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 - 2부 22장
본문
감기 - 29 개미의 날개 16
기획실장에게 제안서를 도둑맞은 이상, 그것을 시각화한 작업물을 숨겨 놓는다고 해서 달
라지는 것은 없다. 특히나 지금처럼 부하직원들의 서포트를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는 기획
실에서 정한 시한마저 맞추지 못 할 위험까지 안게 된다. 아깝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다만
억울하고 분할 뿐이다. 이곳에 입사하자 마자 마치 신고식처럼 이런 일을 겪게 되는 것은,
아무리 동해기획에서 전쟁같았던 시간을 거치고 팀장까지 올라간 나였지만 늘 입맛을 쓰게
만든다.
어차피 어느 회사를 가나 꼭 한 놈씩은 있는,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샤일록과 같은 비열
한 존재였다. 이 샤일록이라는 놈이 정말 웃긴 것은 자신의 힘만으로 노력하는 자들보다 출
세길이 더 빠르다는 것이 속이 쓰린 것이다. 중세의 탐관오리처럼 부하직원의 고혈을 짜서
강탈한 것으로 자신의 기름진 배를 채우는 놈들은 어사 박문수와 춘향전에서는 권선징악적
인 결말로 읽는 이들에게 통쾌한 맛을 느끼게 해주지만, 실제 사회에선 그런 것은 결코 통
하지 않는다. 힘과 권력이 있는 자는 그야 말로 살아있는 진리가 되는 이 더러운 도시에서,
나처럼 어중간한 개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도시라는 정글의 생존법칙을 스스로 터득하는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난 동해기획에 있는 동안 먹이사슬의 최하층에서 중간 포식자까지 올
라간 경험이 있는 맹수였다. 비록 그 맹수의 모습이 도시의 쓰레기를 처리하는 하이에나일
뿐이지만, 나 또한 강한 턱을 가지고 있는 포식자라는 것을 지금 날 무시하는 이 회사 모든
이들에게 증명해 주고 싶었다.
자신보다 월등히 강한 맹수를 사냥하기 위해 하이에나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기
다리는 것, 이 한 가지뿐이다. 자신의 위에 군림하고 있는 상위 포식자에게 섯불리 이빨을
드러내는 것 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다. 1년이든 2년이든 약점을 드러낼 때를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그가 스스로 자신의 부드러운 뱃살을 보여줄 때 까지 더럽더라도 참고 또 참으며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어렵게 찾아올 그 단 한순간을 놓치지 않고 놈의 숨통을 끊어 놓기
위해서.
복사해서 부서 공유폴더에 넣은 파일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대장 오리에게 업무 지시를 내
릴려고 할 때 책상위의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디자인지원팀장 선우영입니다. "
"날세.. "
어제 함께 술을 마시며 내게 모종의 제안을 한 홍보부장이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가 가라
앉아 있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아 나 또한 저절로 긴장하게 된다. 상사의 사적
인 감정에 따라 부하직원의 감정이 휘둘리는 것은 직장이라는 것에 얽메인 이라면 어쩌면
당연한 반응인지, 지금 이 씁쓸한 기분은 어쩔 수가 없다.
"예. 부장님. "
"올라오라고 연락한지가 언젠데 아직도 자리에 있는 건가? "
"예? 그 무슨.. "
이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이고, 트집잡을 게 없어서 생트집을 잡는 소리인가? 받
은 연락이 없는데 언제 나한테 올라오라고 말을 했다고 하는 생각을 할 때, 동시에 떠오르
는 것이 있었다. 열받아서 잠시 담배 피러 간 사이에 부서에 부재중으로 남겼던 것 같았다.
그런 내 입장을 노련한 홍보부장이 놓칠 사람이 아니었다.
