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험담

십구번홀 - 7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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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는 자기 기분대로 마구 떠들어대다 자기 기분에 안맞춰준다고 투정하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피곤한 마음에 잘 됐다 싶어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아침 출근길에 버르장머리 없던 아가씨가 하필 우리 부서로 배정 받아 오는 우연한 일도 있었지만 세상 사는 이치는 우연보다는 필연이 더 많은 법이다.




지하철 역에서 내려 한참을 걷는다.


별이 반짝이며 머리 위에 떠 있다.


별을 세며 한 발짝씩 옮길 때 마다 반가운 가족이 있는 집이 가까워지고 있다.




"자네, 우리 미숙이 어떤가?" 저녁 식사를 하며 사장은 불현 듯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미인이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머쑥하게 대답했다.


"정말요?" 미숙은 반기며 뛸 듯이 좋아했다.


"미인이십니다. 코만 조금 높이면..." 


"수술할까요?" 


"칼대면 좋을 것도 없지요."


"요즘 칼 안댄 사람이 없대요. 그렇잖아도 코좀 높일까 했는데..."


"어휴, 미인입니다. 코마저 높으면 너무 미인이라서..."


"그럼 지금도 괜찮아요?"


"코 높여서 미스코리아 나갈꺼 아니라면 당근이죠."




미숙은 미인이라는 소리에 기분이 좋아진 듯 싶었다.


반주로 나온 포도주를 조심스럽게 마시던 그녀의 눈 빛이 따뜻하게 전달되어 오고 있음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이봐, 니들 벌써 사귀니?" 사장이 가볍게 퉁을 주었다.


"아직 사귀는 여자분 없어요?" 미숙이 물었다.


"연애는 해봤는데 남아있진 않군요." 애매한 대답을 하고 말았다.


"연애는 있고 여자는 없단 말이죠?


저도 애는 있고 남편은 없으니 같은 처지네요."


"혼자서 애 키우려니 불편하시겠군요."


"아뇨, 혼자 사는게 이렇게 편할줄 알았으면 하나만 낳고 더 일찍 헤어질걸 그랬나 싶어요."


"혼자 사는게 좋은가 보죠?"


"그럼요. 편해요."


"누군가 청혼해도 먹히지 않겠군요?"


"청혼? 또 결혼하란 말이에요? 말도 안되는 소리죠."


"너 결혼도 않고 죽을 때까지 집에 얹혀 살꺼니?" 사장이 약간 언성을 높이며 끼어 들었다.


"아빠, 결혼이란 구속일 뿐이에요. 이혼하니 이렇게 홀가분하고 좋은 줄 알았으면 첨부터 결혼 하지도 않았꺼에요." 


"제가 끼어들 틈이 없군요." 슬그머니 말을 흐리며 미숙에게 한마디 던졌다.


"어머, 김부장님도 독신주의자 아니었어요?" 미숙이 호들갑듯 살려 나갔다.


"상심도 크고 바쁘기도 했고 혼자 사는데 익숙하기도 하죠.


하지만 독신주의는 아닙니다."


"사장님만 안계셨다면 이 자리에서 미숙씨에게 프로포즈 했을겁니다."


"저 한테요?"


"어, 김부장. 자네 그말 진심인가?" 사장이 끼어들며 말을 거든다.


"하하, 농담입니다."


"괜찮네. 자네라면 내 딸을 맡길만 한데..."




가족이 될 자격조차 없는 나를 억지로 가족의 틈에 밀어넣은 사장님의 의도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날 네명이 회동하여 즐겁게 보낸 시간은 잊을 수 없었다.




미숙은 그 날 만난 것을 인연으로 자주 회사에 들렀다.


전혀 사장 딸인 것을 표내지 않고 내 사무실을 찾는 바람에 직원들 사이에선 부장이 장가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뜬금없는 소문이 말없이 퍼지고 있었다.




"김부장님, 저녁 때 시간 어때요?" 미숙이 물었다.


"약속은 없어요."


"오페라 좋아해요?"


"좋아하죠. 못 가본지 오래됐지만..."


"나비부인 어때요?"


"어디죠?"


"남산 국립극장인데 볼만하죠?"


"그럼요. 전 푸치니 작품이라면 사족을 못쓰는걸요."


"제가 차 갖고 갈테니까 택시타고 일곱시까지 매표소 앞으로 나오세요."




저녁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지만 시계바늘은 다른 때와 달리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초침의 움직임은 너무 느려터저서 한 눈금 한 눈금 지나가는 것이 마치 운동장 한바퀴를 뛰어도 될 것 같은 긴 기다림이 있었다.




직원들이 퇴근 준비도 하기 전에 회사 문을 나서 버렸다.


택시를 잡아타고 남산으로 향하는 내 마음은 온통 나비부인을 보게됐다는 즐거운 생각으로 은근한 콧노래가 흘러 나왔다. 


