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야설

감기 - 2부 20장

본문

감기 - 27 개미의 날개 14






한동안 창밖의 야경을 바라보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지하 2층에 


도착했을 때 홍보부장은 이미 꽁초가 되어 버린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끄며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늦었군. "


"텅 빈 사무실을 보니 씁쓸한 기분에 저도 모르게.. 죄송합니다. "


"큭큭.. 조금전에는 대차게 잘도 대답하던 자네가 그렇게 센티멘탈 해 질 때도 있나? "




이야기를 하며 앞장 선 홍보부장의 뒤를 따라 걸어가자, 주차장 한 구석에 세워진 검은색 인


피니티 G35가 거울같은 윤기를 흘리며 주차되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제가 알고 보면 유리같은 영혼의 소유자거든요. "


"크하하하... 최근에 들었던 유머 중에 단연 최고일세. 일단 타지? "




도어가 열리는 경쾌한 소리가 들린 후 홍보부장이 운전석에 타는 것을 확인하고 나 또한 조


수석에 몸을 실었다. 벤츠 S 클래스 만큼 고가의 차량은 아니지만, 한 번도 타보지 못 했던 


인피니티가 주는 묘한 실내 분위기가 마치 처음 서울에 올라 온 사람의 그것처럼 차내의 이


곳 저곳을 살펴보게 만들었다. 안전벨트를 메면서도 한 곳에 눈길을 주지 못 하고 있는 내 


모습이 재미있는지 홍보부장이 차에 시동을 걸며 장난을 걸어 왔다. 




"왜? 이 차도 탐이 나나? "


"큭큭.. 그러면 주실 겁니까? "


"크하하하.. 재미있어. 정말. 사내 부하직원과 대화를 하며 이렇게 웃기는 처음이군. "




지하 주차장을 빠져 나온 후 어디론가 방향을 잡고 달려가는 홍보부장이 왼팔을 윈도우에 


느긋하게 올린 채 운전을 하고 있었다. 




"자넨 아직 차가 없나? 집과 거리가 꽤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


"예전에는 누비라를 타고 다녔는데.. 동해기획 다닐 때 사고가 났었지요. "


"아.. 면접때 내게 말했던 그 사고 말인가? "


"예. 그때 파손된 후에 아직 차를 구입하지 못 하고 있습니다. "


"그래. 그럼 언젠가 차를 구입할 텐데.. 생각해 둔 거라도 있나? "




아직까진 난 딱히 언제 새 차를 구입할 거라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놓지 않았었다. 다만 


결혼한 후에 자금의 여유가 생긴다면, 예전 동해기획에 있을 때 보다는 좀 더 큰 차를 구입


하는 것이 안전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만 가지고 있었다. 오피스텔과 회사의 거리가 


먼데도 불구하고 구입을 미루고 있었던 것은 조만간 그녀와 결혼을 하게 되면 어느 정도의 


비용이 필요하게 될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뻔히 출혈이 예상되는 시기를 앞두고 


필요없는 비용을 소모하는 것 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고 동해기획에서 광고를 만들며 세뇌


받은 탓이라고 할까. 




"아직은 구체적인 것은 정하지 못 했습니다. 다만 구입하게 된다면 차는 큰 차가 좋을 거 같


다고 막연히 생각중입니다. 그때 사고도 소형차 이기에 좀 더 다쳤던 것 같기도 하구요. "


"동해기획은 광고회사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우리회사와 다를 것 같지만.. 이런 쯧.."




아슬 아슬하게 신호에 걸린 홍보부장이 한 차례 혀를 찬 후에 차를 정차 시키며 조금전에 끊


겼던 말을 이었다. 




