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X - 12부
본문
엄마가 바뀌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아이들은 문간 방에서 서로 엉퀴어 놀고 있었다.
명옥이 직접 만든 음식들이 모락모락 김을 내며 상 위에 가득하다. 오랜만에 뜨끈뜨끈한 구들짱에 앉아 보니 포근한 마음마저 든다.
“침대 하나 사줄까?”
“안 좋아해요.”
“신혼 때는 침대가 좋잖아?”
“침대엔 미세먼지가 많아서 건강에 안좋거든요.”
“그깟 먼지 무서워서 침대를 싫어해?”
“아이들이 어릴 때는 미세 먼지가 알러지를 일으키니까 참아야죠.”
“아이들 때문에 침대를 안쓰는거였어?”
“황교수님이 사 주신 이부자리가 얼마나 좋은데요.”
이불장을 활짝 열자 두툼한 원앙금침이 드러났다.
“이런 걸 언제 장만해 줬어?”
“부모랑 떨어져 살잖아요. 집에다 알릴 형편도 못되는 결혼식이라서 선물 했어요.”
“사진 좀 봐도 돼?”
화장대 위에 올려진 결혼사진첩을 가리키며 물었다.
명옥은 두 개의 사진첩 중에서 한 개를 꺼내오며 첫 장을 펼쳤다.
화사한 드레스가 어울린다. 얼굴이 서구적이고 키가 큰 편인 명옥에게 잘 어울리는 드레스라는 생각이 든다. 사진첩을 들여다 보던 황교수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한다.
“어머 왜 울어요?”
“부럽구나 명옥아.”
“교수님도 더 늦기 전에 얼른 결혼해야죠.”
“넌 복이 많아서 결혼도 쉽게 했지만 내겐 그런 복 조차 없잖니.”
거북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얘기가 나올 줄은 알지만 사진첩을 넘기는 순간부터 설음에 빠져들 줄은 몰랐다. 넘기는 장마다 명옥의 환한 웃음이 베어났다.
“짚신도 짝이 있다는데 교수님한테도 멋진 왕자님이 백마 타고 나타날꺼에요.”
“난 왕자를 바라진 않아.
내 곁에 항상 있지 않아도 좋아.
사랑해 주지 않아도 좋아.
일방적으로라도 사랑할 수만 있다면
그래서 내 남자라고 확실히 말할 수만 있다면.“
“아무 남자라도 다 좋다는 말이에요?”
“사랑하는 남자...”
“김박사님이면 딱 이라는 얘기죠?”
화살은 촉을 날카롭게 세우고 내게 달겨 들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은 재롱을 접고 곤히 잠을 자고 있다.
몇 순배 잔이 건네지면서 모두 취해가고 있었다.
명옥의 살림 솜씨가 아직 서툴지만 애정이 가득한 손 끝을 느낄 수 있는 그 집을 빠져 나온 것은 밤 열한시쯤이 된 것 같았다.
대리운전을 위해 사람이 오는 동안 담배를 몇 개피 태워버렸다.
“우리도 신혼 기분 좀 내게 호텔로 갈까?”
“싫어. 집에 갈꺼야.”
두 사람 모두 술이 취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숙의 마음에 앙금진 그 무엇을 모른 척하며 분위기를 바꾸려던 내 의도를 앙칼진 목소리 한마디로 거절해 버렸다. 뒷 좌석에 앉아 팔당 집으로 가는 동안에도 숙은 머리를 어깨에 기대어 오지 않았다. 적막감만 차 안에 가득하다. 쓰린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숙이 대문을 열어주니 대리운전자는 정원에 차를 주차 시키곤 뒤따라 오던 일행의 차를 되집어 타고 떠나 버린다. 더 적막한 기운이 감돌았다. 말없이 혼자 현관문을 따고 들어가는 숙의 뒷 모습을 보며 어찌해야 할지 막연할 뿐이다. 한참을 혼자 현관 앞에 서서 밤 하늘을 쳐다봤다. 겨울 밤하늘은 가까이 있었다. 밝게 빛나는 별 중 하나는 내 맘속에 있었으면 했다. 귀가 시려오고 발이 점차 저릴 정도로 차가워지는 동안에도 나는 꿈쩍하지 못하고 그져 현관 앞에 서 있었나 보다.