"이런.. 내가 자네를 오해한 모양일세. 미안하이. "
"아닙니다. 후우.. "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 것 같네. 바쁘지 않으면 올라오게. 긴히 할 말이 있으니.. "
"예. 알겠습니다. "
이 놈의 빌어먹을 회사는 어떻게 하면 날 열받게 만들 것인지 그것만 연구하는 회사인 것
같은 느낌이다. 적당히 쓰고 버릴려는 경영진, 그 틈에서 날 이용할려는 홍보부장과 내 아
이디어를 훔쳐간 기획실장, 그리고 나와 관계된 모든 것에서 방해만 되는 부하직원. 어느
곳에도 마음을 놓고 기댈 수 있는 곳이 하나 없었다. 씁쓸한 미소가 얼굴에 절로 그려지더
니 곧이어 진득한 비웃음으로 바뀌어 간다.
"또 한번 물 먹인거라 이거지?"
어차피 이곳에 정이라는 것 자체가 떠나갈 때로 떠나간 이상 한번 미친척을 해보기로 했다.
두근거리는 심장만큼 옥죄어 오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파티션 넘어 여섯 마리의 미운
오리새끼들을 향해 걸어갔다. 조금전 내 전화의 대화로 무슨 말을 할 것인지 눈치를 챈 그
들의 눈빛을 하나 하나 확인해 가며 조용한 사무실안에 나지막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자리비운 동안 부장님 전화 받은 사람 누구죠? "
파티션 위로 눈만 내놓은 미운 오리새끼들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며 내 말에 대답을 하지
않는다. 하긴, 내 물음에 대답을 할 정도였다면 애초에 이런 짓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
래도 이들은 내가 부장에게 깨질 것을 예상한 모양인데, 그와 나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진
행중인 것도 모르고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이들에게 다시 한번 더 물었다.
"아무도 없습니까? 부장님께서는 하셨다는데, 부서에 있지도 않은 자동 응답이었습니까? "
두 번의 형식적인 질문에도 미운 오리새끼들은 어디서 개가 짖나 하는 표정으로 서로의 얼
굴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 그래. 이 정도까지 짖었으니 슬슬 내 본 모습을 보여줄 때가 됐
지. 나도 그동안 많이 참았고 이 회사에 더이상 정도 없으니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속시원히
떠나볼까.
"셋 세리는 동안 솔직하게 말을 안 하면, 이 부서가 앞으로 어떻게 될 건지 진지하게 생각해
야 할 겁니다. 하나.. 둘.. 셋. "
마지막 세번의 말을 다 했는데도 그들은 파티션에 몸을 숨긴 채 아직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마치 그렇게 서로의 입을 다물고 있는 것 만이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인듯 통
일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좋아. 당신들 여섯 명! 전부 부서장에 대한 노골적인 업무방해와 태업으로 경영인사위원회
에 심사건의하겠어. 나도 그딴 병신짓하고 한직으로 내몰리기 전에 옷 벗고 다른 회사간다.
됐지? 어디 끝까지 한번 가 보자. 다른 놈들은 더러워서 조용히 사직서내고 병신처럼 그냥
떠난 모양인데.. 난 성격이 더러워서 맞고만 못 살아. 니들 잘못 건드렸어."
"콰앙! "
내 파티션 근처의 파일함을 발로 차서 넘어트리자 그 큰소리에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 궁금
해 하는 다른 부서 직원들이 웅성거리며 우리 사무실에 다가와서 구경하기 시작했다.
"뭐야! 당장 안 사라져! 그리고 당신들! 여기서 기다려. 오늘 이 좆같은 지원팀 해체시키고
다들 새 직장 구해보자. "
거친 숨을 내쉬며 복도로 걸어 가고 있을 때 대장 오리가 내게 급히 다가 오더니 팔목을 붙
잡았다. 사무실 입구에서 몸은 그대로 두고 고개만 옆으로 돌려 그녀를 바라 보았다.
"뭐야? "
"제가.. "
"말 중간에 자를 거면 꺼내지도 말고 닥쳐! "
"제가 부장님 전화를 받았습니다. 죄송합니다. "
고개 숙이며 말을 해오는 그녀의 말에 난 진득한 비웃음을 가득 머금고 그녀를 몰아 붙였
다. 기회를 잡았을 때 상대의 약점을 놓치지 않고 물고 넘어지는 것은 어설픈 맹수인 하이
에나가 정글을 살아오며 터득한 생존법칙 중에 하나였다.