"이곳 본사는 보수적인 곳이네. "


"지금 하신 말씀의 뜻은 차량 구입에도 부하직원이 신경을 써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


"역시 자네는 예리해.. 큭큭.. "




재미있는 것을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웃고 있는 홍보부장은 내가 그의 장난감이 된 듯한 기


분을 가지게 한다. 그는 날 위해 편하게 해주려 하는데도 불구하고, 내 마음의 한 켠에는 그


것을 온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한 채 뭔가 불편한, 마치 따뜻하게 잘 지어진 밥알속의 모래알


처럼 입안을 껄끄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런 내 얼굴 표정을 숨기기 위해 오른쪽 차창밖을 응


시하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상사보다 상위의 차량을 몰고 회사 주차장에 세워 놓으면.. 당장은 


몰라도 아주 천천히, 그리고 노골적으로 그들의 눈밖에 나게 될 수가 있네. "


"그들이라면.. 조금전 회사에서 말씀하셨던 경영진 말씀입니까? "


"그렇네. 그들은 지나치리 만큼 보수적이네. 자신의 주위에 보이지 않는 수 많은 선을 그어 


놓고, 그 선을 침범한 이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 부류가 바로 그들이지. 특히나 자신보다 밑


에 있는 이들에겐 아주 가혹하네. "




홍보부장과 경영진, 그리고 이 놈의 회사마저 정이 떨어지고 있는 마당에 그런 말까지 들으


니 왠지 부질없는 짓일지 몰라도 그 말에 힘껏 반항하고 꿈틀거리고 싶은 욕구가 치밀어 올


랐다. 그를 쳐다보며 비릿한 조소를 입에 가득 머금었다. 




"큭큭.. 겨우 그딴 것으로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는 부류라니.. 그럼 제가 마이바흐를 타고 오


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


"호.. 자네 돈 많나? "


"제가 그런 돈이 어디 있겠습니까. 100만년 할부를 내죠. "


"큭큭. 자네가 그걸 끌고 온다면.. 일단 만년 과장은 확정이고, 그 후에는 지방의 한적한 지


사에 발령가는 수순을 밟게 되겠지. 그들은 자넬 그렇게 만들 힘이 있는 사람들이네. 자네의 


눈에는 그저 쓸 때 없는 자존심 세우기로 보일지 몰라도.. 힘과 의지가 있는 이들에게 그런 


것은 자존심이 아니라 특권이 되는 거네. "




우리가 내릴 곳에 도착했는지 차의 속도를 천천히 줄여가던 홍보부장이 도심 한 곳에 차를 


세우며 조금전의 말을 계속했다. 




"그룹의 본사라는 특이한 조직안에서 살아 남으려면, 그 차이를 알아야 하네. 역시 혼자 가


는 것 보다 둘이서 이야기를 하는 게 더 빠른 거 같군. 일단 내리게. 다 왔네. " 




도심의 평범한 도로에 주차를 하자, 이윽고 어디서 나타났는지 깔끔한 옷을 차려입은 남자


에게 키를 던져 준 홍보부장이 아직도 무슨 상황인지 구분하지 못 하고 있는 날 잡아 끌고 


어디론가 데리고 가고 있었다. 




"함부로 차를 맡겨도 되는 곳입니까? 발리 파킹은 도난도 많이 당하는데.. "


"몇 번 본 터라 괜찮아. 그건 그렇고 자넨 내가 지금 어디로 데리고 가는지 짐작이 가나? "


"글쎄요. 강남에서도 이렇게 한적한 곳에 뭐가 있을지.. "




세상의 모든 찌꺼기가 한 곳으로 모이는 하수구의 구멍같은 강남 중심과 달리, 같은 강남임


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그 더러움의 흔적이 덜 한 강남의 최외곽 이곳에서 홍보부장은 과연 


무엇을 보여주려 날 데리고 가는지 호기심을 가득 품은 채 그의 뒤를 따라갔다. 얼마 걷지 


않았을 때 평범한 건물의 엘리베이터 앞에서 홍보부장은 또 예의 그 장난스러운 웃음을 머


금으며 내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서 타게. 지금부터 재미있을 걸세. "


"엘리베이터가 도착한 곳에 가면, 장기기증 서약서에 도장찍게 되는 것 아닙니까? 큭큭.. "


"뭐? 크하하하하. 정말 재미있어. "




그가 누르는 엘리베이터 단추 옆에는 그 층수에 들어와 있는 광동실업이라는 작은 안내판이 


상하층을 이어져 붙어 있다. 