“안들어오고 뭐해?”
숙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아무 생각도 못한 채 엉거주춤 밤 하늘만 쳐다 봤었다. 현관문을 들어서는데도 용기가 필요한 것은 이 때가 처음 이었다.
환하게 밝혀진 대청마루 불 빛 아래 숙은 털썩 주저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아무말도 잇지 못하고 있었지만 누구도 먼저 무엇을 해야할지 바라거나 챙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숙아, 그만 일어나, 피곤해 보이는데 침대로 가자.”
“다 귀찮아. 죽고 싶을 뿐이야.”
“왜 약한 소릴 하고 그래?”
“내가 명옥이 보다 못한게 뭐가 있어?”
“아냐. 숙은 완벽해.”
“그런데 난 왜 힘들지?”
“욕심 없이 살기로 했었잖아.”
“욕심? 욕심이 없었었지. 하지만 이젠 아냐.”
“어떻했으면 좋겠어?”
“당신, 이혼해. 그리고 나랑 결혼해줘.”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었잖아.”
“그건 당신 생각일 뿐이고 난 그런 당신의 행위가 용납 안돼.”
“큰 일 앞두고 평지풍파 일으키려고 그래?”
“내겐 일보다 더 소중한게 생겼어.
당신을 내 사람으로 만드는 것 보다 중요한게 없어졌거든.”
“서둘지 말자. 얼마전 약속한대로 당신 그룹내 사장들만 모인 자리에서 결혼식을 하는 수준까지만.”
“구속력 없는 쇼는 이젠 싫어.”
“지금 당장 어쩌란 말이야?”
“당신은 탁과장 만도 못한거야. 용기도 없고 결단도 없는 이기심만으로 똘똘 뭉친 나쁜 사람일 뿐이었어.”
“그렇군. 당신 마음 아플만도 하네.”
“그럼 내 마음이 안아프게 어떤 조치를 실행에 옮겨야 하는 것 아냐?”
“천천히 풀어 나가자.”
“한 마디만 대답해.”
“뭘?”
“날 사랑하기는 하는거야?”
“사랑하고 있어.”
“사랑하는 사람이 여러 명 있는셈이네.
만나는 여자마다 모두 사랑한다고 말했던건 아냐?“
“그렇지 않아.”
“그럼 날 선택해. 당신의 과거는 잊어버리고 현재의 나만 선택하란 말야.”
눈물로 뒤범벅 되어버린 얼굴을 감추려 애써 고개를 돌리고 있지만 목까지 오르락 거리는 슬픈 소리마져 감출 수는 없는지 꺽꺽거리며 숨을 몰아 쉬고 있는 숙의 모습이 안타깝기만 하다.
“숙, 너무 늦은 시간이야. 내일을 위해 쉬자.”
“당신에겐 내일이 있겠지요. 살아있는 의미를 상실한 내겐 내일이 없어요.”
“나를 몰랐을 때는 행복했었지?”
“우아하게 살았죠. 부와 명예를 한 손에 움켜쥐고 있었으니까.”
“지금도 달라진 것도 없잖아.”
“당신은 가까이 갈 수 없는 우유부단으로 똘똘 뭉쳐진 존재였었어.
그런 당신에게 마음을 줄 수 밖에 없었던 현실이 미워 죽겠어.
어떤 이유든 살아야 할 의미가 없어졌어요.”
“당신이 갖고 있던 모든 가치보다 더 소중한 가치로 나를 생각해 주는 것은 감동이야.
