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 - 2부 18장
본문
감기 - 25 개미의 날개 12
새로운 회사에 출근한지 벌써 수 일이 지났음에도 난 여전히 삐걱거리는 의자처럼 이질적
이고 외떨어진 느낌을 받고 있었다. 여직원만 6명이 있는 부서의 유일한 남자직원, 그것도
어느 날 공중에서 뚝 하고 떨어진 존재가 책임자로 있게 된다는 것은 겉으로 보는 것보다 더
한 심리적 압박감을 느끼게 한다. 그런 부담은 여직원 집단이라는 단일화되고 조직화된 이
특수 조직이 날 향해 보이는 노골적인 적대와 냉대로 그 갈등의 골이 깊어만 가고, 나 또한
무한한 자비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부처나 예수가 결코 아니기에 팀장이라는 직책의 힘
을 빌어 이 미운 오리새끼 6마리들에게 분노의 화살을 날리게 된다. 그리고 내가 날린 그 화
살은 다음날 매일 새로운 방법으로 팀장 물먹이는 그들 나름의 복수로 어김없이 되돌아 오는
지겨운 무한 루프를 만들고 있었다.
오늘도 팀원들과 연결된 공유 폴더의 워크 파일을 확인하며 숨길 수 없는 한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스케쥴상 분명히 어제 새로 수정된 파일이 들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저 파일
의 날짜만 바꾼, 어제와 전혀 다를 게 없는 것이 덩그런히 들어있는 폴더를 바라보자 이것들
이 언제까지 이 짓을 할 것인지 궁금함이 치밀어 오른다. 그때 파티션 넘어로 내 그런 표정을
보며 통쾌해 하며 웃고 있는 여직원들의 눈웃음이 눈에 들어 왔다. "오늘도 해보자 이거지?"
라는 생각을 하며 고쳐진 것도 없으면서 고쳐 놓았다고 번듯하게 올려 놓은 파일을 내 모니터
에 불러 놓고, 아직 이름도 모르는 여직원 한 명을 눈으로 찍으며 불렀다.
"이야기 좀 하죠? "
"그냥 말씀하시죠? 오래 앉아 있었더니 움직이기도 좀 그런데.. "
"큭큭큭.. 오호호호호... 깔깔깔깔.. "
내가 내뱉은 한 마디에 꼭 두 마디 이상을 쏘아야 속이 풀리는 듯한 대장 오리의 차가운 말
투에, 다른 오리 5마리가 한꺼번에 재잘거리며 웃음을 터트린다. "내가 이름 안 부른다고,
너도 날 팀장으로 인정 안 하는 거 같은데, 그러다가 눈물 흘리는 수가 있어."라고 외치고 싶
은 것을 억지로 속으로 삼켜야만 했다. 최근 그녀를 만나며 시작된 내면의 변화에 다시 차가
움이 물드는 것은 나도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 참고 또 참다보면 이 미운 오리새끼들이 언젠
가는 백조가 되지 않을까, 이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며 긴 한숨과 함께 조금전 내 머릿속을
흔들었던 생각의 흔적을 지워나갔다.
"후우.. 어제 워크가 변경된 것이 없는 거 같은데.. 함께 보며 이야기 합시다. 제 자리로 오세요."
"저도 모니터로 띄워 놓았는데요. 말씀하세요. 여기서도 잘 들려요. "
"깔깔깔... 호호호호호.. "
내 머릿속에서 가느다란 끈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가 나 혼자만이 들을 수
있는 착각이고 환청일지라도, 내 얼굴 밖으로 드러난 표정에 신나게 비웃고 있던 오리들의
주둥이가 오므려지는 것이 보인다. 동해기획에서 내 별명이 뭔지 아직 네들이 모르는 것 같
은데, 여기서도 그 지겨운 악명을 또 날려야 하나 하는 심정으로 목을 바짝 조르고 있는 넥
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대장 오리를 향해 걸어갔다.
"지금까지 참았는데.. 해보자 이거지? "
"뭘 참으셨는지 모르지만.. 저도 마찬가지 입니다만.. "
방긋 방긋 웃으며 사람 열받게 하는 100가지 방법을 쓰라고 한다면, 아마 이 대장 오리는
200개를 쓰면 안 되나요? 라는 질문을 할 인간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폭행사건은
대부분 사소한 말다툼에서 우발적으로 시작된다는 말을 넌 아직 못 들어 봤구나."라는 생각
을 하며 그녀의 포지션 앞에 섰다.
