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야설

프로젝트 X - 13부

본문

책상 앞에선 김과장은 자신이 만든 투자유치계획서에 대해 얘기 하고 싶어했다.




“투자유치계획서를 십여군데 투자 담당자의 이메일에 넣었습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해 오던 일에 자신감을 갖고 있는 듯 했다. 회사의 모든 기획안을 무리없이 소화해냈던 경험을 토대로 이번 프로젝트의 투자안까지 섬세하게 작성하며 사업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은 무리가 될 수 없겠지만 적어도 현실감각과 동떨어진 이번 프로젝트를 너무 쉽게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그는 모르는 듯 했다.




“이메일을 보내더라도 소득이 없을 수도 있는 일이야.”


“경기가 어렵다 보니 선뜻 돈을 내 놓을 투자자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투자 실적이 최근에 있었던 업체만을 대상으로 자료를 보냈습니다.”


“자료만 보고 선뜻 투자를 결심할 업체는 없을꺼야. 


컨소시엄을 구성해 보는 것은 어떤까?


가령 주관사를 선정하고 그들의 책임하에 투자자들이 연합하여 이번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방안 말일세.”


“다각적인 접근이 필요 합니다. 


요즘처럼 투자할 곳이 마땅치 않아서 돈을 썩히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 이미 투자했던 업체들이 줄줄이 쓸어지면서 출혈이 심한 곳도 있습니다. 그들의 실상이 객관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이상 누가 실질적으로 이번 투자건에 관심을 보일 것인지 사전에 파악하기는 어려운 일이지요. 따라서 이번 투자유치건은 두가지의 선행 조치가 필요했습니다.“


“어떤 선행조치인가?”


“우선 투자할 힘이 남은 업체들과 최근에 투자 의욕을 보였던 흔적이 있는 업체들을 대상으로 무작위로 투자유치제안서를 발송한 것입니다.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그들의 실상을 파악하는 방법으로는 이메일을 누가 먼저 열어보느냐는 것도 중요한 체크 포인트입니다. 수많은 요청 건들에 시달려온 업체로서는 단순히 이메일만 전송한 상태에서는 클릭 조차 안해 볼 것입니다. 그래서 투자 담당자에게 전화로 간단히 투자 요약을 추가로 통지해 주는 것입니다. 자료 검토 조차 거부하는 업체들도 있겠지만 일단 이메일을 열어본 업체들은 몇일간 검토할 시간이 필요하게 될텐데 그 사람들을 대상으로 개별 투자와 컨소시엄 투자 방식중 어떤 방법에 관심이 있는가 선택하도록 접근을 시도할 계획입니다.”


“자넨 젊지만 경험이 많은 편이군.”


“자금기획을 담당하게 되면 잔머리만 남습니다. 저희 그룹처럼 자금이 넘쳐나는 경우에는 자금 업무가 즐겁지만 형편이 좋지 않은 회사라면 머리가 뽀개지고 돌아 버릴겁니다.”


“내 친구들은 모두 연구소에 쳐 박혀 있으니까 세상 돌아가는 꼴을 잘 모른다네. 자네처럼 산전수전 다 겪은 실무진이 이 회사에 있다는 것은 발전 가능성이 많은 증거로군.”


“저도 한때는 더 작은 회사의 중역을 맡았었습니다. 돈 때문에 진저리 쳐질 정도로 어려움이 많았어요. 뭔 일을 하려면 제일 먼저 돈이 필요한데 그 돈이 없다보니 아무리 발버둥쳐도 얻어지는 소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회사로 옮기게 됐었는데, 자금의 중요성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모든 기획에는 자금을 염두에 두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어렵게 돌아가고 있었다.


없는 사람들은 없어서 아무 짓거리도 못한채 더욱 궁핍해지고 있다. 있는 사람들은 이놈의 세상이 어떤 조화를 또 부릴지 몰라 돈을 더 깊은 곳에 감춰 버린다. 싸게 내놔도 어차피 팔리지 않는 물건에 치인 상인들은 관리비가 자꾸 쌓이는 통에 물건을 안 파는 한이 있더라도 물건값을 내릴 엄두가 나지 않는다. 혹여 물건이 팔려나가더라도 다시 구입하려면 얼마를 쳐줘야 할지 모른다. 돈이 흥청망청 넘쳐나서 물건값이 덩달아 오르는 인플레라면 어차피 두 마리 토끼가 경주를 하는 꼴이니 참을만도 하지만 지금처럼 주머니에 땡전한푼 남아 있지 않은 빈털터리 서민들에게 물건값만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는 현상은 아무래도 스태그플레이션이라고 말하고 싶다. 없는 놈은 없어서 더욱 기죽어 살고, 있는 놈도 무서워서 돈을 더욱 감춰 버리는 이런 날이 계속 되는 한 신기술 개발이나 첨단산업 조차 거꾸러지지 않으라는 법이 없다. 김과장이 자신 있게 추진하는 투자유치계획처럼 모든 일이 논리적으로 풀어졌으면 좋겠다.