하지만 내가 살아오면서 형성했던 모든 인연을 하루 아침에 무 자르듯이 선명하게 선을 그을 수 없는 것도 현실이지. 이 시점에서 내가 줄 수 것은 당신의 사랑이 헛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 뿐이야.“
“말은 아무것도 남기지 못해요.
거짓된 행동이더라도 당신과의 결혼식을 해야겠어요.
우리 당장 미국으로 건너가요.
그 곳까지 당신의 과거를 끌고 오지 마세요.
적어도 우리만의 공간은 필요하니까.“
“좋아, 정부지원이나 신규자금 투자를 받는 일이 끝나면 당장 실행하자.”
몇 마디로 가슴 깊은 원망의 마음을 씻어 낼 수는 없겠지만 밤이 점차 깊어감에 따라 스르르 감겨드는 눈두덩이 덮히는 현상만큼은 막을 수 없었는지 숙은 내 가슴에 안겨들며 잠을 청하고 있다. 가슴에 안겨든 작은 거인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두 팔로 어깨를 감싸 안으며 한 동안 그렇게 있는 것 뿐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니 지난 밤 그토록 뽀르뚱하며 애간장을 녹여대던 차가운 독기 대신 따듯해 보이는 토스트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커피 잔이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마주 앉아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말했던 그녀의 태도를 이토록 바꿔 놓은 것은 선명하지 못한 내 행동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낮게 깔린 구름 만큼이나 무겁게 마음을 누르고 있었다. 다소 날씨가 풀릴 것 같다. 이렇게 구름이 낮게 깔린 날은 또 한차례 눈발을 흩날리거나 빗방울을 떨구게 될 것이다. 몇일간 계속된 추위를 대신하여 포근한 날씨가 됐으면 좋겠다.
회사에 출근하여 기획팀이 작성한 사업계획서와 투자유치계획서 및 정부출연금신청서 등을 검토하며 하루를 소일했다. 상세하게 기록된 사업계획서의 내용은 경쟁업체에게 좋은 아이디어만 제공할 뿐이기 때문에 내용을 보다 간결하게 줄였다. 사실 투자자들 중에서 두터운 보고서를 읽어 볼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은 투자 이익이 얼마나 빨리 실현될 것인가에만 관심을 보일 뿐이므로 간결하게 제시된 한 줄의 손익분기점 도달 시점과 마진률을 제시하는 것으로도 족한 것이다. 그러나 그 한줄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수백페이지에 달하는 노가다 작업을 강행해야만 그들과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을 수 있게 된다. 로봇프로젝트는 장기 투자에 해당되기 때문에 미쳐버린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다면 단 한푼도 건져 올릴 수 없을 것이다. 많은 변수 앞에서 더 많은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서는 정력을 낭비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이 통과의례로 생각하든 말든 형식적인 보고서에 목을 메며 야근에 시달려야 하는 것이다.
한 밤이 되어서야 기안 전문가들로부터 보고서가 완성되었다. 밤 늦게까지 고생한 사람들을 위해 단 돈 일원이라도 투자 받는 성과가 있어야 할텐데 성공 여부를 장담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망연히 보고서를 책상위에 던져 놓았다.
“김과장, 수고했는데 술한잔할까?”
“모두 지쳐있고 피곤합니다.”
“어, 그럼 언제할까?”
“투자유치가 성공한 다음에 하면 돼죠.”
“허허, 자넨 술 먹고 싶지 않다는 얘기군.”
“아뇨, 잘 될 것입니다.”
“이 사람아, 장기 플랜에 투자할 사람이 어디있다고 그러나?”
“회장님이 마당발로 밀어 붙이겠다고 하던데요.”
“그냥 애쓰는 것이지. 난 기대하지 않네.”
“저희 팀에서 작성한 투자 기획안은 투자자를 설득하는데 충분할 것입니다.”
“그렇게 믿어 보겠지만 자넨 현실을 잘 몰라.”
“애쓴 저희 팀을 위해서라도 꼭 성공하길 바랍니다.”
