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풍폭우(狂風暴雨) - 6부 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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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장 아버지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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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가 가까워오는 시절인지라 해도 길었다. 시간은 일곱 시를 가리키고 있지만, 아직 밖은 밝았다. 어두컴컴한 카페 안에서 본 것과는 달리 수환의 피부는 뽀얗다 못해 창백한 편이었고, 엷고도 어색한 미소 사이로 보이는 하얀 치아가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왼쪽 볼에 살짝 페인 보조개는 중훈의 가슴을 진탕시켰다. 그도 방금 현성이 이야기한 여관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뭔가가 찜찜했다. 아버지를 닮아 깡패가 되는데 여자란 필수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진호는 그에게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최소한 그의 계부는 아무리 술을 마셔도 11시 이전에는 꼭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는 수환의 손을 잡고 길을 걷기 시작했다. 현성의 자취방으로 가는 방향이다. 수환은 그가 큰길로 나가지 않고 골목 안으로 들어가자 불안한 듯 쉽사리 걸음을 옮기지 않는다.
“나, 니가 생각하는 그런 놈 아냐.”
중훈의 말에 수환이 속내를 들킨 듯 고개를 숙인다. 하얀 면티보다 더욱 하얀 그녀의 목덜미가 붉어진다. 그녀의 입에서 수줍은 듯한 한마디가 새어나왔다.
“알아…! 그런데 너 정말 전교 5등이야?”
“어…? 응.”
“근데, 싸움은 왜 하는 거야? 무섭잖아…….”
“뭐…… 그냥…….”
중훈이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그녀도 더 이상 질문을 던지지 못하고 그의 손길에 이끌려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잠시 후 그가 걸음을 멈춘 곳은 여관 앞이다. 수환의 눈이 놀라움으로 반짝였지만, 그는 잡았던 수환의 손을 놓았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그녀는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두려움과 쑥스러움에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중훈이 다시 그녀의 손을 잡은 것은 그로부터 5분 정도가 지난 다음이다. 수환이 겨우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중훈은 언제 갈아입고 왔는지 교복에 가방을 맨 상태였다. 수환은 처음 보았던 그의 껄렁한 이미지가 사라지고 모범생의 모습을 보이자 눈을 크게 뜨고 그를 관찰했다. 중훈은 그녀의 시선에 온몸이 간지러운 듯한 착각이 든다.
“중훈아! 방금 그 옷은……?”
“아~! 그거? 그거 현성이 옷이야. 교복이 더러워져서 세탁소에 맡기고 둘이 놀러 나왔었어. 방금 옷 찾고, 현성이 방에 가서 가방 가져온 거야. 가니까 둘이 아직 시작을 안 했더라구…….”
“뭘 시작도 안 해……?”
그제 서야 중훈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는다.
“미안……. 내가 말을 잘못했나봐.”
수환도 이내 그들이 무엇을 시작도 안했는지 알아내고는 고개를 돌렸다. 괜시리 미안해진 중훈은 얼른 밝은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자, 해지기 전에 집에 들어가야지.”
수환만의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그의 목소리가 너무도 시원시원해서 더운 날씨를 잊게 해주는 것 같았다. 아래를 바라보며 걷고 있는 그녀의 눈에 약간 검은 빛을 내는 그의 팔과 자신의 하얀 팔이 대조를 이루는 것이 보였다. 그의 억센 손아귀 힘에 얼굴이 조금 찌푸려지지만, 그녀는 잡은 손을 놓지는 않았다. 지하철역으로 가는 그가 수환에게 말했다.
“근데… 수환아! 너희 집이 어디야?”
“응…, 저기 삼성역 뒤편이야.”
“그럼 지하철 타야겠네?”
“응…….”
그들은 지하철을 타고 삼성역에 도착했다. 카페에서 나온 지 30분이 넘었지만, 중훈과 수환은 잡았던 손을 놓지 않았다. 출구 쪽의 계단을 오르던 수환이 갑자기 비틀거린다. 중훈이 놀라 그녀를 부축했다.
“중훈아, 미안…….”
“수환아, 너 너무 마신 거 아냐?”
“아니……. 괜찮아. 저기 잠시만 좀 앉았다 가면 안 돼?”
“그래, 내가 부축해줄게.”
중훈은 그녀의 팔을 양쪽에서 잡고는 지하철 계단에 앉게 했다. 그녀의 안색은 창백하다 못해 파리하기까지 하다. 중훈은 걱정스런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지만 막상 자신도 처음 마신 술이라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 모른다. 그녀는 억지로 가슴을 펴고 크게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그녀의 안색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많이 놀랬지? 미안, 내가 몸이 좀 약해서 그래.”
“진작에 얘기하지 그랬어? 그랬으면 안 마셔도 되잖아!”