"본사가 정한 내규와 사칙에 의하면 주요한 업무를 이행중인 부서장의 업무를 고의로 방해
했을 때 이에 해당하는 징계가 뭔지 알아? "
내 질문에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내저었다.
"그리고 부서장의 정상적인 업무지시를 뚜렷한 사유없이 거부하거나, 부서의 업무능력을
저하시킬 목적으로 위반할 경우, 또 집단적으로 태업을 조장할 경우에는 이를 교사한 자의
처벌은 더 가중된다는 것 알아? 몰라? "
다시 그녀의 고개가 힘없이 옆으로 움직인다. 정말 웃기지도 않았다. 그런 것도 모르면서
지금까지 이런 분위기를 조장했다는 것이 신기했고, 또 지금까지 이곳을 거쳐간 부서장들
이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 신기했다. 이곳에서 버티지 못 하고 옷을 벗을 생
각이었다면, 어차피 막가는 인생, 한번 푸닥거리 진하게 하고 나가야 속이라도 시원할 것이
아닌가? 조용히 무대를 벗어 난다고 누구 하나 박수라도 쳐 줄 것도 아니고. 그 병신같은 놈
들이 바보처럼 굴며 남겨 놓은 쓰레기를 내가 대신 주워담고 있었다. 이래서 내가 하이에나
짓 하는 걸 싫어하는데.
"너 이름 뭐야? "
"김유진입니다. "
"이 회사에 몇 년이나 있었다면서, 그 흔한 내규나 사칙도 모르면서 그렇게 잘난 척 했어?
여태 그딴 것도 모르면서 까불었지? "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눈 앞의 여인에게 소리치
는 것으로 대신 풀었다.
"이 회사에 들어온지 몇 주 되지도 않는 나도 외우고 있는데? 그동안 니들이 했던 그 더러운
짓거리들!.. 뺨이라도 때리고 싶은 거 참는다. "
손가락으로 그녀의 면상을 정확히 겨냥하며, 최종 선고를 내리는 판사처럼 차가운 말을 내
뱉었다.
"너 하나 옷 벗고 끝내. 당장 사직서 쓰고 나가. "
내가 한 말에 그녀가 떨리는 눈으로 날 바라본다. 그렇게 날 쳐다본다고 지금 이 분노를 웃
으며 넘길 것 이라 생각한다면 정말 잘못 생각한 것이었다.
"왜? 그게 아니면 지금 22층에 올라가서 여기 있는 애들 옷 다 벗길까? 나도 벗고? 한번 끝
까지 가볼래? 분명히 말했지? 니들 잘못 건드렸다고. 너희들 다 각오해. 니들이 어디로 가
던 부서장들 병신만들고 옷 벗긴 년들이라는 거, 내가 책임지고 소문내 주마. 어디 재취업
열심히 해 봐라. "
"제가.. 사직서 쓰겠습니다. "
그녀가 대답을 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눈물을 바라보다 지금껏 참았던 분노가 다시
들끓기 시작한다. 배부르게 먹이를 삼킨 악어의 눈물도 이 눈물에 비한다면 성스러울 것이
다. 자신이 지금까지 한 행동은 생각지도 않으면서 당장의 상황에서 마치 약자인 듯이 호소
하는 가증스러운 눈물을 보자 짜증이 솟구쳤다.
"눈물 닦아! 억울해? 지난 몇 주 동안 아무 잘못도 없이 혼자 병신된 난? 내가 니들에게 무
슨 잘못을 그렇게 했길래? 응? 그딴 가증스런 눈물 닦고 사직서나 써! "
숨막히는 정적속에서 긴장한 채 눈 앞의 여직원과 나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는 나머지 미운
오리새끼들에게 고개를 돌려 마지막 말을 내뱉은 후 부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너무 지체
했기 때문에 더이상 말을 할 시간이 없었다.