애써 피곤을 감추며 방을 나가며 놓고 간 김과장의 두툼한 보고서를 또 한번 들여다 볼 생각은 없다. 몇차례 수정하면서 괜한 애를 쓰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많았던 탓에 손 끝에 뭍혀 보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작품을 여기저기 들고 다니며 투자유치를 위해 또 한달여를 보내야만 한다.
다음날 만나기로 약속된 정통부와 산자부 친구들이 도와주려고 노력은 하겠지만 막상 끝없이 투입되야할 사업에 선뜻 돈을 풀어줄 것은 기대하지는 않는다. 다만 국책 사업으로 시행해야 할 사업을 개인이 먼저 진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존심 대결로 확대되지만 않더라도 조그마한 성과를 얻는 것일지도 모른다. 고군분투하며 현재까지 도달한 결과에 대한 작은 가치라도 인정해 줄 수 있는 아량이 그들에게 남아있기를 바랄 뿐이다.
날이 밝아 오고 있다.
거대한 조직을 먼저 공략해 봄으로써 개별 투자자를 설득하는 것은 용이할 것이다.
정부청사를 들어서며 경비실에 먼저 들러 출입증을 받았다. 아무 생각없이 민원실 문을 열고 들어가 출연금신청을 하는 것 보다는 선임연구원들의 조언을 먼저 듣고 싶었으므로 민원인 주차장에다 차를 세우며 두툼한 서류는 시트 위에 던져 놓은 채 가볍게 현관문을 들어섰다. 사무실 안내판을 찾기 위해 넓은 로비를 두리번 거리고 있는 데 선임연구원인 박동진이 계단으로 내려 오고 있다.
“어, 김박사 오랜만이다.”
“그래, 박 선임은 잘 지냈어?”
“나야, 공무원인데 별 탈있겠어?
수도 없이 신청된 지원금 서류 더미에 살다보면 세월 가는 줄도 모른다니까.“
“너희 쪽에 일이 바쁘구나?”
“그렇지도 않아. 건질만한 것이 없다 보니까.”
“왜 그래도 기업체들이 성과를 많이 올리잖아.”
“비슷 비슷한 것 뿐이야. 원천 기술이 있어야 말이지.”
“그래도 아이티 강국이라는데 건질 만한 것은 가끔 있지 않겠어?”
“상업주의가 강해서 기술 보다는 돈 되는 걸 먼저 생각하잖아.
투자 대비 수익이 안되는 사업을 손대는 사람이 많지 않은게 현실이거든.“
“그렇지?
마침 내가 수익과 동 떨어진 로봇제작에 관한 연구를 해 오고 있었는데, 내 힘으론 어렵더라. 박 선임 생각에도 개인이 로봇 만드는 것은 만화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하하, 로봇?
설마 김박사 혼자서 로봇을 만들 생각을 했겠어?
산업 로봇 말하는거지?“
“아냐, 명령을 수행하고 일부는 스스로 생각하며 행동하는 휴먼로봇을 말하는거야.”
“에이, 그걸 지금 기술로 어떻게 만드어?
에이아이가 발달한 일본에서도 아직 흉내만 내는 중인데.“
“박 선임, 우리가 뭐가 부족해서 일본이랑 비교해야 하니?
난 독자적으로 휴먼로봇을 설계했단 말야.
완성된 설계도를 바탕으로 각 기관을 제작하고 컨트롤하고 데이터베이스화 하는 일만 남은 상태까지 혼자 왔어.“
“그래? 김 박사 얘길 가끔은 들었는데 막상 내 앞에 와서 핏대를 올리니 정말 미칠 일이구나.”
“박 선임, 친구로서 너의 의견을 듣고 싶어 왔을 뿐이야.
현재까지 진행된 설계도를 바탕으로 로봇을 만든다면 일본을 훨씬 능가할 수 있는 휴먼로봇을 제작할 수 있단말이야.“
“야, 그게 혼자해서 될 일이냐?