"아 그래? 작업 제대로 하지도 못 하면서 월급은 제때 받아 가고, 퇴근은 칼 같이 지킬려고
하는 것들이 병신같이 웃기는 잘 웃지? "
"아니, 말씀 너무 지나치신 거 아니예요? 지금 하신 말씀을 보고할 수도 있습니다! "
"해! 일 똑바로 처리하면 이딴 소리 안 해! 너도 위에 보고하고, 나도 위에 보고하고 누가 먼
저 짤리나 한번 해볼까? 응? "
"지금... 말씀 다 하신 거예요! 좋아요. 당장 부장님께, 그리고 본부장님께 올라가죠. 도대체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그러세요! 네? "
난 "그말 하는 인간들 치고 잘 하는 인간이 없거든?"이라는 생각을 그대로 입밖으로 내뱉기 시
작했다. 더 이상 나도 참을 만큼 참았고, 부처나 예수의 가르침은 그저 듣기 좋은, 솔직히 직
장 다녀 본 적이 없는 인간들이나 할 수 있는 허울좋은 말로만 들려 올 뿐이었다. 사실 부처
와 예수가 이 지랄같은 여직원들 속에서 한번이라도 생활했다면 아마 이런 말을 남기지 않
았을까 싶다. "자비를 실천하고, 네 원수를 사랑하라. 단 여직원들은 빼고.. "
"뭘 잘못했는지도 몰라? 그런데도 잘났다고 말대답은 꼬박 꼬박 잘 하지? 아는 게 없으니
할 줄 아는 건 말대꾸밖에 할 줄 몰라. 안 그래? "
"말 너무 심하게 하는 거 아니예요! 지금 하신 말..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
"그럼, 작업 이야기 해볼까? 어제 제작된 워크, 바뀐 게 하나도 없는데, 내가 어제 분명히 말
했을 건데? 오늘 오전까지 수정된 파일을 폴더에 넣어 놓으라고.. 그 잘난 입으로 한번 대꾸
해 봐! "
얼굴이 붉혀질 대로 붉혀진 여직원이 두 손을 바들거리며 떨고 있었다. 분하고 원통해서 소
리라도 지르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있다는 것을 묻지 않아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그리
고 그녀와 나를 지켜보는 다른 여직원들은 이 폭풍우가 어디로 몰아칠지 걱정어린 눈으로
지켜보느라, 조금전까지 여직원들이 내뱉는 재잘거리는 비웃음은 공허한 정적안에 휩싸여
버린지 오래였다. 코로 뜨거운 공기를 연신 내뱉던 그녀가 두 눈에 힘을 잔뜩 준 채 또박 또
박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제가 기획서에서 제안된 대로 제작된 원안에는 더 이상 수정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파일
을 그대로 보낸 것 뿐입니다. 그리고 그 워크에 대해선 다른 직원들도 같은 생각이구요. "
"호오.. 혼자 죽지 않겠다. 뭐 이런 심보야? 큭큭. 좋아. 모니터에 띄워 놓았지? 하나 하나 뜯
어 볼까? "
그녀의 파티션 넘어로 걸어가 모니터를 바라보자 몇 개의 메신져 창만 덩그런히 놓여 있을
뿐 어디에도 워크 파일의 흔적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이 정도 예상하지 못 한 것은 아니지만,
어이없는 표정을 눈에 가득 담고 여직원을 향해 비웃음을 지어 보였다.
"큭큭.. 워크 파일이 지금 자리비웠냐고 물어보네? 큭큭.. 좋아. 아주 좋아. 회사에서 포트
열어 주니까 업무시간에 이 지랄이지? 조금전에 누구한테 보고한다고? 이것도 보고해! 업
무 시간에 채팅 좀 했는데 팀장이라는 개새끼가 지랄하더라고! 왜 안 해? 한다며! 당장 올
라가서 말하고 와! "
마우스로 메신져 창을 급하게 끌려고 하는 그녀의 손등위로 물방을 하나가 떨어지고 이윽
고 또 하나가 떨어져 내린다. 분하고 억울한 듯 악물고 있는 아랫입술이 지금 그녀의 기분이
어떠한지 대변해 주고 있었다. 두 세개 정도 띄워져 있던 창을 하나씩 끄던 그녀가, 고개를
숙인 채 눈가를 정리한 후 나지막히 말을 해왔다.