저녁 시간이 다 될쯤 숙의 비서로부터 사무실로 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어서와요.” 숙은 반갑게 맞이하며 먼저 쇼파로 내려와 앉는다.


나는 숙의 맞은 편 쇼파에 털퍼덕 소리를 내며 힘 없이 걸터 앉았다. 낯익은 듯한 비서가 다가와 커피와 홍차 중 어떤 것이 좋겠냐며 물어온다. 상긋한 머릿 냄새가 코 끝에 닿았다. 친철하고 부드럽게 다가서는 그녀의 얼굴이 예사롭지 않았다. 살짝 머리를 숙이며 무릎을 반쯤 굽힌 그녀의 가슴 살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어, 커피.” 나는 늘 마셔대던 커피를 선택하는데 전혀 망설이지 않았다.


“그래, 나두 커피.” 숙도 커피를 달라고 하자 비서는 조심스럽게 문 밖으로 나갔다.


“이상타,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인데...”


“저 아이? 당신이 예전에 말하던 동아리의 김미숙이잖아.”


“걘 일학년이라고 했는데 벌써 취직한거야?”


“아휴, 겨울방학이잖아. 아르바이트 일자리로 온거야.”


“허구 많은 사람들 재치고 어떻게 일자리를 따 낸거지?”


“응, 당신이 연구에 몰두해 있는 몇 달동안 유심히 저 아이를 관찰해 봤는데, 기본이 잘 된 아이 같더라고. 그래서 방학중에 당신 옆에서 수발하라고 선발한거야.”


“가능성이 보였어?”


“글세, 첨엔 몰랐는데 도서실에서 열심히 공부하더란 얘길 듯고 신경 좀 써봤거든.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 보이더라구.


로봇까진 어렵겠지만 잡다한 것들을 정리하다 보면 꽤 클 것 같은 기대주더라고.“


“응, 어쩐지 낯설지가 않다 했더니 그때 그 학생이었군.”


“맘에 안들어?”


“아냐, 맘에 들어. 벌써 겨울방학이 됐다는 사실이 좀 부담스럽네.”


“그래, 당신이 연구실에 틀어 박혀서 살았던 시간이 벌써 삼개월이었어.”


“당신이 워낙 많이 도와주는 바람에 기간이 단축됐지 안그랬으면 일년도 짧은 시간일꺼야.”




김미숙이가 따뜻한 차를 내 왔다. 숙은 그렇게 들어온 미숙을 향해 자신의 옆 자리에 앉도록 지시했다. 미숙도 내 얼굴을 기억해 냈는지 밝게 웃으며 내 앞자리에 다소곳한 몸을 추스르며 앉았다.




“얘, 미숙아.”


“네, 교수님.”


“앞으로 네가 모실 김박사님이셔.”


“안녕하세요. 김미숙이에요.”


“오, 그래. 몇 달전에 봤을땐 어려보였는데 그 사이 많이 컷구먼?”


“많이 놀았어요. 공부한다고 아무리 파 들어가도 힘들어서 포기할까도 생각하면서요.”


“그래, 갈등이 많은 분야지.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개발자의 길을 가겠다고 결심한 것이 어쩌면 인생의 실패인지도 모른단다.“


“그렇게 힘든거에요?”


“암튼 미숙이 네가 방학동안에만 나를 돕겠다고 했으니 옆에서 지켜 보거라.”


“알았습니다. 박사님을 돕는 일이라면 힘들어도 잘 견뎌 볼께요.”




검은 머리가 치렁하게 인사하며 고개 숙이는 방향에 따라 출렁거렸다. 봉긋한 가슴이 정면에서 쳐다 봤는데도 선명한 것이 몇 달을 굶은 늑대에게는 너무 향긋한 식사꺼리로만 보였다. 다만 숙이 많은 사람들을 제껴놓고 미숙을 내 개인비서로 선택한 의도를 모르는 한 태연한 척 해야 할 뿐이다.




“미숙아, 내일 부터는 내 방에 오지 말고 사층 김박사님 사무실에 가서 근무해.”


“네, 교수님.”


미숙은 인사를 마치자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숙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붙어 있다.


숙의 배려에 다소 흥분을 가라 앉히지 못하는 내 얼굴도 어쩌면 붉게 물들어 있을 것이다.




“여보, 일에만 메달려 살지 말고 이젠 가끔씩 나랑 얘기도 좀 하며 살자.”


“어, 그래야지.”


“기획팀 김과장이 여러 곳에 자료를 넣었으니까 적어도 열흘 정도는 시간이 걸릴꺼에요.”


“그렇겠지.”