"부장님 뵙고 오는 동안 사직서 내 책상위에 올려 놓고 사라져. 그동안 안되있으면 니들 5명
이 연대로 사직서 써. 어디 한번 나도 사표내고 다 같이 길바닥에 나가 보자. "
조용히 흐느끼는 여직원을 내버려 두고 부장실을 향했다. 신경질적으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도착한 부장실에는 게임 사운드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조금전의 일로 거칠어진 옷
매무새를 대충 다듬은 후 그의 책상 앞에서 고개 숙여 인사하며 게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디자인지원팀장 선우영입니다. "
"잠시만 기다리게. 다 끝나가네. "
"예. 부장님. "
한참 게임에 집중하던 그가 마우스를 거칠게 밀어내며 내 얼굴을 바라 본다. 방금 끝난 게
임의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가를 긁으며 무언가 말을 할 것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는
그의 얼굴이 밝지 않았다.
"부서에 말썽이 있었던 모양이군. "
"어느 정도 아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구요. "
"그런가? "
다시 한번 버릇처럼 눈가를 긁은 그가 서랍에서 담배갑을 꺼내어 내게 내밀어 보인다. 담배
를 피고 싶은 생각은 굴뚝같지만, 아직 맞담배를 피기에는 그와 나 사이에 놓인 문제가 해
결되지 않은 상태라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그의 권유를 대신했다. 한 개피의 담배를 꺼내
물자, 그가 말을 꺼내기 전에 알아서 뒤편에 있는 창문을 열어 주었다. 열려진 좁은 창문 틈
세로 차가운 겨울바람이 스며들어 왔다.
"큭큭.. 눈치가 좋군. "
"이 정도는 눈치가 없어도 누구나 하는 일입니다. "
"꼭 그렇지는 않네. 알아도 시킬 때 까지 움직이지 않는 이들이 여기엔 더 많아. "
부장실에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화끈거리는 얼굴을 내맡기고 한동안 그것을 느끼고 있었
다. 머리에 가득한 열기가 차갑게 식어가자 부장의 속뜻이 눈에 보이는 듯 잡히기 시작했
다. 창밖 아래로 뿌연 스모그가 옅게 깔린 회색빛 도심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부장님의 그 말씀은.. 말을 하기 전에 알아서 가려운 등을 긁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이 말
씀처럼 들립니다. "
"역시 자네는 예리해.. 어떤가? 어제 내가 한 말. 한번 생각해 봤나? "
담배를 피며 아직도 눈가를 긁고 있는 부장을 창문에 반사된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자 무언
가 이질적인 것이 느껴졌다. 어제 술자리에서 느긋한 표정을 짓던 그의 모습이 결코 아니었
다. 어제와는 분명히 다른 모습. 물론 게임을 엉망으로 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해 볼 수
도 있겠지만, 지금 그의 물음은 그런 저급한 감정으로 좌우된 것이 결코 아니었다. 내가 모
르는, 그리고 알 수 없는 것에 의해 코너에 몰린 맹수만이 가질 수 있는 신경질적인 모습을
그는 애써 숨기고 있었지만, 난 부장의 눈가를 긁는 손가락에서 그런 감정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한번 동문은 영원한 동문이라고 하셨지요? "
"그랬지. "
한동안 안개처럼 도시를 감싸고 있는 회색빛 스모그를 바라보다 몸을 돌려 그의 눈을 마주
쳐갔다. 피하지 않는 내 눈빛에서 무언가를 느낀 그가 몸을 바로 세우고 날 향할 때, 그 짧
은 순간동안 고민했던 대답을 그에게 내밀었다.
"부장님께서 의식하기도 전에 믿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카드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단지
한번 쓰고 버릴 조커로 생각하지 않으신다면 말입니다. "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네. "
사회에서 절대라는 말만큼 위험한 말도 없지만, 일단 그의 말을 반 쯤은 믿기로 했다. 한번
몸에 묻은 똥을 더 묻힌다고 똥개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부탁드릴 것이 하나 있습니다. "
"내가 줄 수 있는 거라면 어떤 것이든 주겠네. 이 방만 빼고.. 큭큭. "
"그럼 이 방 대신 부장님의 차를 달라고 할까요? "
"뭐? 크하하하하 "
그의 제안을 승낙한 내 대답이 기꺼운지 조금전의 긴장된 얼굴이 풀어지며 어제처럼 농당
을 걸어오는 홍보부장이었다. 그의 달라진 반응에 기대를 한 나는 또 다시 창문밖 아래의
풍경을 바라보며 머릿속에서 정리된 것을 그에게 요구하기로 마음먹었다.