나비부인보다 더 아름다운 미숙을 만나게 된다는 사실이 앞질러 나를 즐겁게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날은 단순히 나비부인을 보게 된 기쁨으로만 가득한 줄 알았다.




화려한 무대위에 배우들의 연기가 펼쳐졌다.


많은 사람들이 숨죽이며 그들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다.


아름다운 선율은 장중을 감동시키며 바스락 거림도 용납하지 않을 집중도를 높여나갔다.


뱃사람, 여인, 사랑 그들의 애증이 온 몸에 부딪혀 왔다.


조심스럽게 손을 만지작 거리는 작은 손길을 느껴야 했다.


어깨 위에 약간은 풋풋한 향기가 밴듯한 냄새 좋은 머리향이 기대어지고 있었다.


작은 손을 잡았다.


어깨 눌리며 다가오는 또 다른 어깨를 살짝 안아들었다.


숨죽인 듯 조용한 관중 속에서 조용히 다가오는 여인을 받아 들였다.


관중이 열광하며 우레와 같은 박수 갈채를 보낼 때 쯤에야 두 사람은 어깨를 떼어내며 다른 사람에 섞여 똑같은 박수 갈채를 날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숫물 먹어 볼래요?" 미숙에게 약수터 까지 걷자고 제의를 했다.


"아뇨, 그냥 차에 타요."


"배 고팠죠?"


"네. 항상 일곱시에 식사를 해요. 벌써 열시라서 밥 먹는건 포기해야할텐데 김부장님은 배고프죠?"


"아뇨, 저도 허기가 지나버려서 모르겠어요."




미숙은 주차장에서 차를 빼서 한남대교 쪽으로 방향을 돌리더니 몇차례 유턴을 해서 팔팔도로를 끼고 지나더니 한강 고수부지에 차를 갖다 댔다.




강물이 달빛을 받아 출렁이며 그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몇 사람만이 보도브럭 위를 걷고 있을 뿐 더 많은 사람들은 아직 쌀쌀한 날씨탓인지 차에서 좀채로 나오지 않은 채 여기저기 주차한 채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차 안에서는 강물이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못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들은 추위 때문에 차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라고 단정하며 차 문을 열었다.




밤바람이 불고 있었다.


차가운 강바람 만큼이나 더 빨리 가락국수를 팔고 있는 식당차가 눈에 띄었다.


"저기 가요." 미숙이 팔을 끌었다.


"괜찮다니까요." 엉거주춤 미숙이 끄는대로 걸어가며 말했다.


"남자는 밥힘이래요. 다이어트 할 일 없잖아요." 


"밤참이라 생각하고 먹어볼까요?"


"그래요. 밤참 먹자고요."


"미숙씨도 한 그릇 할꺼에요?"


"아뇨. 전 다이어트 중이거든요."


"머쑥하게 저만 먹으라고요?"


"뭐가 머쑥해요? 제가 아직도 낯설어요?"


"그런 것은 아니지만..."


"좋아요. 곱빼기를 시켜서 같이 먹어요."




곱빼기로 나온 가락국수 한그릇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젓가락이 서로 오고갔다.


후르륵 거리며 국수가락을 빨아 먹다보면 어느새 두 사람의 입 사이에 가교가 생기기도 하고 그때마다 나는 젓가락에 힘을 주어 국수가락을 끊어냈다.




"저, 애 엄마라서 실망스럽죠?" 찬 바람을 맞으며 걷다 미숙이 불쑥 물었다.


"뭐가요?"


"제가 처녀가 아니라서 싫냐고요!"


"왜죠?"


"싫진 않은거죠?"


"그럼요."


"처음 만난 날, 농담이었겠지만 아름답다고 한 말 믿어도 돼요?"


"하늘 땅 맹세합니다. 정말 아름답다 생각했어요."


"그럼, 그날 프로포즈 한거 아직도 유효해요?"


"맘에 걸렸어요?"


"농담인거죠?" 미숙이 실망의 눈으로 말을 깔았다.


"제가 실수했군요. 맘 아프게 했다면 미안해요."


"아뇨, 아직도 유효하다면 다시 듣고 싶었어요."


"..."


"애 엄마 주제에 무리한 부탁이죠?"


"아뇨."


"김부장님 좋아했어요. 


이혼한걸 후회하진 않지만 결코 독신주의자는 아니에요."




나는 그녀의 독백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듯이 어깨에 손을 얹으며 가볍게 품에 안아들었다. 오돌오돌 추위로 몸살을 앓듯하던 한 마리 새는 커다란 남자의 품안에 둥지를 틀은 듯 편안한 자세로 온 몸을 던지며 안겨 들었다. 천천히 가슴에 안긴 새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어깨위에 올라선 손으로 가볍게 어깨를 안아들며 안달안달 어쩌지 못하며 그 새를 보듬어 나갔다. 뜨거운 입김이 목젖을 적시고 있었다. 달콤하며 부드러우며 탄력넘치는 작은 입술이 먹이를 채는 어린 새의 부리처럼 까칠한 턱을 지나 입술을 찾아 헤메고 있었다.