“회사에 큰 일도 없으니까 나이아가라 쪽으로 여행 좀 다녀오고 싶어.”


“그래도 되는거야?”


“응, 틀이 잘 잡혀 있잖아.


학교도 방학 중이고.


당신도 개발 계획서가 끝났으니까 휴식도 필요할테고.“


“그러지 뭐. 언제 출발할건데?”


“응, 이틀 후면 어때?”


“비자가 그렇게 빨리 나와?”


“당신이랑 나는 미국 비자 있잖아.


몇몇 사장들도 미국 비자 정도는 항상 준비됐을테고.“


“비행기표는?”


“걱정마, 돈으로 안되는 일이 어딨어?”


“알았어. 도봉동에단 미국 출장간다고 얘긴 해놔야겠네.”


“응, 당장이라도 전화해.”




직원들이 하나 둘 퇴근하는 것을 창 밖으로 바라 보고 있다. 겨울 해가 짧은 탓에 가로등불은 벌써 세상을 비추기 위해 환한 열꽃을 내 품고 있다. 계절이 바뀐지도 모른 채 틀어박혀 있던 시간동안 세상은 변해 있었다. 다만 그 변화의 모습이 한꺼번에 다가오지 않을 뿐이다. 조금씩 조금씩 내 곁을 스치는 세월속에 변화를 느끼며 이 한해도 가고 말 것이다.




“가요.” 숙이 문을 열며 내 방에 거침 없이 들어섰다.


“어, 다 퇴근했어?”


“알게 뭐야. 일 있는 사람들은 더 일할테고, 한가한 사람들은 초저녁에 퇴근했을텐데.”


“왜 그렇게 무심하게 말해?”


“지겹단 말야. 내가 직원들 엄마도 아니고 누나도 아닌데 허구헌날 직원들과 나를 연관시켜 말하는 말투가 듣기 싫어.”


“회장님이 그런 말하는 것을 다른 직원들이 듣는다면 까무러치는 것 아냐?”


“흥, 세상이 얼마나 무섭게 변했는지 몰라서 그러는거야.”


“어떻게 변했는데?”


“회사가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로 변했다는거지.”


“하하, 회사가 어떻게 세상을 지배한단말야?”


“그렇게 됐어.”


“글세, 감이 안잡히는걸.”


“당신은 행복한줄이나 알면 돼.”


“무슨 일인데 그래?”


“요즘 완전 불경기야.


직장에서 짤리면 할 것이 하나도 없는 암담한 세상이라구.


요즘처럼 직원들이 목숨걸고 알아서 일하는 세상이 올 줄은 정말 몰랐다니까.“


“아, 경기가 어려워서 짤릴까봐 전전긍긍하는 걸 두고 말하는거구나?”


“당신은 피부에 와 닿지 않겠지만, 직장인들은 회사에서 짤리는 것 만큼 무서운 형벌이 없을꺼야.”


“그런 것 의식하고 더 열심히 잘하면 회사가 무척 발전하겠네.”


“그렇지. 하지만 그들 중에서 정말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줄어들었기 때문에 문제야.”


“무슨소리?”


“응, 열심히 일하는 척만 하는거지. 남들이 일해 놓은걸 가로채는 일에 더 몰두하는 그런 야박한 세상이 되고 말았다는거야.”


“설마...”


“안 짤리려고 열심히 일해주는 직원들을 내가 왜 싫어하겠어?”


“어떤 징후들이 발견됐니?”


“부지기수로 많이 발견되는걸. 이러다간 사회현상으로 고착될지도 몰라.”


“그렇게 심각해?”


“글세, 사용자의 입장에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니 고마워해야겠지만, 생산능률면에서 따져보면 예전보다 더 낮거든. 두 가지만 비교해봐도 얼마나 척척척 하며 빌붙어 사는데 목숨거는지 알겠지?”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


“물론이지. 하지만 나쁜 쪽으로 먼저 발전하는게 사람들의 생리잖아. 일안하고 일많이 하는 척하며 사는 사람들을 혹여 발견해 내지 못하면 그렇게 사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급속도로 퍼져나가게 되고 직원들은 효율성 보다는 잔꾀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게 되는거야. 기업주는 빵빵하게 돌아가는 분위기에 현혹되지만 결과물을 보곤 까물어치고 싶지.”


“직장이란 자기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 사용자와 더불어 자신의 만족을 얻기 위한 공동 작업구역 아니었던가?”


“적어도 예전엔 성과에 대한 자부심이 그렇게 가득했었지.”


“세상의 가치관이 마구 뒤틀려 버렸단 말이네.”


“역사적으로 보면 혼돈과 안정의 시기는 마치 수레바퀴처럼 둥굴 둥굴 굴러 다니는 것인데, 아마도 지금이 혼돈의 시대 쪽의 바퀴가 물려 버렸나봐.”




