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일기_2 - 2부 17장
본문
등으로 일단 막았다. 밖에서 진희가 문 열라고 한다. 조금만 기다리라고 이야기 하고는 둘이 후다닥 뒷처리를 한다. 문이 열리고 진희가 들어온다.
“둘이 여기서 뭐해?”
표정도, 목소리도 좋지 않다.
“나 불러서 언니에 대해 뭐 이것저것 물어보네? 히히 그럼 더 궁금하시면 언니한테 직접 물어보세요~”
하더니 홀랑 빠져나간다. 멍~ 해 보이던 년이 약삭빠르다. 탁 하고 문이 닫히니 진희가 다그친다.
“오빠 쟤랑 여기서 뭐 했길래 문을 닫아?”
“하긴 뭘해~”
“아~ 기분나빠~”
“예민하긴~ 할 예기 없으면 나 자리로 돌아간다”
진희를 밀치고 자리로 돌아오는 길은 멀었다. 아니 멀게 느껴졌다. 돌아오는데 커튼 사이로 방기사가 뚫어져라 보고 있다.
‘그냥 좀 처 자라~ 눈치 없는 새끼. 앞으로 귀찮겠네~ 아 씨발’
자리에 와서 음악을 들으면서 다시 눈을 감았다. 왠지 섹스 후라서 그런지 조금 졸린다. 다시 잠이 들었다. 이번에는 깨는 일 없이 비행기가 거의 다 도착해서야 깨었다. 목이 타고 배도 고파왔지만 드는 생각은 그저 비행기에서 빨리 내리고 싶은 마음뿐이다.
사슴 눈이 와서 자기 한국 전화번호라면서 명함을 주었고, 진희는 좀 전에 일로 매우 기분이 상했는지 몇 번 마주쳤는데 말도 없고,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 별로 상관하고 싶지 않다. 난 원래 나쁜 놈이고 또 좋은 척 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게이트에서 의외로 크리스가 직접 반긴다. 크리스와 간단한 포옹을 하고 공항을 빠져나왔다. 기사가 운전하는 리무진에서 목이 마르다고 하니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준다.
“크리스~ 계약서 준비는?”
“하하하 오자마자 일 이야기냐?”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잊었어? 나는 그 일 때문에 온거야”
“그래 그래 그래~ 예민하긴”
“계약이나 빨리 해치우고 숨 좀 돌리자”
“오늘은 힘들고 아마 내일 할거야~ 우리도 이번 건은 빅딜이라서 행사도 있고…”
“세부사항 조율은 잘 되었어? 내가 수정 했으면 했던거… 메일 확인 했지?”
“아~ 확인 했어~ 너 그러다 일찍 죽는다~ 너무 일만 하는거 아니야? 하긴 니가 원래 일만 아는 놈이었지?”
“이야기 했자나~ 내가 지금 여유부릴 시간이 없다고~ 계약서에 싸인 해야 불면증에 시달리지 않겠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호텔에 도착했다. 공식적인 계약 관련된 스케줄은 내일 아침부터고 오늘은 푹 쉬라고 하고 크리스는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 왠지 피곤하다. 그렇게 잠을 잤는데도 비행기라는걸 타 본 사람은 알리라… 왠지 바이오 리듬은 엉망이고 허리도 무겁고 몸 전체가 좋지 않다.
“똑똑”
“네~”
“하이~”
진이다. 왜 그녀가 크리스와 따로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반갑다. 갑자기 그녀의 나신과 그녀의 속살이 떠올라 조금 흥분된다.
반갑다며 서로 인사를 하니 조금 후에 방기사가 나타난다. 진이 깜짝 놀란다. 설명을 하고 방기사를 돌려보냈다. 아무래도 꺼림칙하다. 앞으로 편해지려면 저 놈부터 어떻게 해야 하겠다. 감시자 같아서 영 불편하다.
진에게 그간의 안부를 물으니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갑작스러워 당황스럽다. 그녀를 안아주고 등을 다독여 주었다. 서로 말없이 그렇게 있다가 안되겠다 싶어 침대에 앉히고는 의자를 가져와 그 앞에 놓고 그녀의 얼굴을 들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진은 조금 진정을 하더니 월터가 아프다고 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암이라고 했다. 순간 당황스러우면서 계약이 어떻게 되는지 걱정이 앞선다. 그러다 죄책감이 밀려온다.
‘아~ 씨발 사람이 죽어가는데 나는 내 걱정만 하고 있네~ 아 씨발… 내가 왜 이렇게 되었지?’
진에게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보라고 했다. 진은 얼마 전 갑작스럽게 월터가 심장문제로 검사를 받다가 알게 되었다면서 지금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의사, 월터, 자기뿐이라고 하면서 심하게 몸을 떨었다.