나긋한 허리를 끌어 당겨 빈약한 듯한 가슴을 온통 부딪히며 약간은 깐치발하듯 키를 세우던 그녀의 온 몸을 입술로 덮어 버렸다. 파르르 떨던 한 마리 새는 더 이상 날개짓을 포기한 채 한 사내의 품에 파고들며 몸부림치듯 허리를 끌어 안았다.




지나가던 연인들이 부러운 듯 망설임 없이 한참을 쳐다본다.


가로등도 두 사람의 사랑을 밝혀주려는 듯 힘차게 빛을 내고 있었다.




"가요." 미숙은 한참만에야 내 몸을 밀쳐내며 상황을 끝낼 수 있었다.


"춥죠?" 머쑥한 기분으로 미숙의 차에 오르며 뱉어낸 말은 겨우 그것 뿐이었다.


"전 아직 인정안해요." 미숙은 운전하며 독백하듯 말했다.


"뭘요?" 


"아버진 은근히 김부장님을 밀어주고 있지만 전 아직 재혼할 생각이 없어요."


"아까 그 시도는 뭐였죠?"


"가능성이죠.


제게 사랑이란 불씨가 아직도 남아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그런 시도."


"실험해 보니 남아있던가요?"


"모르겠어요. 김부장님은 어떤 느낌이었죠?"


"남자는 다 늑대라는데, 저야 그런 시도라면 사양할 일이 없죠."


"제가 아닌 다른 여자들이 시도해도 같은 느낌일꺼란 말이죠?"


"그런 뜻이 아니라..."


"저도 알아요. 사랑의 불꽃이 꺼져 버렸다는 걸."


"미숙씨가 애 엄마라는 자괴감을 버리지 않으면 극복할 수 없겠죠."


"자괴감? 저 스스로 옭아매는 패배의식을 버려야 한단 말이죠?"


"적극적 행동이 필요할 때죠."


"그럼 저랑 오늘 밤 사랑할래요?"


"사랑요?"


"왜 함께 자는 것 말이에요."


"..."


"타요."




미숙은 미친 듯이 악셀을 밟아댔다.


바람보도 더 빠른 속도로 어딘가를 향해 도로를 질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온사인이 밝게 빛나는 모텔이 눈에 들어온다.


급히 주차하며 뛰듯이 문을 밀어제치고 내 손을 잡아 끌어 프론트로 향했다.


눈치 빠른 아가씨와 몇마디 얘길 하더니 손지갑에서 돈을 꺼내 내밀었다.


미숙의 손에 쥐어진 것은 꼬리달린 열쇠뭉치였다.


아무 말없이 뒤따르며 미숙이 누르는 엘리베이터의 층 버튼만을 쳐다봤다.


조바의 뒤를 따라 길게 늘어선 복도를 걷고 있다.


상기된 얼굴로 성큼 걷는 모습은 골프장에서 보인 뒷모습 처럼 아름다워 보였다.


방문이 열려지고 미숙은 꺼리김 없이 불쑥 그 안으로 들어선다.


방안에 불이 밝혀지고 미숙의 어깨를 덮고 있던 바바리 코드가 옷걸이에 걸렸다.


나는 뒤 따라 들어서며 방문의 시건장치가 잘 작동하는지 확인했다.


여기저기 몰래 감춰졌을지도 모르는 몰카는 혹시 없을까 하는 걱정에 사방을 살폈다.


텔레비젼 소리가 들린다.


샤워실은 물떨어지는 소리가 진탕하고 있었다.


마치 죄인처럼 다소곳이 탁자에 걸터앉아 앞으로 일어날 사태를 수습할 방법을 궁리해야만 했다.




핸드폰이 울렸다.


"김부장, 우리 딸 애랑 함께 있나?"


"네, 오페라 보고, 식사하고 아직 함께 있습니다."


"전화 받을 수 있나?"


"아뇨, 잠시 다른 곳에 있는데 전화드리라 하겠습니다."


"알았네. 기다리지."




미숙은 샤워를 마치고 큰 타월로 몸을 감싼 채 침대 위로 벌렁 누웠다.


같이 있는 남자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눈치였다.


"사장님이 전화해 달라더군요."


"그래요?" 미숙은 핸드폰을 꺼내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했다.


"아빠, 오늘밤 저 못들어가요."


"..."


"김부장님이랑 함께 있을꺼니까 낼 아침 늦을꺼에요."


"..."




일방적으로 자신의 거취를 말해버리곤 전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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