"잠시.. 잠시 후에.. 보고하겠습니다. 지금은.. "
그리고 조용히 내 옆을 지나 복도 밖으로 사라지는 그녀를 보며, 여직원이 하나 둘씩 일어나
그녀를 따라가기 시작한다. 여직원들이 모두 자리를 비운 텅 빈 공간에 홀로 서서, 왜 내가
이곳에 있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내 앞의 근무자가 왜 그렇게 홀가분한 표정으
로 웃으며 떠나갔는지 그 웃음의 의미를 함께 떠올리고 있었다. 한 명, 한 명 따로 떨어트려
놓으면 나약하고 힘없는 여자일지는 모르지만, 두 명 이상이 모여 집단을 형성하면 남자직원
들에게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패쇄적이고 지독한 집단 이기주의를 보이는 여직원들의
책임자라는 이 자리가 오늘따라 너무나 힘겹게 다가온다.
그녀는 지금쯤 여직원 휴게실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그녀의 부하 오리들에게 둘러싸여 내
욕설이 담긴 따뜻한 위로를 받고 있을 테지. 하지만 이렇게 홀로 남겨진 난 누구에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누구 하나 따뜻한 손길 내밀지 않는, 그리고 단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누
군가 어렵게 내민 손길마저 거절해야 하는 것이 직장 남성의 비애가 아닐런지. 어릴적 부터
무수하게 듣고 세뇌되어 온 남자라면 뭐 든지 참아야 한다는 그 말이, 오랜 시간이 지나도
결코 풀어지지 않는 족쇄처럼 내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었다. 화가 나고, 울고 싶은 것은 그
녀가 아니라 바로 난데 말이다.
이긴 사람 아무도 없는, 상처투성이의 남자와 상처투성이로 떠나간 여직원이 남겨 둔 적막
감속에 담배를 하나 꺼내 피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파티션 넘어로 내 전화기가 울리
는 소리가 들려왔다.
"예, 디자인지원팀장 선우영입니다."
기획실의 업무보고 요청에, 혹시나 오늘도 물먹지 않을가 하는 심정으로 어젯밤 오피스텔에
서 만들어 놓았던 보고서 중에 하나를 뽑아 기획실이 있는 15층으로 올라갔다. 기획실로 들어
서자 남자직원들이 만들어내는 활기차고 분주한 모습이 오래전 동해기획에서의 아스라한 기
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내가 원한 회사 생활은 이들의 모습인데, 하는 생각을 하며 기획실장
의 책상앞에 서서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기획실장님. 디자인지원팀장 선우영입니다. 말씀하신 이번 주 업무보고를 가져 왔습니다. "
"아 그래? 잠시만 기다리게. "
늘 궁금한 것이 왜 상급주관부서에 올라가서 보고를 할 때면 이들은 꼭 바쁜 척을 할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왠지 타 부서 직원들에게 난 열심히 일하고 있어. 라고 꼭 강조하고 싶
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혼자만의 공상에 빠져 있을 때 기획실장의 말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나? 벌써 몇 번이나 불렀건만.. "
"죄송합니다. 지금 스케줄이 워낙 촉박해서.. 시간이 빠듯하다 보니 그 생각에 잠시 실례를
했습니다. "
상사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핑게는 언제나 일이 바빠서이다. 말뿐인 사과 후 정리된 보고
서를 기획살장에게 펼쳐 보이며 하나씩 설명하기 시작하자, 이 사람이 광고회사에서 일한 전
력이 있던가 하는 의구심이 들 만큼 예리하게 파고들어 온다. 역시 어디서나 짬밥이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는 순간이었다.
"자네는 우리 회사의 특징이 뭐라 생각하나? "
"석유, 전자, 유통을 주력으로 삼고 있는 기업으로써 환경과 거리가 먼, 일반 소비자들에게 친
밀하지 않은 전문기업이라는 Rigid한 이미지가 가장 큰 단점이라 생각합니다. "
내 답변에 기획실장이 버릇인 듯 손가락을 몇 번 책상을 팅긴 후 말을 해 왔다.
