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에서의 하루 - 중편
본문
소녀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한 여름 햇빛에 달궈진 옥상의 열기로 텐트 안이 후끈 달아오른 뒤였다. 한증막 같은 더위를 느낀 소녀는 서둘러 텐트 밖으로 나가려다가, 옆에서 자고 있는 소년을 뒤늦게 인식했다. 저 얼굴.... 저 얼굴이 내 첫 남자의 얼굴이다. 소녀는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왠지 모를 불안감과 뭔가 모를 뿌듯함. 그리고 이런 말들로 설명되지 않는 또 무언가... 소녀는 어젯밤에 소년이 한 말을 생각했다.
‘그냥, 사랑을 느끼는 거야. 그게 중요한 거 아냐?’
소녀는 깊이 심호흡을 했다. 그랬다. 그냥, 두 사람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사회적인 잣대, 시선들은 모두 부차적인 문제였다. 지금 소녀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할 뿐이고, 소년의 감정 역시 진실하다고 믿었다. 그럼 된 거였다. 그냥, 그렇게 사랑을 느낀다는 것, 그게 중요한 거였다. 소녀는 맑은 미소를 지으며 텐트 밖으로 나갔다.
이미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시계를 봤다. 11시였다. 어휴- 소녀는 한숨을 쉬며 주위를 둘러봤다. 다시 한숨이 나왔다. 밤새 라면과 술 등을 먹고 마신 주위는 말 그대로 난장판이었기 때문이었다. 서둘러야 했다. 오후에 부모님가 오기 전에 옥상을 말끔히 치우고, 또... 사랑스러운 소년에게 밥도 직접 해 먹이고 싶었다.
그때였다! 옥상 밑에서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부모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분명히 부모는 오후에 온다고 했었는데... 큰일이었다. 물론, 평소에 소녀의 부모가 옥상에 자주 올라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혹시라도 올라오면 경을 칠게 뻔했다. 공무원인 아버지는 지나칠 정도로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어쩌면 나를 죽일지도 몰라... 소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소년만 없어도 잔소리 조금 들으면 될 일이었지만, 소년과 같이 밤을 샌 것을 알면 그대로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밤새 소년과 한 일을 눈치 채기라도 한다면... 끔찍했다. 더 이상 상상할 수 없었다. 소녀는 서둘러 소년을 깨웠다. 그때 밑에서 어머니의 소리가 들렸다.
“오늘 날씨 좋네! 여보 이불 갖고 나와요! 옥상에 이불 널게”
소녀는 화들짝 놀라 소년을 깨웠다. 그러나 소년은 술기운 때문인지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소녀는 당황했다. 그렇다고 소리를 지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소녀가 안절부절 못하고 있을 때, 어머니가 옥상으로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소녀는 울먹이며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모두 끝이었다. 어머니가 한 발자국만 더 디디면 옥상이었다. 그러고 나면...
“여보! 아예 이 참에 빨아버리지?”
“그럴까요?”
신의 음성과도 같은 아버지의 음성이었다. 어머니는 옥상 바로 앞에서 다시 마당으로 내려갔다. 소녀는 너무나 긴장한 나머지 맥이 풀리면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소년을 깨워야 했지만, 손이 떨려서 제대로 깨울 수도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마냥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었다. 소녀는 다시 서둘러 소년을 깨웠다.
소년이 일어난 지 10분이 넘게 지나도록 두 사람은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한 채, 내리쬐는 뙤약볕에 그대로 몸을 맡기고 있었다.
“야, 이불 빨래는 얼마나 걸리냐?”
“몰라.”
여자애가 그런 것도 모르냐며 소녀를 돌아봤을 때, 소녀는 많이 아픈 듯, 아랫배를 움켜쥐고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소년은 소녀에게 어디가 아픈지, 배가 아픈 것인지 물어봤지만, 소녀는 신경질적으로 모른다고만 대답했다. 소년은 난감했다. 소녀를 위해서라면 당장 내려가서 약이라도 사와야겠지만, 그랬다가는 소녀의 부모님한테 발각될 것이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이 뙤약볕에 아픈 채로 그대로 둔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혹시, 어제 일 때문에...? 소년은 걱정이 하나 더 늘어났다. 모든 것이 자기 때문인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도저히 못 참겠어. 너 이쪽 보지 마!”
소녀는 일어서서 한쪽 구석으로 가면서 소년에게 그쪽을 못 보게 했다. 소년은 그제야 별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일단 한숨을 놓을 수 있었다. 소년은 피식- 웃으며 반대편 옥상 끝 난간에 걸터앉았다. 소녀의 오줌줄기 소리가 들렸다. 묘한 흥분을 느낀 소년은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뒤돌아서 볼일을 보는 소녀의 보름달 같은 하얀 엉덩이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밑으로는 소녀의 오줌 줄기가 보였다. 그때 소녀가 고개를 돌리면서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고, 두 사람 모두, 고개를 휙- 돌려 외면했다. 소녀는 부끄러웠고, 소년은 키득이며 웃었다. 저 여자가 내 여자다, 하는 생각에 소년은 왠지 뿌듯했다. 하지만 그 생각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바로 소녀의 꿀밤이 소년의 머리에 작렬한 것이다. 소년은 어쭈, 하는 표정으로 소녀를 돌아봤지만, 소녀는 검지를 자신의 입술에 갖다대며 조용히 하라는 표시를 했다. 소년은 풋- 웃으면서 소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소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췄다. 이미 지난밤에 경험을 해서인지, 소년도 소녀도 비교적 자연스러웠다. 소녀도 옆 난간에 걸터앉았다. 모르긴 몰라도 얼추 이불 빨래가 끝나갈 시간이 다 되었을 것 같았다.
“이젠 어쩌지?”