얼마전 우리 부에서도 몇 년 후를 대비해서 프로젝트를 운영해야 한다고 거론한 적은 있었지만 전문가들이 모두 수익 모델이 없다고 고개를 저어 버리더라.“
“박 선임, 로봇이라는게 종이쪼가리에다 설계 몇줄 했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서 당연히 그랬을꺼야. 하지만 나는 몇 년동안 컨트롤러를 이용한 작은 아이템을 만들면서 큰 꿈을 키웠단 말이야. 컨트롤러 상호간의 인터페이스를 제어할 메인컨트롤러는 물론 인간의 이상이 담긴 메시지를 데이터베이스화 하여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모델도 개발했고.”
“어릴 때부터 넌 별종이었으니까 뭘 해도 했겠지.
하지만 우리 부서에서 핵심과제로 삼는 것은 휴먼로봇이 아니라 산업용 로봇에 국한되어 있거든. 김 박사 네가 설계했다면 어느 정도 신뢰는 간다마는 너 하나만 믿고 정부 출연금을 내어 줄수는 없는 일 아니겠니?“
“내가 거져 달라는 것이 아니야.
적어도 너 같은 전문가들이 내 설계도를 검토해 보고 정부가 나서서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검토해 달라는거야. 무조건 부정하고 안된다는 사고방식으로 무장한 사람들을 만날까봐 너를 보고자 했던거고.“
“나도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을꺼야. 정부 돈은 한국은행에서 거져 꺼내오는 것이 아니잖아. 모두 국민의 혈세로 투자되는 것인데 연구원들이 일차 검토해 보고 어느정도 타당성이 있다면 실무위원회를 구성해야 하고 거길 통과하더라도 수익성 검토를 위한 투자위원회를 통과해야 하는데 만장일치는 아니더라도 다수결로 너의 생각을 지원할 세력을 만들려면 쉽지는 않을 것 같구나.”
나는 안주머니에서 작은 서류봉투를 꺼내서 박동진 선임에게 건내며 말했다.
“나도 알아, 적어도 국민의 혈세를 아무데나 뿌리지는 않는 다는 것 정도는.”
박동진은 내가 건넨 로봇설계의 요약본을 대강 훌터보더니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다.
“김박사, 너 아주 기발한 아이디어로 접근했구나?”
“네가 봐도 그렇지?”
“그래, 네 설계방식이라면 정말 일본보다 더 빨리 휴먼로봇을 상용화 시킬 수 있겠는데?”
“맞아. 인간의 생각을 데이터베이스화 시키는데 너무 많은 인력이 투입되야 하는 문제점이 남았을 뿐이야. 그런 일은 모두 돈이 지불되야 하는데, 나 혼자의 자금력으로는 엄두도 낼 수 없지.”
“정부의 입장에서 한 사람의 생각을 구현해 주기 위해 많은 투자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너에게 먼저 의견을 물어 보는 것 아니겠니?
내가 봤을 때 너희 조직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많이 있어. 가령 음성인식 부분만 보더라도 개별 기업체에서 음성인식 모듈을 만들고 있잖아. 더러는 산학협동으로 모듈개발을 하기도 하지만 그 결과물을 조잡한 상태지. 적어도 음성인식 단위를 고립어 수준에서 자연어 수준으로 향상 시키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개발된 이론을 토대로 수많은 노가다들이 몇 년을 매달려 줘야하는 과제가 남았는데 그걸 도와주는 기관이 없는 상태에서는 계속 답보될 뿐이거든.“
“야, 음성 인식은 지금도 잘 되고 있는 분야 아니었니?”
“어휴, 너 같은 놈이 어떻게 선임까지 됐는지 모르겠다.
적어도 음성인식이라면 자연어 처리에 있어서도 독립화자에 대한 인식률이 높아야 되는거야. 하지만 지금까지의 결과물은 종속화자에 대한 인식만 가능한 상태인데 어떻게 이 정도의 기술 수준을 가지고 완성됐다고 할 수 있겠어?“
“IVR 이나 ARS에서 음성인식 완벽하잖아. 더구나 핸드폰에서도 음성 인식되고 있고, 워드 칠 때도 음성인식 기술로 손가락 까닥 않고 문서를 쳐 대고 있구만.”