얼마나 심각하냐고 물으니 진은 2개월 이라고 하면서 다시 오열했다. 무섭다면서 나를 꽉 안아오는데 측은한 마음과 함께 아까 그 죄책감이 다시 밀려온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다독였다.
조금 진정을 한 이후에 크리스는 월터의 뒤를 이을 수 있을 정도로 지분이나 회사 내에서 조직도 불분명하다고 했다. 지금도 경영은 전문경영진이 하지만 결정은 항상 월터만이 내렸고, 월터는 사후의 걱정을 매일 같이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 진에게 얼굴을 들어 나를 똑바로 보게 했다.
“진… 그가 떠나면 당신이 걱정해야 할 문제가 있어”
“그래~ 그것 때문에 월터가 너를 따로 보고 싶어해~”
“내가 도울 일이 있어?”
“그건 나도 몰라~ 월터가 알겠지”
“당신은 회사 일은 관여하지 않아?”
“관여해~ 나도 지분이 있고, 회사의 이사로 경영에 참여하고 있어”
“월터는 너를 결정하는 사람으로 앉히고 싶어해?”
“아마도”
도대체 내가 도울 일이라는게… 도무지 헷갈린다.
자세한 이야기는 오늘 밤에 그의 집에서 이야기 하기로 했다.
머리가 복잡하다. 그녀에게 샤워를 해야겠다고 하니 그녀는 밤에 사람을 보내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우선은 목욕을 좀 해야겠다. 욕실에 물을 받으면서 옷을 편하게 입고 바에 있는 위스키를 따라서 한잔 마시고 다시 한잔을 따라 잔을 들고 욕조에 들어갔다. 좋다. 뜨거운 느낌도 좋고 위스키를 마셔서 그런지 긴장이 조금 풀리는 느낌이다. 다시 위스키를 들어 단숨에 마시고는 욕조에 머리를 푹 담갔다가 올라와 무릎을 양 팔로 감싸고 생각에 잠겼다.
‘내가 도울 일이 내 인생에 도움이 되는 건가?’
‘그 정도로 나를 신뢰할까?’
‘왜지’
여러 의문이 들지만 이내 도리도리 머리를 저었다.
‘아니~ 아무런 정보도 없이 지금 생각을 하는 것은 좋지 않아!!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믿는 대로 배워온 대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행동하자!!’
나 스스로 원칙을 다시 입 밖으로 말하면서 목욕을 마치고 나와서 노트북을 열었다. 인터넷으로 관련된 기사들을 천천히 읽어 보았다. 방기사를 불러 함께 호텔에서 식사를 하고, 밤까지 그렇게 기사를 읽었다. 그리 중요한 정보는 얻을 수 없다. 그렇지만 다시 읽는 것만으로도 대략의 상황은 파악할 수 있으리라…
방기사를 방으로 보내고 전화기를 들었다. 전화해야 할 곳이 정말 많다. 김대표, 김회장, 탁전무 등등에게 잘 도착했다는 전화보고를 하고 계약은 내일 한다고 안심시키고는 빨리 전화를 끊었다.
혜경이에게도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고, 최과장이나 정대리, 진영이에게는 문자로 대신했다. 문자가 온 것도 있었는데 옥미가 들어왔다며 전화를 달라고 했고, 강마담의 쓸데없는 문자, 그리고 연락이 왜 안되냐는 영미 문자였다. 답장을 차례로 보내고 휴대폰을 닫으니 기사가 찾아왔다. 그를 앞장세워 월터가 보낸 차에 몸을 싣고 그의 집으로 향했다. 호텔에서 꾀 먼 거리… 30분이 넘게 지나자 그의 집이 나타났다.
작은 성! 그래 이건 거의 성이나 마찬가지다… 집까지 가는데도 차로 꾀 걸린다. 도대체 이런 집에 사는 늙은이는 돈이 얼마나 많은걸까? 내심 월터가 다시 느껴진다.
그의 집에 내려 월터와 인사를 했다. 그 인색하고, 무미건조한 늙은이가 꾀나 반갑게 맞이해준다. 죽을 때가 되어서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든다.
월터와 늦은 저녁을 영화에서나 보았던 그 긴~ 테이블에서 월터, 나, 진 이렇게 셋이 밥을 먹었다. 말도 한마디 없이… 밥이 콧구멍으로 들어갔는지 목구멍으로 들어갔는지도 모르게 정말 조용히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다시 벽 난로 앞 소파에 모였다.
식사 때와는 다르게 벽난로에 모이자 마자 월터가 입을 열었다.
“뭘 좀 마시겠나?”
“브랜디가 좋겠는데요?”
“음…”
진이 자기가 하겠다고 하더니 곧 사라졌다. 다시 적막…
진이 잔 세개를 들고 나타나는 동안 짧은 시간 동안 적막 때문에 숨이 막힌다.