"그렇지, 그런데 기획서에 제안된 전략 외의 이 캠페인은 자네 독단으로 제안하는 건가? 이
런 제안을 하는 이유는 그 답변 만큼 나름 생각하고 한 것이라 생각되는데.. 설명해 보게. "
의자를 뒤로 한껏 제치며 어디 말을 해보라는 듯 느긋한 표정을 짓고 있는 기획실장에게 지
금 제출된 보고서의 내용을 토대로 전체적인 흐름을 되짚어 주기 시작했다. 기획과 제안에
대한 것을 설명할 때 가장 어려운 순간이 바로 이럴 때 이다. 자신 스스로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에게, 그 사람이 생각지 못 했던 것을 짚어주려 하면 누구나 저항하고 그것을
쉽게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특히 기획실장처럼 스스로 노련하다고 생각하는 부류일 수록
그 저항감은 남다르다. 지금 내 눈앞의 기획실장은 내게 설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이 승인한 기획서에 빠진 것이 있다는 것을 용납하지 못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동안 기획
실에서 최초 제안되었던 종합 전략목표에서 추가할 것이 있다고 말을 하자, 역시나 느긋했
던 그의 표정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걸 하면 달라진다고 생각하나? "
"소비자에게 환경과 친밀함을 둘 다 노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현재 제안된 대로 각 지
자체의 문화 프로젝트를 후원하는 것 뿐만 아니라, 본사의 브랜드 네임을 걸고 스포츠를 적
극 후원하는 방법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
"그래서 회사의 이름으로 마라톤을 하자? "
다소 큰 소리의 기획실장의 말에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던 기획실 남자직원들이 날 흘낏
거리며 쳐다보는 것이 옆눈으로 보였지만, 이런 일은 동해기획에 있을 때 이미 수 없이 겪었
던 일 중에 하나 일뿐 세삼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앞서 제가 말씀드린 것은 기획서에서도 소비자 앙케이트를 통해 수치화 되어 나타나고 있
습니다. 본사에 대한 소비자의 의식은 경쟁사에 비해 기업의 사회환원에 인색하고 환경과
자연, 건강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다는 것 말씀입니다. "
"그래서? "
"그것을 일시에 줄여줄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본사의 네임을 걸고 주최하는 마라톤 대회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강원도가 현재 유치하려 하는 환경보존 프로젝트와 맞물려 그 소스를 그
대로 응용할 수 있어 강원도와 합의점만 도출한다면 큰 부담없이도 캠페인을 행사할 수 있
는 장점이 우선 있고, 두번째로는 이 대회를 통해 본사가 일반인들의 건강과 자연을 함께 생
각하는 친환경적인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는 계기 마련의 발판이 될 수 있습니다. "
"그래서 우리가 마라톤 대회를 열어야 한다? 그것도 강원도에서? "
"예, 해마다 산불과 가뭄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고 있는 강원주민들에게 활기를 불어 넣어주
고, 장애인들과 함께 강원도 대자연속을 달리는 마라톤을 개최함으로써 소외된 계층에도
관심을 가지는 친숙한 기업으로 부각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획서
가 잡고 있는 전체 컨셉, 나눔을 함께 하는 남해무역의 사랑실천의 가장 효과적인 캠페인 전
개라 생각되었습니다. "
내 말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책상을 때리며 기획실장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어디서 간방지게 제안이야! 제안이! 넌 그냥 우리가 하라는 대로 소스 제작만 하면 돼! 이딴
것 만들 시간에 한번이라도 더 기획서나 살펴! 가 봐! "
"예, 기획실장님. 그럼 가 보겠습니다. "
고개 숙이고 나오는데 입맛이 썼다. 충분히 활용가능 할 거라 생각하고 제출한 것이었는데,
혹시나 여직원들이 또 물먹일 것을 생각하고 예비로 작성된 보고서라 미비했던 것인지 좋
은 소리듣지 못 하고 11층으로 내려가는 내 기분은 조금전 여직원의 눈물이 떠올랐다, 답답
했기 때문일까. 엘리베이터에서 11층을 누를려다 지하 2층을 눌러 주차장으로 내려온 나는
한 개피의 담배를 꺼내 물고 핸드폰을 열어 이제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1번 버튼을 눌렀
다. 잠시간의 신호음이 간 후 듣고 싶었던 그녀의 목소리가 차가워진 핸드폰을 통해 들려오
기 시작한다.
"어머, 오늘은 왠일? 바쁜 거 같아서 안 했는데.. "
"그냥.. 뭐 하나 싶어서. "
"나야 늘 똑같지. 왜? 또 그 년들이 말을 안 들어? 내가 가서 그 년들 머리 끄댕이를 잡아 댕
겨줄까? 큭큭.."