“글쎄? 뛰어내릴까?”
소년의 농담에 소녀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자살은 아무나 하나...? 소녀는 자살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자살할 용기 가지고 더 열심히 살라는 말은 우습다고 생각했다. 오죽했으면 자살을 택할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소녀가 자살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런 교과서적인 말 때문이 아니라, 왜 도피를 하는가에 대한 문제였다. 자살은 분명 도피였다. 그럼에도 오죽하면 자살을 했을까, 하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지만, 적어도 도피만은 싫었다. 부딪혀야 했다. 삶은 몸으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직은 그게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삶이란 몸으로 부딪히고, 저항하고, 싸우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을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누군들 이런 쨍쨍한 햇빛 아래의 옥상에 있고 싶겠는가? 더군다나 한 여름에. 결국 자신도 지금 이 순간은 도피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달리 다른 길이 없었다. 그런 것일까? 소녀는 잠시 자살을 이해할 것도 같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도 그건 아니었다. 지금 소녀는 도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잠시 후퇴를 하고 있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보다 나은 결과를 위해서. 이것은 삶의 문제였다. 적어도 죽음의 문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삶과 죽음에 대해서 생각한다는 것이 적잖게 우스웠다.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야 할 만큼 위급한 상황일까, 하고 소녀는 생각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광고가 어떤 건지 알아?”
소년이 물었다.
“?”
“청바지 광고였나? 왜, 남자하고 여자 둘이서 벽을 부수면서 달려가잖아. 그러다가 끝내는 건물을 뚫고, 높은 나무를 따라 뛰고, 그러다가는 결국, 어떻게 됐는지 알아?”
“어떻게 됐는데?”
“히힛-, 사실 기억은 잘 안 나는데, 달까지 뛰어 갔던가, 아니면 우주로 날아들었던가?”
“피- 거짓말.”
“야, 넌 텔레비전도 안 보냐? 그 광고 되게 자주 나왔었는데. 얼마나 멋있었는지 알아? 사방이 꽉 막힌 벽을 뚫고, 하늘까지 뛰어간다는 게. 나도 그렇게 달려서 저 하늘 너머로 갈 수 있다면 좋겠어.”
“하늘까지도 안 바래. 저 밑으로만 내려 갈 수 있어도 이렇게 옥상에 갇혀있지는 않을 텐데.”
“흐흐, 그런가? 근데, 왜 어머니는 안 올라오시고 마당은 저렇게 시끄럽냐? 어머니 올라오시면 자살소동이라도 벌여서 용서받으려고 했는데.”
“이그-”
소녀는 또 꿀밤이라도 놓을 듯이 소년을 장난스레 흘겨봤다. 그런데 아닌 게 아니라 엄마가 올라와도 벌써 올라왔어야 할 시간이었다. 또 정말 소년의 말처럼 마당은 왁자했다.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살금살금 마당이 보이는 곳으로 갔다. 잔뜩 웅크린 채 마당을 정탐하던 소녀는 순간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마당의 평상에서는 동네 어르신들이 모두 모여 막걸리 잔치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소녀의 어머니는 어르신들 접대를 하느라 빨던 이불도 마당 한쪽에 치워놓고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소년과 소녀는 텐트 위에 과자 봉지 같은 것을 쌓아서 조금이라도 짙은 그늘을 만들어 보려고 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바람이라도 불면 나으련만, 바람 한 점 불어주지 않았다. 그동안 아쉬운 대로 햇볕에 데워진 미지근한 물이라도 마시며 갈증을 달랬지만, 이제는 그 물마저도 다 떨어졌다. 배도 고파오고, 갈증도 나고, 이제는 가만히 있어도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소년과 소녀는 무인도가 따로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차라리 무인도라면 지나가는 배가 구해주기나 바라겠지만, 여기에서는 그런 것을 바랄 수도 없었다. 오히려 누군가가 자신들을 발견할까봐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다. 하지만 이제 부모님께 걸릴 것에 대한 걱정도 처음처럼 크지 않았다. 두려움이란 것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면역이 되는 모양이었다. 또는 눈앞의 작은 고민이 그 뒤에 닥칠 커다란 고민을 덮었는지도 몰랐다.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는 소녀의 모습이 섹시해 보였다. 소년은 소녀의 땀을 혀로 삼켰다.
“뭐야?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러고 싶어?”
“아니, 목말라서.”
소년은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땀에는 염분이 있어서 더 목마르게 되는 거 몰라?”
“그런가? ...그럼, 침은?”
소년의 말에 소녀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사실, 소년은 어제 소녀에게 사막에 대해서 말하면서 한 가지 빠트린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막에서의 섹스였다. 물론 사막에 대해서 얘기할 때만 해도, 섹스에 대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상상일 뿐이었지만, 막연한 동경 같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소년의 꿈이었다. 희망사항이 아니라, 자면서 꾸게 되는 꿈. 소년이 처음으로 몽정을 할 때였다. 그 꿈에서 소년은 사막에서 여자와 섹스를 하고 있었다. 태양이 작열하는 하늘 위에는 외로운 독수리 한 마리가 두 사람을 노려보며 선회하고 있었고, 사막에는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소년은 여자의 얼굴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여자의 쇄골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은 선명한 기억으로 지금까지 남아있었다. 그리고 꿈이라서 그랬겠지만, 자신의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도 본 것 같았다. 어쩌면, 그 느낌이 나중에 형상화 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모래사막에서 소년과 여자는 둘 만의 세계를 만끽했었다. 그런데 지금 불현듯, 그때의 꿈이 떠오른 것이었다. 소년은 자신의 입에 고인 침을 소녀에게 넣어 주었다. 그 순간, 두 사람에게 더럽다던가하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 <옥상에서의 하루> 2부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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