"광동실업.. 네이밍 센스가 정말 좋군요. 조폭의 냄새가 물씬 풍깁니다. "


"하하하.. 그만 웃기게. 도착하고 내가 소개 해 준 사람에게 꼭 물어보게. 조폭이냐고. 큭큭. "




도착벨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것과 동시에 보이게 된 광경에 난 홍보부장


의 얼굴을 바라 볼 수 밖에 없었다. 이미 그런 내 표정을 예상했다는 듯이 웃음 가득한 얼굴


로 내 어깨를 살짝 떠밀며 앞으로 걸어간다. 




"딱 보니 자네도 익숙한 곳이지? 따라 오게. "




엘리베이터 앞을 커다란 수족관으로 장식하고 있는 룸싸롱 복도를 걸어가자 지금까지 우리


를 기다렸다는 듯이 짙은 보라색 벨벳 원피스를 입은 한 중년 여인이 다가오며 홍보부장에


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해 왔다. 




"오늘은 조금 빠르시네요. 늘 늦으시더니.. 후훗. "


"이 친구와 이야기를 하면서 오니 이상하게 빨리 도착하게 되는군. 안내 해주게. "


"예. 그럼 이쪽으로.. "




기다리면서 회사 주차장에서 예약을 마쳤는지 테이블에는 홍보부장이 주문한 듯한 Remy 


Martin XO가 뚜껑을 따지 않은 상태로 올려져 있었다. 밥이나 한끼 얻어 먹을려나 하는 가


벼운 생각으로 응했다가 난데없이 룸에 끌려오게 된 나는 아직도 이 상황이 이해가지 않아 


그를 쳐다보며 무언의 질문을 내던졌다. 술 값이야 돈 많아 보이는 부장이 낸다지만, 이곳으


로 데리고 온 이유를 알아야 먹던 말던 할 것이 아닌가. 아무리 공짜라지만. 




"큭큭.. 이 친구가 이번에 새로 입사한 디자인지원팀 과장일세. 서로 인사하게. 이 사람은 이


곳 대표일세. 아, 그리고 이 친구가 말일세. 오면서 여기가 조폭소굴이 아닌지 어찌나 무서


워 하는지 말이야. 큭큭.. 자네는 가서 장기기증 서약서 몇 장을 가져 오게 " 


"네? 오호호호.. "




상석에 앉은 홍보부장의 옆에 앉아 있는 그녀가 입을 가린 채 눈웃음을 지으며 웃음을 흘렸


다. 잠시간 웃음을 흘리던 그녀가 몸을 일으켜 내게 정식으로 인사를 해 오자, 술집 마담이


지만 나 또한 처음 대면한 첫 인사이기에 함께 일어나 인사를 나누었다. 




"처음 인사드려요. 광동실업의 대표, 손예린이라고 합니다. 술 값을 다 못 내시면 장기를 대


신 받고 있습니다. 호호호.. "


"남해무역 홍보부 과장 선우영입니다. 제가 그간 다녀 본 곳과 이름부터 달라 처음에 실례를 


한 것 같습니다. "


"괜히 어중이 떠중이가 오는 게 싫어서 이렇게 영업하고 있지요. 저희가 원하는 분만 오시게 


되니 무척 좋답니다. "


"그런 뜻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사과드립니다. "


"아니예요. 무척 재미있었는 걸요. "




이렇다 할 간판도 없고 룸싸롱이라고 눈치를 챌 만한 건물의 어떤 흔적도 찾아 볼 수 없는 


곳에 끌려오며 한 내 말을 그대로 마담에게 전달한 홍보부장은 그녀와 몇 마디의 장난을 더 


한 후 내게 술잔을 건냈다. 




