 민아 같은 미인들은 어려서부터 남자들에게 받는 배려와 호의, 관심을 당연하게 알고 살아 온 존재들이고 자신의 의사를 묻지 않는 결정은 자신을 무시하는 행동으로 여길 터였다. 그런 면에서 자신들의 취향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 응수의 행동을 자신을 돋보이게 해 주는 배경이 될 것이었다.
“오빠.” 양수가 뒤를 돌아보니 지민 일행이 돌아오고 있었다. “와서 앉어.”
“어, 마실 거 와 있네. 목말랐는데 잘됐다. 내꺼지, 오빠?” 민아가 테이블을 보고 반색했다. “흠, 커피 놓여 있는 거 보니까 여기가 내 자린가 보네? 웬일이야?” 지민이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소희도 자연스럽게 미모사가 놓여 있는 자리에 앉으며 수줍게 말했다. “신경 써 주셔서 고마워요 오빠.”
응수의 말에 여자들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기 자리를 찾는 것을 보고 양수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상황이 자신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 저 시킨 거 마음에 드세요? 마음에 안 드시면 지금이라도 다른 걸로.”상황을 흔들어보려는 양수의 시도가 이어졌다. 제민이 눈치를 채고 얼른 그 말을 받았다. “그래요. 이거 저 사람, 아니 저 분이 그냥 막 시키신 거니까 맘에 안 들면 말해요.” 여자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양수와 제민을 쳐다봤다.
“이거, 응수오빠가 시킨 거죠?”채영이 제민에게 물었다. “네, 우린 여자분들 오시면 주문하려고 했는데 저 분이 그냥 막.” 채영이 응수를 귀엽게 흘겨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흠, 할 수 없죠. 오빠가 원래 좀 독재거든요.” “독재?” 제민이 채영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네, 오빠는 이기적이라서 뭐든 자기 마음대로 하거든요. 먹는 것, 입는 것, 뭐든지 다요.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어쩔 수 없다 구요?” “오빤 우리보다 우릴 더 잘 알아서 뭐든 오빠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하면?” “최고의 선택이죠.”지민이 그 말을 듣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또, 또 오빠 독한 거 마시는 구나!” 응수의 손에 든 잔을 보고 민아가 소리치자 여자들의 시선이 응수에게 모아졌다. 응수가 잠시 주춤하는 사이 민아가 응수의 손에 든 잔을 빼앗아 한 모금 마시고는 토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채영도 응수의 잔을 조금 맛봤다. “러스티네일이네. 이거 엄청 독한데.”
“딱히 마실만한 게 없어서.” 응수가 머리를 긁적이며 변명했다.
“이거 마시고 또 지민언니 품에서 잘려 그러죠 오빠!” “맞아, 우리한테 신경도 안 써 주고.”
“오빠가 좋아하는 거니까 마셔도 상관은 없지만……” 소희의 조심스러운 투정이 이어졌다. “그래도 조금 약한 거 마시면 안돼요 오빠? 오빠가 봐 주지 않으면 저나 민아 채영이 전부 여기 온 의미가 없으니까.” “보고 있었어. 여기서 너희 수영하고 노는 거.” “에~~! 거짓말, 말도 안돼”
응수의 어설픈 변명에 여자들의 원성이 빗발치자 지민이 중재에 나섰다.
“피곤해요 주인님?” “지금?” “응.” “글쎄, 뭐 잘 모르겠어.” “원래 늘 그러잖아.”
지민의 묘한 매력의 미소가 계속 응수를 공략했다. “몸 컨디션 그렇게 나쁘지 않으면 여기서는 가벼운 거 마시고 풀에서 애들하고 어울리는 게 어때? 어차피 술은 이따 아지트 가서 많이 마실 거 같은데.”
“맞아요, 맞아~.” “지민언니 파이팅.”여자들의 응원이 지민을 든든하게 받쳤다.
“그거 마시고 또 내 품에서 자면 애들이 심심하고 서운해 해. 오죽 심심하면 채영이가 다른 남자를 쳐다봤겠어?” 지민의 말에 채영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렇게 하시죠. 이런 장소에 자주 오는 것도 아니니까 와서 충분히 즐겨야죠.” 양수가 노련하게 한 발 빼는 모습을 보였다. 응수가 웃으며 양수의 말을 받았다.
“전 또 가끔 오는 것도 아니어서요.” 응수의 말에 지민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 갔다.
“자꾸 그렇게 말하면 엄마한테 말해서 정말로 자기 못 들어 오게 할거야.”
“에, 언니 그럼 나도 안 와.” “맞아요 오빠 없이 무슨 재미로 와.”
여자들의 수다로 시끄러워지자 응수가 손을 내저으며 상황을 정리했다. “자, 자 알았으니까. 여기서는 맥주 한 잔으로 합의하자고. 지민 말대로 나도 온 김에 물에도 들어가 봐야 하니까.””꺄~~.”
여자들의 반가운 함성과 그 사이로 웨이터를 불러 새롭게 맥주를 주문하는 응수의 모습을 보고 양수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대체 이 녀석의 정체는 뭐란 말인가? 저 작고 약해빠진 모습의 사내에게 이 미인들이 황홀해 하는 이유는 뭘까? 저 녀석에게 내가 미처 모르는 뭔가가 있다는 뜻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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