"제게 저희 팀에 대한 전권을 주십시요. 특히 인사권.. "
"그건.. 인사부장과 경영진의 권한이네. 지금의 자네로선 월권이야. 안돼. "
의외의 요구인 듯 그가 살짝 당황하며 내 말에 단호한 대답을 해 왔다.
"부장님과 인사부장, 그리고 대표께서 자주 자리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기에 드리는 말씀
입니다. 그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
그가 술자리에서 내게 흘렸던 작은 조각을 놓치지 않고 그것을 물고 넘어지자 까다로운 상
대를 만난 도박사의 표정처럼 그의 포커 페이스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왜 필요한지 물어도 되겠나? "
"제가 부장님의 카드가 되기 위해서, 그리고 충분한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우선 팀을 장악
해야 합니다. 지금처럼 부하직원들에게 병신 취급을 당하는 상태로는 결코 부장님께서 필
요할 때 도움은 커녕 방해만 될 겁니다. 안에서 부터 확실한 자리메김을 한 후.. "
잠시 말을 끊은 후, 주머니에서 지포 라이터를 꺼내 만지작 거리며 조금전의 말을 이었다.
동해기획에 있을 때 부터 내 몸에 자리잡기 시작한 습관, 초조하거나 긴장될 때 그것을 풀
어주는 내 나름의 습관들 중에 하나였다. 그만큼 지금의 이 거래는 내가 이 회사에서 어떻
게 살아 남을 것인지를 결정짓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타 부서와 달리 여직원들로만 구성된 팀이라는 약점을 강점으로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제가
노려야 합니다. 그때서야 부장님이 가지고 계신 그 어떤 카드로도 만들 수 없는 힘이 될 수
있으니까요. "
"생각해 둔 거라도 있나?
"찍어 낼 자가 있습니다. 제가 팀을 장악하기 위해선 우선 본보기가 필요합니다. "
차갑게 식어있는 내 눈빛이 마음에 드는지 살짝 미소를 지은 그가 나름의 결정을 하는 시간
을 보낸 후 내 요구에 시원한 대답을 해주었다.
"확실한 사유가 필요하네. 그래야 경영진과 인사부를 설득시킬 수 있어. "
"사유는 충분히 만들 수 있습니다. 어차피 함정을 팔 생각이니까요. 붕어처럼 제가 던진 미
끼에 걸려 들 겁니다. "
그의 시원한 대답에 고개 숙여 인사를 대신하자 묘한 웃음을 아직도 지우지 않고 있는 그가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자네가 그런 말을 하다니.. 의외로군. "
"하이에나의 사냥 방법에는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어설프게 상처입은 짐승을 물지 말 것. 왜
냐하면 뒷다리가 짧은 하이에나는 뛰어서 도망갈 수 없기 때문이지요. 다만 천천히 끝까지
쫒아가 먹이가 지쳐 쓰러질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동해기획에 있을 때 제 별명이 하이에
나였습니다. 기회를 만들고 기다리는 것은 제게 익숙합니다. "
"난 자네가 여우인 줄 알았는데.. 큭큭.. "
"전 제 스스로의 머리를 잘 알고 있습니다. 잔 꾀에는 능하지도 못 할 뿐더러, 저 보다 뛰어
난 이들이 무수히 많다는 것을 말입니다. 자신의 분수를 아는 것 또한 생존법칙중에 하나지
요. "
"후훗.. 재미있군. "
내게 손을 내미는 그의 손을 맞잡고 굳게 힘을 주었다. 서로의 손에 주어진 힘의 세기가 마
치 눈으로 보이지 않는 노예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것 같은 느낌을 전해준다.