"한 잔 받게. "


"죄송합니다. 부장님. 그때 사고가 난 후에는 아직 술을 못 마시고 있습니다. 병원에서도.. "


"아, 그런가? 이런.. 그럴 줄 알았으면 이곳으로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니었는데. "


"아닙니다. 비록 제가 술을 마시지 못 하지만, 부장님의 잔을 채워드릴 수도 있고.. "


"난 남자보다 여자가 채워주는 술이 더 좋다네. "


"오호호호.. 술은 역시 남녀가 나눠 마셔야 제맛이지요. "




퇴원을 할 때 술을 마시지 말라는 말을 들은 적은 없었지만, 아직은 술을 입에 담는 다는 것


은 꺼려지는 것이 많아 거짓말로 부장의 술잔을 고사했다. 언젠가 이런 감정들 또한 내 머릿


속에서 지워버려야 할 것 중에 하나 일테지만, 지금 당장은 오래전 그 날에 대한 기억과 조


금이라도 엮인 것은 하나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홍보부장의 빈 술잔에 술을 채워 담


은 마담이 내게 눈웃음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어왔다. 




"그럼 과장님께는 어떤 걸 준비해 드릴까요? 편하신 것으로 말씀 주시겠어요? "


"음.. 홍차가 있으면 부탁드려도 될까요? "


"예, 마침 괜찮은 다즐링이 있는데 준비해 드릴께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


"감사합니다. "




부드러운 몸짓을 남기며 그녀가 문밖으로 사라지자, 조금전까지 들었던 궁금증을 홍보부장


에게 함축적인 말로 넌지시 물어 보았다. 




"이곳 마담은 부지런 하군요. "


"큭큭.. 당연히 모두에게 그런 것은 아니지. 만약 이곳을 오는 모든 손님에게 그런 다면 굳이 


간판까지 떼면서 영업을 할 필요가 어디 있겠나? 나이 어린 계집들에게 시켜도 충분한 일을.. "




조금전 마담이 채우고 간 술을 들이킨 후 담배를 꺼내 입에 문 홍보부장이 몇 번 가슴속 깊


이 연기를 들여 마시며 말을 이었다. 




"이곳은 아주 조용한 곳이네. 그래서... 얼마전 까진 대표이사님과 나, 그리고 경영지원부장, 


인사부장, 재무관리실장 이렇게 5명이서 머리 아플 때 마다 오던 놀이터라네. 그러니 마담


이 직접 차를 가져 오지. "


"호오.. 여기에서 돈을 꽤 쓰신 모양입니다. "


"이곳 테이블 몇 개는 우리가 낸 돈을 새로 샀을 걸? 저 밖의 물고기 몇 마리도.. 큭큭.. "


"그럼 얼마 전까진 여기가 놀이터였다면 지금은 아니라는 말씀이시군요. "


"자넨 광고인의 버릇이라 그런지 몰라도.. 예리한 것은 좋지만, 가끔은 흘려 들어야 할 것도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아. 그 이상은 자네가 간부가 된 후에 알아도 늦지 않아. "


"죄송합니다. "


"질책하는 말이 아닐세. 다른 이에게 같은 실수를 하지 말라고 하는 충고니까. "


"예, 명심 하겠습니다. " 




술잔이 빈 홍보부장의 술을 채워주고 몇 마디의 말을 더 나누고 있을 때, 작은 유리 잔을 조


심스러운 손길로 들고 있는 마담이 문을 열고 내게 다가왔다. 




"어떤지 한 번 맛을 보시겠어요?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담홍색으로 잘 우려진 홍차가 든 찻잔을 손에 들고 잠시 흔들다 코에 가져가 냄새를 맡아 보


았다. 술집에서 이런 것을 마시게 될 줄은 몰랐던 만큼 기대밖의 향긋하고 진한 향이 코속깊


이 파고 들어와 담배로 찌들었던 내 더러운 폐를 깨끗하게 씻어주는 느낌이다. 빛깔과 향기


가 합격이라면 이제는 그 맛을 느껴 볼 차례. 온기가 사라지지 않은 찻잔을 조심스럽게 가져


가 조금씩 입안으로 흘려 보낸다. 씁쓸하면서도 시큼한, 그러면서 뒷끝의 긴 여운을 남기는 


다즐링만의 진한 향이 입안을 넘어 머리까지 울려 퍼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홍보부장이 