“그래두…….”
그녀는 말꼬리를 흐리며 앙상한 손으로 중훈의 손등을 꽉 잡아 쥔다. 중훈은 잡힌 손을 돌리고는 그녀의 양손을 자신의 손으로 포갰다. 둘의 눈이 마주 쳤다. 중훈은 그녀의 언제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 같은 눈망울이 - 어릴 때 보았던 디즈니사의 만화에 나오는 - 아기 사슴 같아 보였다. 수환도 선이 굵은 그의 눈매에서 따스함을 느꼈다. 사람들이 바쁘게 계단을 오가고 있지만, 그들은 그들만의 세계에 빠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수환이 가볍게 눈을 감더니 중훈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중훈은 그녀의 입술이 다가왔지만 이상하게도 놀라지 않았다. 그는 마주 잡은 수환의 손에서 그녀의 맥박을 느낄 수 있었다. 몇 초간 대고 있던 입술을 떼어내자 둘은 부끄러운 듯 가볍게 웃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들을 주시했지만, 그런 것쯤은 지금의 그들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수환아, 이젠 괜찮아?”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수환이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중훈은 수환을 잡아 일으켰다. 그가 잡아본 그녀의 몸은 솜털처럼 가벼웠다. 수환은 두 다리로 서 있기는 하지만 몸을 움직이기가 쉽지 않은 듯 그이 팔에 매달렸다. 수환이 어려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고 10분이 채 되지 않아 그들은 아담한 2층 양옥에 도착했다. 수환이 벨을 누르고는 중훈에게 손을 흔들었다.
“중훈아! 오늘 고마웠어. 다음에 봐.”
“응, 들어가서 쉬어.”
그녀가 대문 안으로 사라지자 그도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돌아가다 말고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연락처 하나 받지를 못한 것이다. 그가 그녀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갑자기 대문이 열리며 남자하나가 뛰어 나오더니 다짜고짜 그의 뺨을 후려친다.
“철썩~~!”
갑작스런 타격에 그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중훈이 고개를 들어보니 20대 초반의 남자가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다. 중훈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저앉아 있었다. 그의 볼은 금세 벌겋게 달아올랐고, 낮에 현성과의 격투에서 다친 입안이 터져 피가 새어 나왔다. 남자의 입이 열렸다.
“야~ 이 새끼야! 니가 우리 수환이한테 술 먹인 새끼냐? 너 얘가 어떤 앤 줄 알고 그런 거야? 너 오늘 죽었어.”
그 남자는 중훈의 멱살을 잡아 일으키고는 다시 주먹을 날리려 한다.
“오빠~~~~!”
남자가 뻗어오던 주먹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중훈도 그 남자의 어깨 너머로 수환이 겨우 대문 곁의 벽을 짚고 서 있는 게 보였다. 그걸 본 남자가 소리쳤다.
“넌 들어가 있어!”
그녀는 오빠라는 남자의 말은 아랑곳 않고 외쳤다.
“오빠! 중훈이한테 한 번만 더 손대면 나 죽어버릴 거야~!”
그 말을 뱉고는 그녀가 털썩 쓰러져버린다. 엉켜 있던 두 남자가 동시에 소리친다.
“수환아~~!”
둘은 동시에 수환에게로 달려갔다. 그 남자는 수환을 안고는 계속 소리쳤다.
“수환아! 정신 차려! 수환아!”
막상 아무 것도 못하고 있던 중훈이 조심스레 수환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녀가 힘겹게 눈을 뜨며 말했다.
“중훈아! 미안해, 오늘은… 그… 그냥 가줘.”
그녀는 다시 쓰러진다. 중훈이 남자에게서 그녀를 빼앗아 안으려고 하자 그 남자는 손을 뻗어 그를 밀친다.
“얼른 꺼져, 니가 낄 자리가 아니야. 어머니~~! 어머니! 나와 보세요!”
그는 중훈은 대문 앞에 내버려둔 채 수환을 안고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중훈은 잠시 멍하니 그들이 사라진 문을 바라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수환의 병약한 외모나 오빠라는 사람의 행동을 보아하니 그녀는 중병을 앓고 있나보다. 그는 걱정이 되었다. 어쨌거나 술을 먹인 당사자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아니 중훈의 마음속에 그녀의 자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방금 전의 짜릿한 첫키스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그에게 수환의 병세는 물길을 막은 제방처럼 그의 가슴을 갑갑하게 만들었다. 그는 길을 가다가도 한 번씩 뒤를 돌아보며 그녀의 집을 바라보았다. 연락처라도 있으면 걱정이 덜 되련만……. 자신의 무지함을 다시 한 번 느낀 중훈의 걸음은 무겁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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