"자네를 믿겠네. "
노회한 너구리와 손을 잡은 은퇴한 하이에나가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조금전까지 누
군가의 자리였던 책상 한 켠은 말끔하게 정리가 되어 휑한 빈 공간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눈가에 붉은 흔적을 남기고 있는 몇몇 여직원들의 눈을 훑듯이 쳐다본 후 사무실의 중간에
서서 그들을 향해 처음으로 디자인지원팀 부서장으로서의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이런 일이 한번만 더 일어나면 내가 책임지고 옷 벗겨주지. 또 한번 해 봐. 마음같
아서는 너희들을 다 짜르고 싶은게 나야! 위에 날 찌르고 싶으면, 니들 일부터 똑바로 하고
나서 찔러! 알겠어? "
대장 오리가 떠나며 남긴 흔적이 아직 추스려지지 않았는지 간혹 훌쩍 거리는 소리가 들렸
지만, 그것 또한 가식의 찌꺼기처럼 느껴졌다. 이곳을 거쳐 간 부서장들의 썩어 문드러진
심정은 미운 오리새끼 여섯 마리의 지금 감정을 다 모은 것 보다 결코 못 하지 않았을 것이
다. 마치 자신들이 최대의 희생양인 듯 굴고 있는 이들을 향해 본격적인 업무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번주까지 모든 작업을 마친다. 너! "
"예.. "
파티션 한 켠에서 눈가를 정리하고 있던 여직원 한 명을 눈으로 가르키며 부르자, 내 목소
리에 놀란 듯 숨을 삼키며 대답을 해왔다.
"예 다음에 뭐 붙일 말 없어? "
"예. 팀장님. "
"공유폴더에 들어있는 파일. 내일까지 수정해서 다시 넣어 놔. 그리고 너! "
"예. 팀장님. "
동해기획에서 배우고 익힌, 다수의 적을 만나 상대를 해야 할 때는 최대한 접전을 피하며
적당한 기회를 노려 전격전으로 각개격파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배운 전략이 지금
이 순간 효과를 발휘했다. 처음 한 명이 분위기에 눌려 날 팀장으로 부르기 시작하자, 그
후에는 자연스럽게 내 부름에 팀장이라는 말이 이들의 입에 달라붙어 간다.
"지금 하고 있는 작업 오후까지 폴더에 넣어. 퇴근전까지 안 넣어 두면 알아서 해. "
"예. 팀장님 "
"지금부터 우리 팀은 강릉 마라톤 대회 작업에만 집중한다. 종전의 모든 작업은 오늘 퇴근
전까지 모두 마무리지어. 그동안 니들이 놀면서 시간 떼운 거, 그 짓거리만 없었으면 이렇
게 스케쥴에 쫒기는 일도 없었어. 억울하다고 생각하기 전에 니들이 월급 꼬박 꼬박 받으면
서 여기서 도대체 뭘 했는지를 먼저 생각해. 일해! "
지난 몇 주동안 지속되었던 살얼음판이 조금씩 단단하게 얼어붙는다. 하지만 아직은 부서
를 확실하게 장악한 상태가 아니었다. 단지 대장 오리가 떠난 이후 구심점을 잃은 미운 오
리새끼들이 내가 만든 분위기에 잠시 몸을 숙이고 있을 따름이다. 언제 이들이 새로운 대장
오리를 뽑아 또 다시 반기를 들지 알 수 없는 불안한 상황이었다.
내가 이 부서를 장악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확실한 본보기, 그리고 이 회사의 경영진들이
내게 바라듯이 나 또한 희생양을 노리고 있었다. 내 목표는 조금전 사표를 내고 떠난 김유
진이 아니라, 지금도 파티션 넘어로 일하는 척 하며 무언가 딴 짓을 계속하고 있는 한혜진.
그녀였다.
"아직도 정신 못 차렸지? 기대하고 있어 봐. "
차근 차근 내 주변의 먹잇감을 정리한 후 내가 노릴 최종의 목표는 기획실장. 그자가 될 것
이다. 비록 그를 노리기 위해 내가 너구리와 손을 잡는 것은 큰 실수를 한 것인지도 모르지
만, 그와 나의 최종 목표는 어쩌면 다른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렇게 난 홍보부장과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오월동주를 시작했다.
감기 30편 개미의 날개 17은 이번 주말전에 올라 올 듯 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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