이곳에서 꽤 중요한 고객이라더니 차 한 잔에 들어간 정성을 보아도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호오.. 이거 정말 제대로인데요. 올해 제가 접했던 홍차중에 가장 잘 만들어졌습니다. 직접 


하신 건가요? "


"그럼요. 후훗. 사실 아이들에게 시키면 물만 붓고 가져오기 일쑤지요. 요즘 애들이 이런 것


을 할 줄 알기나 하나요? 호호호.. "




그녀의 자화자찬이 밉지 않아 보일 정도로, 지금 내가 마시고 있는 다즐링은 한 두번 만들어 


본 솜씨가 결코 아니었다. 그녀와 홍보부장은 술잔을 들고 난 홍차가 든 찻잔을 들어 한 번


의 건배를 나눈 우리는 그저 가벼운 몇 가지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홍보부장이 옆의 마담에게 술을 채워주며 그녀의 얼굴을 쳐다 본다.




"며칠 전에 오니까 없더군. " 


"그날 동창회 갔었죠. 호홋, 그래서 며칠 동안 안 오셨던 거예요? "


"꼭 그렇지는 않아. 큭큭.. 그런데 동창회는 재미있던가? "




홍보부장에게 살짝 눈을 흘기는 것으로 조금전 그의 말을 대신 한 마담이 채워진 술잔을 살


짝 들며 말을 했다. 




"뭐, 괜히 나갔다 싶었어요. 별 것도 없는 것들이 어찌나 지 자랑을 하는지.. 호홋.. "


"큭큭.. 안 봐도 훤 하군. 꼴 같지도 않은 것들이 까부는 것 만큼 같잖은 것도 없지. "




방금 마셔 버린 마담의 잔을 채운 홍보부장이 이번에는 내 얼굴을 쳐다보며 조금전 말꼬리


의 화살을 날려왔다.




"자네는 동창회를 나가 본 적이 있나? "


"대학교때 한 번 나가 보니 별로 더군요. 겨우 몇 잔의 술 사주면서 한 번 동문은 영원한 동


문이라는데 웃겼습니다. 그 후로 가본 적이 없습니다."


"큭큭.. 사실 동창회나 기웃거리는 것들이 별 볼일 없는 녀석들인 건 사실이지. "




"그 말의 저의에는 당신도 들어가거든"이라는 속뜻을 숨긴 채 내뱉은 내 말에 잠시 짧은 웃


음을 흘린 홍보부장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말 마저 틀린 것은 아냐. 요즘 세상에는 아직도 학연과 지연이라는 보이지 않은 


끈이 거미줄처럼 무수히 얽혀 있거든. "


"그렇다면 부장님께서도 그 끈을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는 뜻입니까? "


"글쎄? 그건 중요하고 안 중요하고의 의미가 아닐세. 한 조직에서 피라미드의 정점을 향해 


걸어 갈려는 자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심각하게 생각해 볼 수 밖에 없는 문제야. " 


"꼭대기층을 바라보는 그 분들 중에 부장님도 포함된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




두 번 연달아 공격한 내 말에 홍보부장과 마담의 눈길이 마주치더니 잠시 웃음을 서로 흘린


다. 내 대답에 웃고 있는 그들에게 "어차피 난 이제 회사에 정이 없거든"이라고 쏘아 붙이고 


싶었지만 그저 삼킬 수 밖에 없었다. 난 아직 지렁이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밟으면 


그저 꿈틀거릴 뿐, 내가 원하는 곳으로 스스로 갈 수 조차 없는 그런 하찮은 미물이었다. 




"자넨 아직 과장에 불과하니 내 말이 그리 깊게 느껴지지 않을 지도 몰라. 하지만 부장이란 


단순한 직급이 아니야. 부장이라는 직급이 가지고 있는 진짜 의미는 사원과 경영진을 구분


짓는 그 경계선의 바로 밑, 메니지먼트 언더 라인이라는 숨겨진 뜻이 중요해. "




그제서야 부장이 오늘 이 자리를 빌어 내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가 내


게 원하는 것이 단순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지금 그가 하는 말의 저 깊은 곳에 숨겨진 


뜻은 피라미드의 정점에 올라 서기 위해 내가 그 발판이 되어 주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이해


되었다. 그런 이해가 맞는 것인지 난 확인하기 시작했다.