“박가야, 그건 아까도 얘기했지만 흉내만 내고 있는 수준이라고. IVR, ARS 에 적용된 음성인식은 겨우 고립어에 한정되어 있어. 가령 ‘우리집’ 이라고 얘기하면 등록된 전화번호를 찾아서 자동다이얼링을 해 주는 것이잖아. 우리집이라는 짧은 단어를 인식했다고 해서 그걸 음성인식 기술이 완성됐다고 생각하면 안되지. 워드를 대신 쳐주는 것을 보고 이젠 음성인식 기술이 완성됐구나 하는 것도 큰일날 일이구. 워드에 사용되는 명령어는 고립어에 속하는데 누구의 목소리라도 인식하지만 자연어에 속하는 말까지 인식될꺼라 생각했니? 그것은 화자 종속형 엔진을 이용하여 수많은 반복학습을 통해 데이터베이스에 음성을 축적해 놓는 기술인데 축적된 음성만 인식될 뿐이고 다른 사람이 똑같이 말한다면 절대 인식 못하는 수준이야. 말하는 주체가 누구든 간에 모든 사람의 말을 인식할 수 있는 음성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과제를 남겨 놓은 셈이지. 그걸 완성하려면 수많은 학자들이 5년정도는 피나는 노력을 쏟아 부어야만 겨우 완성 될텐데 누가 그런 비용을 부담하려고 하겠어? 적어도 로봇프로젝트에서 휴먼로봇이 주인 목소리를 인식해서 명령을 수행하는 정도라면 지금의 기술로도 가능하겠지만 인간을 돕는 단계로까지 발전시키려면 다른 사람의 음성도 인식할 수 있는 화자 독립형 엔진을 완성시켜야 해.”
“답도 안나오는 엄청난 투자를 선뜻 할 위원회는 없을꺼다.”
“미래의 인프라를 위한 투자는 정부 차원에서 지원해야 하는 것 아닐까?”
“좋아, 음성 엔진은 그렇다 치더라도 네가 개발하려는 로봇의 머리 부분은 신뢰할 수 있는 수준인지 어떻게 검증하지?”
“논리회로에 의존할 수 밖에 없지. 가상현실공간에 로봇의 머리를 위치 시키고 끝없이 학습하여 기댓값을 얻을 때까지 반복될 수 밖에 없어.”
“그렇게 하려면 역시 엄청난 비용이 들어갈꺼 아니냐. 그런 분야에 정부가 선뜻 돈을 내 줄 가능성은 없어. 어쩌면 위원회가 로봇프로젝트를 스스로 구성하고 너의 머리를 빌린다면 몰라도 말이야.”
“어떤 형태가 되든 로봇프로젝트는 많은 사람이 참여해야만 해. 그래서 너를 찾아 온거구.”
”난 장담할 수 없다. 너의 얘기는 공감하지만 짧은 통치기간 중에 끝이 보이지 않는 결과를 위한 투자를 결정할 위정자는 없을테니까.“
“정당한 심의를 하면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글쎄다. 위원회에서 책임질 일을 맡아서 해 줄 것이라 너무 믿지 말아야 될테니까.”
“일말의 가능성도 없는거니?”
“아냐, 민원실에 가면 대민봉사 차원에서 담당자가 친절하게 접수는 시켜 줄꺼야.”
“접수는 나도 할 수 있어. 심사위원회에 참가할 구성원들을 잘 선별해 달라는거지.”
“알았다. 남들이 전혀 상상도 못할 거대한 프로젝트를 추진하느라 애썼으니 내가 위원회 구성에 앞서 너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도록 노력해보지.”
박동진과 헤어진 나는 다른 부처에 가볼 엄두가 나지 않아 그냥 사무실로 되돌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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