"아냐. 요즘은 애들이 말을 좀 듣기 시작해. 괜찮아. 그냥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 "
여자가 남자를 좋아하게 되면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숨소리만 듣고도 상대의 마음을 알아챈
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한동안의 침묵이 떨어져 있는 우리 둘 사이를 이어주는 핸드폰을
통해 흐르고 지나가는 것은, 그 시간 만큼 그녀가 내 마음을 느끼고 있는 탓이라 생각되었
다. 위로 받는 것을 죽도록 싫어하지만, 또 그 마음 한 켠으로는 이렇게 내 마음속에 있는 존
재에게 위로를 받고 싶어하는 이율배반적인 마음으로 나 또한 침묵속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한동안의 조용한 시간이 지나가고, 부드러운 숨소리와 함께 그녀의 목소리가 아주 조그마
하게 들려왔다. 왠지 누군가 옆에서 듣는 것을 무척 꺼리는 듯한 느낌에 잔뜩 귀에 핸드폰을
가져다 대고 집중하며 그녀가 다음에 할 말을 기다렸다.
"오늘.. 자기 오피스텔로 갈까? "
뭘 그렇게 조심스럽게 말을 하나 싶었더니, 사무실에서 그 말을 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웠던
가 보다.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기 시작하고, 조금전까지 내 마음을 무겁게 했던 것들
이 한 순간에 날아간 듯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큭큭.. 크하하하하.. "
"왜 웃어? 기껏 어렵게 말을 했더니.. 칫. "
"아니, 아니, 고마워서. 정말이야. 이젠 밖에서만 만나자고 했잖아. 말로만 이라도 고마워. 덕
분에 마음껏 웃었어. 큭큭.. 난 괜찮아. "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챙겨주는 건 고맙지만.. 가끔은 좀 넓게 생각하는 게 좋을 거 같아. "
"응, 그렇게 할께. 하지만 오늘은 어쩌면 회식이 있을 지도 모르겠네. 다음에.. 아저씨 찾아
뵐 때, 유경이 너네 집에서 만나자. 그게 좋을 거 같아. "
"큭큭.. "
그녀를 챙겨주고 싶은 내 마음을 느끼고 그녀도 기분이 좋은지 한동안 큭큭 거리던 그녀가
다시 조심스럽게 조용한 말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나 몰래 오피스텔에 우렁이 각시라도 숨겨 놓은 거야? 왜 자꾸 못 오게 하는데? "
"큭큭.. 걱정하지마. 설마 내가 널 두고 바람이라도 피겠어? 절대 그런 일은 없네요. 지금도,
앞으로도 내가 널 두고 다른 여자를 좋아하는 일은 절대 없어. 걱정마. 그냥 우리 둘 결혼하
기 전에, 부부가 아닌 연인으로 좋은 기억을 한번이라도 더 만들고 싶어. 그래서 그래. 내가
널 생각하는 만큼, 니가 가지게 될 기억도 챙겨주고 싶어서.. 그것 뿐이야. "
또 다시 한 번의 조용한 시간이 지나가다 그녀의 장난기 섞인 목소리에 내 입가에는 더 진한
미소가 자리잡아 간다. 핸드폰을 두 손으로 잔뜩 가리고 있는지 숨소리와 함께 그녀의 목소
리가 잔뜩 섞여 들려온다.
"자기야.. "
"응? "
"자기는.. 바람피면 끝내주겠다. 작업 멘트가 아주 장난이 아냐. 너무 능숙해. 큭큭.. "
"걱정말래도. 난 지금도 너만 보고, 앞으로도 너만 보고 있을 거야. 이 멘트를 들을 사람도
너 밖에 없다니까. "
"하여튼.. 나중에라도 바람피면 죽어~ "
"큭큭.. 걱정마. 절대 그런 일은 없네요. 그럼 내일 집으로 찾아갈께. 유경아, 그때 보자. "
"응, 자기도 열심히 일 하고! 돈 많이 벌어. 큭큭.. "
그녀의 전화를 끊고 다시 11층로 올라 온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마치 날 투명인간 취급
하고 있는 6마리의 미운 오리새끼들이 만드는 지독한 정적뿐이었다. 조금전 그녀가 내게 심
어주고 간 부드럽고 따뜻한 기운이 이 정적에 휩쓸려 차갑게 식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
고 아직도 눈가를 붉게 물들이고 있는 대장 오리를 차가운 미소와 함께 바라 보았다.
"이거 우리 둘 중에 하나가 그만둘 때 까지 끝낼 수 없는 Chicken Game 맞는 거지?" 내 그런
시선이 느껴졌는지 대장 오리와 나의 눈빛이 공중에 마주쳐 얽히기 시작한다.
[26편는 이번 주 안에 올라옵니다. 항상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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