"제게 원하시는 것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


"역시 예리해.. 자네는 내가 말을 하기가 누구보다 편해. "




대리운전 기사가 운전해 주는 홍보부장의 차를 타고 오피스텔로 돌어 오면서 내 머릿속은 


엉켜버린 실타례 마냥 어디서 부터 무엇을 풀어나가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익숙한 8


자리 숫자를 도어락에 눌러 장금장치를 해제 한 후 오피스텔에 들어와 옷 부터 벗었다. 깨끗


하고 차가운 오피스텔 공기에 적응한 내 코가 조금전 룸에서 베인 담배와 술 냄새, 그리고 


희미한 마담의 향수 냄새를 느끼게 했다. 속옷까지 모두 벗어 한 곳에 뭉쳐 놓은 후 화장실


에 들어가 뜨거운 물에 몸을 맡긴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네. 피라미드를 구성하는 수 많은 돌들 중에 가장 믿을 수 있는 돌을 난 


자네라 믿고 싶을 뿐이야. 내가 위로 올라가는데 나 조차 의심하지 않고 디딜 수 있는, 그리


고 그 어떤 위협으로 부터 날 지켜주는 그런 튼튼한 돌... "




내 몸위로 쏟아지는 물줄기가 머리와 등허리를 타고 흐르며 좁은 화장실 안을 자욱한 안개


처럼 뿌연 수증기로 채우기 시작했다. 저절로 입가에 비웃음이 머금어 졌다. 차라리 수증기


가 없었더라면 지금 이 기분 그대로 하얀 김이 서린 거울뒤에 숨어 있는 내 얼굴에 주먹을 날


려 버릴 수 있으련만. 뿌연 물방울로 가려진 거울이 오늘 처음으로 원망스러웠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단단한 성벽처럼 말이야. 자넨 날 지키는 그 성벽의 돌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면 되네. 내가 자네에게 바라는 건 그것 뿐일세. " 




물기를 닦지도 않고 벌거벗은 채로 화장실 밖으로 나오자 온 몸의 소름이 돋으며 욕지기가 


절로 세어 나왔다. 




"씨발.. "




그 누구에게 하는 욕설인지 방향도 없는 한 마디가 허공으로 세어나와 사라진 후, 차가운 기


운에 부들거리는 몸을 추스리며 수건으로 몸을 닦고 침대로 몸을 뉘인다. 모든 것이 귀찮았


다. 속옷을 입는 것도, 머리를 완전히 말리는 것도, 모든 것이 귀찮고 모든 것이 싫었다. 숨


막히고 더러운 도시에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싫었다. 지금 자다가 눈을 떴을 때 


내가 전혀 모르는 곳에서 일어나길 바랄 뿐이었다. 누군가 내 몸을 밟으려 하는데, 이렇게 


구석에서 홀로 꿈틀걸리 수 밖에 없는 내 처지가 너무 한심하고 미울 따름이었다. 




수업을 하고 있을 때 학교로 여동생의 연락이 도착했다. 조교가 전해 준 다급한 내용에 병원


으로 달려갔을 때는, 며칠 전 집에서 보았을 때까지만 해도 건강한 모습이었던 어머니는 이


미 환자의 모습으로 바뀌어진 채 였다. 평소 즐겨 입으시던 옷에서 환자복으로 갈아 입었을 


뿐인데 건강했던 어머니는 단 며칠만에 암 환자가 돼 버린 것이다. 뛰어 오느라 숨을 헐떡 


거리고 있는 내 모습을 병원 침상에 누워 힘없이 웃으며 보고계신 엄마에게 다가가 손을 잡


았다. 언제 였을까? 마지막으로 엄마의 손을 이렇게 잡아 본 것이. 아무리 기억을 떠 올려 보


려 해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미안했다. 