셋이 모두 잔을 들고 한 모금 마시자 월터가 다시 입을 연다.
“진이 이야기 하던가?”
“뭘?”
“내 병”
“아~ 조금 전에”
“그래~ 어떻게 생각하나?”
“어떤?”
“내가 죽고 나면 크리스가 진을 지켜주기엔 너무 멍청하다고 생각하네~”
한 모금 더 마시면서 끄덕였다.
월터도 한 모금 더 마시면서 이야기를 해나갔다.
“나는 자네가 진을 지켜줬으면 하네만~”
“저는 그럴 수 있는 힘이 없는 아시아인 입니다”
“싫다는 건가?”
“아니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이야기 입니다”
“내가 힘을 주면?”
“그래도 싫습니다”
빙긋이 웃는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웃음…
“왜지?”
“그래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으니까요”
끄덕인다.
“내가 부탁을 해도?”
“아직 부탁 하지 않으셨습니다”
“무릎이라도 꿇으라는 건가?”
“아니요~ 그냥 부탁만 해도 됩니다”
“나는 긴 세월 동안 누구를 믿고 살아오지 못했네~ 그러는게 편했고, 또 그래야만 했어”
말없이 브랜디를 홀짝였다. 월터는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이제 죽음을 앞에 두니 누구를 믿고 살아야 했다는걸 깨달았네”
“그런데 시간이 부족해~ 항상 그렇지~ 항상”
월터도 브랜디를 한 모금 더 마신다.
“저는 믿을만한가요?”
“글쎄~”
“왜 저죠?”
“…”
말이 없다. 한참을 그렇게 말이 없다.
“아마도 니가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일거야~”
“전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입니다. 전 내일 당신과 계약을 맺어요”
“하하하 넌 거기 오래 있지 못해~ 너도 잘 알잖아?”
“맞습니다. 그래도 제가 선택 할 수 있는 옵션이 많아지는건 사실이죠”
“아니 니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없어”
“네?”
“그건 옵션이 아니야~ 니가 생선과 과자를 먹을지, 샌드위치를 먹을지 선택하는게 옵션이라고 생각해?”
“맞네요!! 저한테는 옵션이 없군요”
“그래서 너한테 부탁 하는 거야”
“이번 부탁도 제가 선택할 수 있는건 없는거 같은데요?”
“아니!! 그냥 노우~ 라고 하면 돼. 너한테는 노우와 예스 두가지 옵션이 지금은 있어”
손을 저으면서 브랜디를 입에 털어 넣고 눈을 감았다. 위험하다. 정말 위험하다. 그런데 이 위압감과 논리는 뭐지? 내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결과는 뻔하다. 난 여기까지 일거다. 계약도 지분도 뭣도 날 지켜주진 않을걸 나는 알고 있으면서도 멈출 수 없는 기차에 타서 그냥 빨리 버려지길 원하는 놈처럼 계약에 이렇게 목을 매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스”
“왜지?”
“내 인생은 내꺼니까”
“고맙네”
“저도 고맙습니다”
“나도 고마워요”
진이 눈물을 글썽이면서 월터를 안아 세게 포옹한다. 벽난로를 응시하면서 일어나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동전이 하나 잡힌다.
꺼내서 위로 튕기고 다시 잡아서 펼쳐 보았다.
‘그래!! 인생은 도박! 아직 패를 다 보진 않았으니 조금 더 패를 봐야겠지?’
눈을 돌려 월터와 진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먼~ 나라에서… 이렇게 생소한 사람들과… 웃기는게 인생이다.
계약은 일사천리로 마무리 되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이야기 하자면 세부사항에서 좀더 밀고 당기기를 해야 했다. 그렇지만 이제 나에게는 이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그 멍청이들은 당장 봐도 중요한 사항이 아니라고 생각할거고 또 실제로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다.
월터는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공식 일정 이외에는 늘 자기 집으로 불러 서재에서 이것저것 나에게 읽어보게 하고, 의견을 듣고, 토론했다.
그게 어떤 일의 순서인지는 나도 이미 알고 있다. 월터도 꾀나 무리수를 두고 있다. 나라는 리스크를 온전히 다 안고 최대한 편의를 봐주기 위해서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쓰고 있었다. 속으로는 무서운 늙은이라는 생각! 또 한편으로는 존경심이 들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진을 위해서다.
한국에 돌아가는 비행기에서도 계속 무언가를 읽어야 했고, 생각해야만 했다. 쉬운 작업이 아니다. 빠르고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이건 리허설이 없는 연극이다.
일주일 후에 영국에 다시 오기로 하고서야 월터는 한국에 보내주었고, 그 대신 많은 자료를 검토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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