숙과 나는 마지막으로 사무실을 나서며 승용차에 올랐다.


운전대를 잡은 나는 갑갑한 마음으로 잔뜩 찌뿌려진 숙의 마음을 풀어 줄 생각으로 잠실 고수부지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평소와 달리 팔팔도로를 달리는 내게 숙은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차가운 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며 도착한 고수부지는 몇몇 마니아를 제외하곤 추위를 피해 넓은 벌판이 마른 잔디밭으로 남아 있었다. 차를 선착장 앞에 세웠다. 따끈한 우동 한그릇을 먹고 싶다. 겉보기엔 너무 지저분해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한강의 추억을 위해 그정도는 감수해야 한다고 설득하는 나의 말에 마지 못해 숙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따라 들어왔다.




“아저씨, 국수 두 개 말아주세요.”


“국수만요?”


“네, 단무지좀 많이 주시구요.”


“알았시유.”




낡은 밖의 모습보다 우동차 안쪽은 더 어수선해 보였지만 뜨거운 국물과 함께 훌훌 넘기는 국수맛을 위해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숙은 참을 용의가 있는 듯 했다.




“맛있지?”


“응.”


“한 그릇 더 먹을래?”


“아니, 이것두 벅차.”


“그래? 그럼 반만 먹고 남겨. 내가 먹을게.”


쟁반에 담겨진 단무지를 남김 없이 쓱쓱 젓가락으로 집어 입 안에 털어넣었다.


끅끅 트름까지하며 맛있게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숙도 기분이 나아졌는지 배시시 웃고 있다.


“커피는 선착장에 떠 있는 배에서 마시자.”


“응, 근데 추워.”


“알았어. 내가 업고 갈테니까.”


“정말?”


“그래, 보는 사람도 없는데 내게 업혀.”




숙은 가날퍼 보이지만 사실 내가 업고 다리를 건너는데는 조금 무리가 있었다. 세월이 남긴 흔적은 작아 보였지만 두 다리의 근육을 상당히 쇠약하게 변화시키는데 있었나 보다.




카페테리아에 앉아 차가운 강을 바라보며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있다.


세월의 흐름을 마시고 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내게 던져질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을 마시고 있다.




“미숙이 말이야.”


“어, 왜?”


“남자랑 동거중이래.”


“아직 어리지 않나?”


“돈 때문에 그렇다던데.”


“돈이 왜 필요하지?”


“하고 싶은 일이 많은가봐.”


“어떤?”


“궁금한 것은 다 해보는 아이잖아.”


“동거가 궁금했던걸까?”


“그게 아니라, 로봇에 관련된 모든 것들을 만져보려니까 돈이 필요했었나봐.”


“설마, 그런 욕심 때문에 몸을 맡겼을라구.”


“동거한다고 꼭 몸을 맡기는 것은 아니잖아?”


“살다보면 그 단계까지 자연스럽게 진행되는거 아냐?”


“글세, 아직까진 그 단계는 아닌가봐.”


“근데 어떻게 알았어?”


“응, 내 학생이잖아. 상담 받았거든.”


“뭐라 말해줬는데?”


“인생은 각자에게 소중한 것이라고 말해줬지.


누가 간섭할 수 없는 자신만이 결정권을 갖는 유일한 존재라고 말해줬지.“


“동거는 말리지 그랬어?”


“그거, 아무것도 아냐. 맘 먹기에 따라서는 그냥 한낮의 꿈에 불과한것이니까.”


“생을 가볍게 보는거야?”


“아니, 여자가 동거하는 것을 흉이라 생각하지 않는거지.”


“하긴 여자의 반대는 남자니까. 남자가 동거한다면 웃고 난리쳤을테니까.”


“남자든 여자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가장 값진 일을 위해 부수적인 것을 버릴 수 있는 것이 진짜 삶의 의미라고 판단했어. 그래서 나는 미숙에게 다른 조언을 하지 않았지.”


“이제 아르바이트 구했으니까 동거는 파기되겠네.”


“그렇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엄연히 미숙의 선택에 따라 결정되는 일일 뿐이야.”


“불쑥 내게 미숙을 데려다 놓고, 미숙의 동거 사실을 알려주는 의도는 뭐야?”


“정보니까. 정보는 사용하는 사람의 의지에 따라 질이 결정되는 것 아냐?”


“그럼 나에 대한 테스트를 해 보겠다는 뜻도 담겨 있는거야?”


“정보 분석자가 알아서 판단할 일일 뿐이지.”


“하하, 알았어.”




다시 팔팔 도로를 따라 미사리 끝까지 이동하고 있다. 잦은 물안개로 가끔은 미끄럼 사고가 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팔당교를 넘어가며 이 낮은 강물이 언제 쯤이면 꽁꽁 얼어 버릴까 차창 너머의 물결을 보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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