함께 길을 나서면 큰 누나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엣딘 엄마의 얼굴이 오늘 따라 유난히 초췌


하고 늙어 보이는 것은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까? 마치 눈에 세겨 놓으시려는 


듯이 조용히 내 얼굴을 바라만 보고계시던 엄마의 입술이 조금씩 열리며 힘없고 나약한 목


소리가 내 귀에 스며들어 왔다. 그리고 그 말을 듣자 지금까지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왜 왔어? 공부하느라 바쁠텐데.. "




내가 잡고 있는 엄마의 손등에 떨어지는 내 눈물은 지난 시간에 대한 때 늦은 속죄의 눈물이


었다. 군에 입대하기 전 듣게 된, 엄마가 그 오랜 시간동안 가슴에 묻어 두고 살아왔던 그 비


밀을 알게 된 후 방황했던 지난 내 나날들의 너무나 늦어 버린 후회와 절망이 섞인 감정의 찌


꺼기였다. 지금에 와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내가 한 말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


제는 너무나 늦어 버린 것을 말이다.




"나.. 잠시 누구 만나고 올께. 잠시만.. 기다려 줘. 엄마... "


"얼굴 좀 닦고.. 너 보기 흉해. 후훗.. "




이럴 때도 웃음을 잃지 않는 엄마에게 나도 억지스런 웃음을 보인 후 병실을 나섰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다시 눈물을 쏟고 말았다. 다 큰 남자가 화장실에 숨어 울고 있는 모습을 누가 


보던 말던 신경도 쓰지 않고 그렇게 울다 지쳐 다시 밖으로 나와 간호사 대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 최선호 선생님.. 연락 좀 부탁드릴게요. 후배 선우영이라고 하면 아실 겁니다. "




간호사가 어디론가 전화를 건 후 한참을 기다렸을 때 감지도 않은 머리가 떡이 진 선배가 비


상계단을 통해 걸어 오고 있었다.




"왔냐? 니가 여긴 왠일이냐? "


"엄마가 입원했어요. 지금 어느 정도인지 말해 줄 분이 선배 밖에 없어요. "


"어머님께서 여길? "




57병동에 입원한 것 만으로도 어떤 병으로 입원한 것인지 바로 눈치를 챈 선배가 간호사 대


기실의 리스트 보드를 한참 바라보다 전화기를 들고 어디론가 연락을 한다. 그리고 잠시 후 


중년의 남자 의사가 엘리베이터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선배가 먼저 깊게 고개


를 숙여 인사를 하고 내게 소개해 주었다. 




"여기는 네 어머니의 담당이신, 윤태선 외과 3 과장님이셔. 인사드려. " 


"처음 뵙겠습니다. 최선호 선생의 후배 선우영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어머니 한자, 혜자, 진


자이신 환자의 장남입니다. 과장님. "




잠시 고개를 몇 번 끄덕이는 것으로 나와의 인사를 마친 그는 선배와 차트를 꺼내 한참을 이


야기 하다 내 어깨를 두들겨준 후 자신이 타고 온 엘리베이터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질 때 


까지 아무런 말도 없던 선배가 내 소매를 잡고 병원의 한 구석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


가 날 데리고 간 곳은 보호자들이 담배를 필 수 있게 마련된 휴게실같은 곳이었다. 쓰임새를 


알 수 없는 갖가지 잡동사니가 가득한 하얀 가운안에서 어렵게 담배갑을 꺼낸 그가 내게 한 개


피를 권한 후 자신도 입에 물고 불을 붙인다. 




타들어 가는 속을 메케한 담배 연기에 의지한 채, 그가 내게 내뱉을 다음 말을 불안한 마음


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을 망설인 후 무언가 주저하던 그가 꺼내는 말은 딱 한 마디였다. 




"늦었다. "




이미 여동생의 연락을 통해 들었던, 그리고 이곳으로 뛰어 오면서 그토록 제발 아니기를 바


라고 또 바랐건만, 그 말을 다시 듣자 조금전 겨우 삼켰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내 그런 모습


을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위로를 대신한 그가 냉정한 의사의 모습으로 내가 원하는 자세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 내원하셨을 때 어머님께선 심한 감기 몸살인 줄 알았다고 과장님께 말씀하셨다는데.. 


췌장에서 처음 시작된 암이 이미 주위 조직을 침윤한 상태에, 더구나 임파선에도.. 지금 우


리가 어머님께 해드릴 수 있는 것은 통증이 심한 췌장을 적출하고 강한 진통제로 통증을 덜


어 드리는 것이 전부일 것 같다고 과장님이 그러시는 구나. 자세한 건 수술을 하며 그때 눈


으로 직접 확인을 해야 겠지만.. " 


"그게.. 그게 전부인가요? 완치라거나 그런 건.. "




실낱같은 희망이 있다면 그 어떤 것에라도 메달리고 싶은 마음에 선배의 어깨를 잡고 그에


게 다급하게 외쳤다. 엄마의 완치를 위해 내 심장이 필요하다면 그 어떤 망설임도 없이 당장 


꺼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런 내 반응을 익히 예상했던지 한 손으로 내 팔을 잡은 그가 


무겁게 고개를 젖히며 말을 이었다. 




"원래 어머님처럼 진행이 너무 된 상태에선 외과적인 처치를 잘 하지 않아. 해도 달라지는 


것이 없으니까, 오히려 환자의 육체적 부담만 늘게 되지. 하지만 췌장암은.. 암 중에서 통증


이 심하기로 유명한 질환이라 췌장을 적출 하면서 한 가지를 더 하게 돼. 사실 어머님의 수


술 스케쥴은 그 의미가 더 강해. "


"그게.. 뭐죠? "




무언가 기댈 수 있는 말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바람으로 간절했던 내게 그는 그 희망마저 송


두리채 앗아가는 차가운 말을 내뱉었다. 




"왠만한 진통제로도 통증을 경감시킬 수 없는 체장암 말기 환자들에게는.. 췌장을 적출하며 


동시에 신경차단술도 함께 병행해. 암의 진행을 도저히 막을 수는 없으니 대신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해 드린다는 의미지. 우리가 어머님께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조금이라도 덜 아프시


게 해드리는 것, 단지 그것 뿐이야. "


"그럼 수술을 안 하시면... "




또 하나의 담배를 꺼내 문 선배가 우리의 곁을 무심하게 지나가는 바람을 따라 담배 연기를 


흘려 보내며 아직도 포기하지 못 하고 있는 부질없는 내 희망의 마지막 불을 꺼버리고 말았다. 




"그러면 매일 잠도 주무시지 못 하고, 비명 조차 지르지 못 하시는 어머님을 보게 될 거야. 


다른 암도 정도의 차이에 따라 통증이 있지만, 췌장암은 특히나 통증이 심해. 직접 겪는 환


자뿐만 아니라, 보호자가 그걸 지켜보는 것 만으로도 피를 말리게 할 정도로.. "




그리고 그가 다음에 한 이야기를 듣자, 지금 내게 이런 차가운 말을 하는 그의 심정이 결코 


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선배와 난 결코 잃어서는 안 되는 것을 잃어버린 같


은 아픔이 있는 사람이었다.




"너도 몇 달전에 문상을 와서 대충 알겠지만.. 우리 아버지도 췌장암 말기셨어.. 술방에 나도 


들어 갔었다. 메인이 아버지의 열려진 배를 보여주며 확인하라고 하는데.. 후우.. 아들이 의


사인데도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퍼져버린 걸 보는 기분이란.. "




떨리는 손으로 필터까지 타 들어간 담배를 피고 있는 선배의 모습이 지금 그의 마음이 어떠


한지 말없이 전해줄 뿐이다. 




"과장님 말씀으론 어머님은 앞으로 6개월. 그동안 어머님께 좋은 모습 많이 보여 드려라. 그


게.. 아들이 할 마지막 도리다. "


"죄송합니다. 선배.. 그리고 고맙습니다. "




바닥에 담배를 비벼 끈 그가 휴게실밖을 나가며 마지막 말을 남기고 간다. 




"후.. 가끔 내가 왜 의사가 됐는지 회의가 느껴진다. "




선배에게 엄마에 대한 자세한 것을 들은 후 병실로 돌아왔을 때는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마지막으로 본 게 몇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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